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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중국형사경찰학원에서 조선족의 영예를 빛낸 사람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09.15일 15:54
공화국경견특종배육전문가 김상철에 대한 이야기



김상철 프로필:

1935년 길림성 연길현 조양구 광석촌출생

1953년 연변의 제일 첫 고중인 연변고급중학교 (현 룡정고중) 제3기 졸업생

1955년 봄 참군하여 심양군구 제 1퇀에서 병역에 참가

1957년 여름 항미원조 전선에 지원군으로 진출

1958년 가을, 지원군에서 돌아온 후 공안부제1인민경찰학교 (현 중국형사경찰학원의 전신)에 입학, 3년간 공부한 후 학교에 남아 교원으로 사업

1985년도부터 공안부인민경찰학교가 경견기술학교로 이름을 고침, 그는 이 학교에서 30여성상 줄곧 인민경찰 양성과 경견훈련에 정진, 수차 료녕성공안계통 우수당원, 료녕성정부 선진사업자 등 영예 따냄

1995년, 중국형사경찰학원에서 정년퇴직후 료녕성 심양시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있음

꿈 많던 청춘시절

누가 말했던가? 사람은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고 말이다. 올해 75세인 김상철옹은 현재 찬란한 추억속에 살만큼 평범치 않은 과거가 있다. 지난 8월6일, 기자는 료녕성 심양시에서 중국형사경찰학원 전임 공화국경견특종배육전문가 김상철옹을 만나 그의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1953년, 18살에 연변의 제일 첫 고중인 연변고급중학교(현 룡정고중)를 졸업한 김상철은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더 깊이있는 학문을 닦을 기회를 포기한채 고향인 연길현 조양구 광석촌(현 연길시 소영진 광석촌)에 돌아와 공청단사업을 맡아하게 되였다.

1955년, 마을의 웃어른들은 고중까지 졸업한 지식청년 김상철이 구석진 농촌에서 농사일하기보다는 참군하여 나라에 더 큰 기여를 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권고하였다. 촌민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김상철은 1955년도 봄에 군에 입대하여 심양군구 변방 1퇀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당시 변방지대인 연변의 개산툰, 삼합, 도문 등지에서 군복무하던 김상철은 군입대 이듬해인1956년도에 성과가 돌출하여 부대에서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7년도 여름, 소속된 변방부대가 항미원조지원군으로 전환됨에 따라 김상철은 조선전장으로 나가 지원군총부에서 근무하면서 중국지원군의 제일 마지막 퇴각과 함께 1958년 여름 중국으로 돌아왔다.

지원군에서 보낸 잊지 못할 젊음의 날들

김상철이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조선전쟁터에 나갔던 때는 수년간 지속되였던 가렬처절한 항미원조전쟁이 바야흐로 결속되고 적아 쌍방이 휴전선을 군사경계로 삼아 서로 대치하고있던 때였다.

지원군총부에서는 그때만 해도 흔치 않던 고중문화정도에 조선어와 한어 모두를 할줄 아는 김상철을 아주 중시하였다. 당시 지원군은 조선 백성들은 물론 대남교류에서 모두 조선어로 교류해야 했기에 김상철은 특별한 양성대상으로 조직의 깊은 중시를 받았고 마지막 지원군퇴각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그냥 김상철을 지원군에 남아있게 했다.

김상철은 지금도 지원군에서 싸우던 그때를 생각하면 어제 일처럼 기억이 또렷하다고 말한다. 특히 중국지원군으로서 국제주의원조의 사명감이라는 자호감을 가지고 내 민족의 나라에서 국제주의 원조를 할수 있다는 영광때문에 지원군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줄 몰랐다.

