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당하는 사람의 뇌 영상을 보면 뼈가 부러질 때와 같다."
학교 내 따돌림 문제를 왜 심각히 여겨야 하는지 뇌과학적 근거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8일 고려대에서 열리는 한국심리학회 특별 심포지엄 '뇌와 통하다'에서 김성일 고려대 교수는 최근 학계에서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는 '왕따 실험'을 소개한다. 3명이 공을 주고받는 게임에서 2명이 짜고 한 사람만 따돌렸더니 소외된 사람의 뇌에서 신체적 고통을 느낄 때와 같은 부위(배측전대상회·dACC)가 활성화됐다. 2003년 미국 학자의 실험을 통해 처음 밝혀진 결과다. 친구들의 배척에 민감할수록, 대인관계에 자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일수록, 반응은 강했다.
뇌를 보면 혼자 있을 때와 친구들과 있을 때 작동 방식이 다르다. 모의 자동차 운전 실험에서 청소년들은 혼자보다 친구가 볼 때 속도가 오르고 사고도 늘었다. 남이 볼 때 보상 영역이 더 크게 활성화되기 때문에 위험도 무릅쓴다.
◇전문학자 10명 주제별 발표
'악마의 뇌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주제로 발표하는 성영신 고려대 교수는 '무의식 소비'를 소개한다. 20대 여성 17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화장품을 사는 실험을 해 봤다. A집단은 제품 정보를 꼼꼼히 비교한 후 구매하게 하고, B집단은 제품 정보를 보는 동안 동시에 게임을 풀게 했다. 인지 기능에 혼란을 준 것. 하지만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는 데 두 집단 간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쇼핑 중의 정보 처리는 무의식 수준에서도 일어난다는 결론.
똑같은 선택 상황인데도 아이쇼핑 때는 즐겁고 선거후보 포스터를 볼 때는 무덤덤한 이유도 제시된다. 전자는 더 좋은 것을 고르는 '긍정적 선택' 상황, 후자는 덜 나쁜 것을 추려내는 '부정적 선택'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성 교수는 설명한다. 긍정적 선택일 때 뇌의 보상 부위가 활성화된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윤리적 딜레마를 분해한다. 이타심이나 도덕도 결국 개인·집단의 생존·번식을 위한 것. 도덕적 직관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패스트 트랙'이다. 즉, 매 선택의 상황에서 수많은 변수를 고민하는 것은 뇌에 큰 부담일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늦다. 이를 덜어주는 반사적 대응 장치가 도덕적 직관이란 것. 남의 통증을 보고 움찔하는 것이나 변사체에 메스꺼움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숭고한 도덕성을 발휘하는 것도, 남성들이 포르노에 흥분하는 것도 똑같이 뇌의 '거울 뉴런'을 통한 공감 능력 덕분이다.
◇'낭만적 사랑'은 진화한 본능
전중환 경희대 교수는 진화생물학까지 결합해 '낭만적 사랑'의 실체를 해부한다. 독일 작가 볼프강 라트는 낭만적 사랑과 일부일처제는 근대 시민계급의 '발명'이라 했지만 전 교수는 진화의 끝에 도달한 인간 본성이라고 말한다. 열애 중인 사람의 뇌를 보면 공통적으로 보상 부분이 활발하다. 여기엔 진화적 사연이 있다. 인간은 뇌가 커서 뱃속 태아는 머리가 너무 커지기 전에 산모 몸 밖으로 출산된다. 그 결과 다른 새끼 동물보다 더 무력해 장기간 양육과 보호가 필요하다. 결국 낭만적 사랑이란 배우자에게 헌신을 낳는 접착제 같은 심리적 기제란 설명이다.
정재승 KAIST 교수는 '뇌와 정치'를 발표한다. 유권자의 뇌는 후보를 고를 때도 순간적으로 '내 편 네 편 가르기' 신경회로가 작동한다. 먼 옛날 생존을 위협받던 시기 '싸우느냐 피하느냐(fight or flight)'를 택해야 했던 신경시스템의 유산. 현실의 유권자들은 정책과 공약을 따져 이성적 결정을 내리기보다 첫인상에 더 좌우된다.
최인철 서울대 교수는 '동양인은 숲을 보고 서양인은 나무를 본다'는 통념을 입증해 보인다. 실제 뇌 영상을 보면 서양인에 비해 동양인의 자아 개념이 보다 맥락 의존적이며 타인의 역할이 크게 자리한다. '본성이 중요한가, 양육이 중요한가(Nature vs. Nurture)' 해묵은 논쟁도 정리한다. 오늘날 인지과학에 따르면 뇌와 문화는 더 이상 경쟁 관계가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뇌와 문화의 합작품이며 유전자와 문화는 공진(Coevolution)한다. 그 밖에 김채연 고려대 교수는 피카소 같은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 관람객의 뇌 상태는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의 뇌 상태에 근접한다는 사실 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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