특히 그때는 적아 쌍방 모두 특무를 상대방군사구역에 파견하여 군사정보를 알아내려고 애썼는데 마차로 원시삼림에 낸 길로 군수품을 운수하는 임무는 득실거리는 특무들의 창궐한 활동때문에 위험하면서도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특히 특무들의 창궐한 첩보활동을 저지하려고 군사구역에 비밀통로를 제외한 이외의 곳에는 모두 지뢰를 파묻어 경고망동해서는 안되였다. 최전선 1킬로메터 이내의 금지구역내에 있는 초소를 한달에 한번씩 교대하게 되는데 길을 잘못 오낀 지원군전사들이 지뢰를 밟아 상망하는 사고도 발생했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밤중에 득실거리는 특무색출작업도 수행하여야 했다. 이같이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에서 갈대를 담요삼아 외투 덮고 쪽잠을 자면서도, 밤에 눈우에서 몇시간씩 보초를 서면서도 김상철은 힘들고 괴로운줄 몰랐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도 언급했다싶이 국제주의 원조의 사명감을 안고 특히 민족의 나라에서 국제주의 원조를 할수 있다는 영광스러운 의무감이 젊은 가슴을 불태웠기 때문이였다. 그때 김상철이 근무하고있는 초소에는 조선족이 모두 3명 있었는데 이들 모두 다 지원군으로 조선전쟁터에서 그것도 최전선에서 근무하는데 대해 무한한 자호감과 영광스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1958년 봄, 주은래총리가 지원군 퇴각과 관련해 조선을 방문하면서부터 중국지원군은 륙속 퇴각하기 시작하였는데 김상철은 지원군 사령부에 남아 마지막 퇴각명령까지 기다리면서 많은 사업들을 하다가 1958년 9월 중국인민지원군의 제일 마지막 철거와 함께 군용차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언어의 장애를 뛰여넘어



형사경찰 업무지도와 내몽골에 갔을 때 당지 경찰관들과 함께(오른쪽 두번째)

1958년 9월, 김상철이 지원군 군용차를 타고 돌아온 곳은 바로 심양에 금방 세워진 공안부인민경찰간부학교였다. 그때로부터 장장 38년간, 김상철은 조직에서 수요하는 또다른 전쟁터인 경찰간부학교에서 유일한 조선족으로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면서 조선족의 영예를 빛냈다.

나서자란 연변땅을 떠나 심양에 있는 공안부인민경찰간부학교에 배치받은 후 김상철은 언어에 대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연변에서는 한어에 대한 중시도가 낮고 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해도 한어를 잘 배우지 않아 체계적인 한어학습이 부족했다. 김상철이 한어를 배우기 시작한것은 1955년도 봄, 부대에 입대하면서부터이긴 하지만 그 당시 군교관 역시 조선족이고 변방부대 장병들도 거지반 당지에서 입대한 조선족들이다보니 한족들과 학습교류할 기회가 적었다. 김상철이 진심으로 마음을 먹고 한어를 배우기 시작한것은 지원군에서 돌아온 후 심양에서 사업하면서부터였다.

중국 특히 한어가 주류언어인 심양에서 사업하려면 한어를 몰라서는 안되였다. 한어학습에서도 말은 알아듣고 글도 알지만 자기의 뜻을 정확히 한어말로 표달할수 없는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였다. 학교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2차례씩 정치학습을 진행하고 학습심득 발표회가 있었는데 김상철에게 있어서는 난제가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전쟁터의 생사선까지 넘나들던 김상철은 이만한 곤난앞에서 머리를 숙여서는 안된다고 자기를 채찍질하였다. 그때로부터 김상철은 정치학습을 하고난 후면 발언고를 직접 쓰면서 한어를 련마하기 시작, 한어를 배우려고 큰 결심을 내리던 그때 그의 나이가 이미 서른을 넘겼다. 늦게 한어를 배우는데서 혀가 이미 굳어져 한어발음이 생경하다보니 주변사람들은 그를 조선족이 아닌 토배기말하는 광동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 당시 경찰간부학교에 광동에서 온 교관도 있었는데 학생들이 그 교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다보니 나중에는 부득불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상철은 조선족이고 또 한어가 류창하지는 않았지만 부단히 노력한 결과 마침내 빠른 시일안에 어려운 한어관을 넘겼으며 그후로도 많은 기구개편과 인사변동이 있었지만 유일한 조선족으로 중국형사경찰학원의 오늘이 있기까지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으며 로일대 경찰간부학교창시인의 한사람으로 영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여 조선족의 영예를 빛내였다.

공화국 경견특종배육의 길에서 한생을



1990년 경견기술학교에서 경견을 훈련시키고있는 김상철

1985년, 공안부인민경찰간부학교는 경견(警犬)기술학교로 고쳐졌다. 경견기술학교는 경견을 다루는 인민경찰과 경견훈련 및 경견육종에 종사하는 경찰특종학교이다. 훈련을 거치고 개량시킨 경견은 폭발물, 해독물 탐색에서도 뛰여나며 각종 형사정찰수단으로 리용되기도한다.

경견 훈련 및 육종에 대한 깊이있는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 김상철은 1982년도에 심양농업대학에 1년간 연수생으로 파견되여 동물유전학을 전공했으며 경견훈련과 경견육종학을 전공했다. 학교에 돌아온 후 김상철은 자기가 배운 지식과 다년간의 경견훈련 및 육종학에 관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경견기술학교의 교학과 실천에서 선두적인 작용을 놀았다.

1986년, 운남성 회의 참석차 중경 시찰과정에서 있은 일이다. 당지의 한 건축공사에서 건축용부속품을 도적맞혔는데 건축공사에서는 수소문끝에 경견학에 조예가 깊은 김상철에게 도움을 요청, 김상철은 즉각 경견 2마리를 몰고 도적이 남긴 흔적과 냄새를 따라 추격하여 2000메터 밖에서 도적을 붙잡고 장물도 색출해내는데 성공했다. 당시로서는 2000여원어치의 경제적손실을 만구해주었다. 하여 건축공사장 책임자는 《인민경찰은 정말 귀신처럼 도적을 잡습니다》하고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경견을 리용하여 사건해명에 나선 에피소드는 이루 헤아릴수없이 많다.

경견기술학교에서 사업한 30여년래 김상철은 고심참담한 연구와 학습을 거쳐 동물유전학, 경견훈련학, 동물생리해부학, 경견육종학 등을 체계적으로 깊이있게 전공했으며 공동편찬한 《개의 유전학》, 《개의 생리 해부학》 등 저서들은 경견기술학교 시범교재로 사용되였다. 1957년도부터 1995년도까지 퇴직휴양하기 전의 38년간 수천수만명의 형사경찰들을 양성하였으니 김상철옹 역시 중국의 형사경찰양성과 공안사업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한 걸출한 조선족이지 않을수 없다.

재교근무시절 김상철은 여러 차 경견기술학교의 선진일군으로 당선되였으며 또 수차례 료녕성공안계통 우수당원, 료녕성정부 선진사업자 칭호를 받아 조선족의 영예를 빛내였다.

만년에도 고향 연변과 조선족들을 잊지 않아



심양에 있는 동창생들과 함께 룡정고중을 찾은 김상철(왼쪽 두번째)

1995년도에 퇴직휴양한 김상철은 현재 료녕성 심양시 우홍구에서 자식들의 효성에 받들려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있다. 심양대도시에서 생활하고있지만 김상철은 지금도 어린시절 태줄묻은 연변의 고향땅과 정든 연변의 모교를 잊지 못하고있다.

기자가 취재를 갔던 날 김상철옹은 록음에 둘러싸인 우홍구자택을 구경시켜주었다. 대도시에서도 청정한 자연을 련상시키는 여러 종류의 나무와 풀들이 집주위에서 무성하고 싱싱하게 자라나고있었다.

창가에 피여있는 나팔꽃이며 연변의 산들에서 흔히 볼수 있는 도라지, 개나리꽃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것은 소담하게 피여있는 무궁화꽃나무였다. 조선민족의 꽃이라고 불리는 무궁화꽃을 특히 좋아한다는 김상철옹의 민족적인 감수는 다년간 조선족이 적은 타지방에서의 생활과 년륜이 깊어갈수록 향수처럼 더욱더 마음속깊이 와닿는 그리움인것 같았다.

김상철옹은 집뜨락에 앵두며 깨도 심으면서 고향농촌향수도 떠올리고있었다. 몸은 고향을 멀리 떠나있지만 김상철옹은 아직도 고향발전에 관심이 많다. 특히 지난 2004년도에 연변을 방문했을 때 연길시가 몰라보게 빠른 발전을 보여주고있어 놀랐고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족들의 해외나들이, 도시진출 등으로 리농현상이 일어나면서 농촌이 황페화되고 아직도 많은 농민들이 단순한 경작지만 다루는 소농경제에 의거하여 크게 부유해지지 못하는데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명년이면 연변고급중학교(룡정고중)건교 60돐이 되는 해이다. 김상철옹은 심양에 살고있는 여러 연변고급중학교 동창들과 함께 명년에 꼭 학교설립 60돐 행사에 참가하러 연변에 올 예정이다.

몸은 비록 늙었어도 모교의 무궁한 발전을 축복하고 후배들에게 조국의 방방곡곡에서 반짝였던 모교의 우수한 조선족인재들을 소개시켜 고향모교의 후배들이 더욱 큰 포부와 욕망을 지니고 나라에 유용한 인재로 크게 할 웅심도 격려할 예정이다. 2004년도에 연변을 방문하였다고 하니 꼭 6년만의 연변방문이다. 그동안 연변의 변화가 연변을 떠나 다시금 연변땅을 밟는 사람들에게는 다욱 큰 기쁨과 감동이였으면 좋겠다.

편집/기자: [ 안상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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