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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따뜻한 독신의 식탁

[기타] | 발행시간: 2013.05.04일 18:08

[한겨레21] [레드 기획] 늘어난 1인 가구의 ‘갓 만든 뜨거운 음식’ ‘함께하는 식사’를 위하여 1인용 슈퍼마켓·제철음식 꾸러미, 모르는 사람끼리 소셜다이닝·쿠킹

“밥은 슬프고 따뜻하고 존엄하고 비루하다. 밥이라는 주어는 어떤 술어든 다 수용할 수 있다. 그만큼 밥은 전체 또는 삶”이라고 정끝별 시인이 썼다. 올 초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 가족구조와 주거특성 변화’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 가구의 비중은 2012년 기준 25.3%다. 네 집 건너 한 가구씩 혼자 사는 셈이다. 1인 가구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령화에 따른 노인 가구지만 1인 가구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집단은 도시의 젊은 직장인들이다. 반짝이는 시내의 불빛을 뒤로하고 불 꺼진 집 문을 열고 들어온 도시의 싱글 남녀들은 오늘 저녁 무엇을 먹었을까. “슬프고 따뜻하고 존엄하고 비루한” 독신의 식탁을 들여다봤다.

식당보다 직장의 급식

유치원 교사 박세정(31)씨는 혼자 산다. 20대 중·후반 해외로 떠난 장기 여행과 봉사활동 몇 년을 제외하고 30년 가까이 가족과 함께 살았다. 독립을 꿈꿔왔지만 막상 혼자 살기 시작하니 난처한 것이 여럿이었다. 그중 가장 곤란하고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가 식사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봉사활동으로 남미에서 혼자 지내던 시절 박씨는 거의 매일 한국 봉사단원들과 요리를 해서 나눠 먹었다.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새로운 레시피를 공유하는 것은 즐거운 일상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혼자 살면서 그런 일상이 불가능해졌다. 음식을 해서 함께 먹을 사람도, 그럴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우리는 비용만 지불하면 저렴하고 빠르거나 혹은 비싸고 근사한 식사를 언제든지 즐길 수 있다. 박씨는 주중 저녁과 주말이면 친구들을 만나 맛있다고 이름난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다. 박씨는 때때로 밥 뒤에 따라오는 술어가 ‘위로’라고 생각하지만, 식당에서 매끈하게 만들어져 나오는 음식에서는 따뜻한 위로를 얻기 어렵다고 말한다. 오히려 요즘 그의 마음을 가장 다독이는 식사는 직장에서 나오는 급식이다. “밥과 국에 반찬 세 가지가 나오는데, 나에게는 집에서 차린 것과 가장 비슷한 밥다운 밥, 위로가 되는 밥이에요.”

요즘 박씨가 일주일 중 집에서 밥을 먹는 횟수는 많아야 4번 정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버려지는 재료가 많아 선뜻 식사를 차리기 망설여진다. 시장에 나가면 욕심이 생겨 이것저것 사오는데 억지로 먹어야 할 때도 많단다. 남으면 처리하기 더 어려우니까. 곧 버리게 될 거라는 생각에 오히려 과식을 할 때도 있어 자기만의 식탁을 차리는 것을 포기하는 날이 많다. 종종 장을 보러 나서긴 하는데 박씨는 시장에 나가면 고민이 많다. 이것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두면 다 먹을 수 있을까. 상점에 늘어선 제철 식재료들은 싱싱하고 저렴하지만 양이 많아서 혼자 감당하기에 버겁다. 동네 시장에 나온 싸고 좋은 재료들을 눈앞에 두고 실제로 물건을 구매하는 곳은 동네의 대형 슈퍼마켓이다. 시장에 비해 소규모로 포장된 제품이 많기 때문이다.

혼자 구워 먹는 쇠고기 구이집

일본에는 박씨 같은 1인 가구를 타기팅한 편의점형 식품 100엔숍이 성업 중이다. 국내에도 이를 벤치마킹한 슈퍼마켓 체인이 운영되고 있다.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대학가, 오피스텔, 역세권 등지 매장을 개설한 롯데마켓999의 주 이용 고객은 20~30대 대학생과 직장인, 1~2인 노인 가구다. 소규모·소포장 제품 위주로 채워진 매대에 붙은 가격표는 대부분 990원, 1990원, 2990원 등 숫자 ‘990’으로 끝난다. 소포장 제품은 단위당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지만 콘셉트에 맞추기 위해 몇몇 상품은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저렴한 편이다.

롯데마켓999 홍보팀 최현주 책임은 “1~2인 가구 트렌드에 맞춘 타깃 매장으로 2009년 첫 점포를 개설했지만 아직까지는 일종의 안테나숍(소비자 반응과 유행을 파악하기 위해 활용하는 전략적 매장)”이라고 밝혔다. <한겨레21>이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인근의 한 매장에는 한 끼 먹을 분량의 상추, 아기 주먹만 한 햄 한 덩이, 미니어처 크기의 참기름과 케첩 등이 구비돼 있었다. 생필품과 식탁에 단골로 오르는 먹거리는 저렴한 가격에 구비돼 있지만 시장에서처럼 풍성한 제철 재료를 구경하는 재미는 덜하다. 매장에서 만난 대학생 이아무개(21)씨는 “지난해 기숙사에서 나와 아직은 혼자 식사를 차리는 것이 미숙하다”며 “생존을 위한 장보기”라는 표현을 썼다.

어떤 이들은 상차리기 전투에서 한 걸음 물러서기도 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혼자 살기 시작한 한지영(30·가명)씨는 애초에 요리에 취미를 붙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씨의 스마트폰 사진첩은 마치 한 권의 요리책 같다. 예쁘게 잘 차려진 음식으로 가득하다. 한씨는 자신의 밥상에 시간과 공을 들이는 대신 비용을 지불하고 그에 합당한 ‘만들어진 식사’를 제공받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한씨의 오피스텔에 있는 커다란 냉장고에는 여백이 많다. 생수와 우유, 시리얼밖에 없다. 매일 아침에는 샐러드 도시락을 배달시켜 먹는다.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혼자 하는 식사는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형성하기도 했다. 한씨가 이용하는 샐러드 도시락 등 1인용 식사를 배송하는 업체가 많아지고, 언니네텃밭 등 농촌 공동체에서는 최근 1인 가구 전용 제철 음식 꾸러미를 출시했다. 1인 가구가 밀집한 대학가, 오피스텔 주변 식당 대부분에서 포장 판매가 가능해지고 1인용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쇠고기 구이집 등 혼자 먹기에 거리낌 없는 식당도 늘었다.

“식탁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 있었으면”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혼자 먹기의 간편함 대신 복작거리며 함께 먹는 식탁을 택한다. 정은영(33·가명)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며 1인용 식탁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화려함과 단출함 사이를 오가며 혼자 밥을 차려 먹는 데도 요령이 생겼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식재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장을 보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줄이기 위해 파스타 등 한 접시로 차리는 것이 가능한 요리에 능숙해졌다. 하지만 이따금 누군가의 식탁에 초청받고 싶을 때 그는 소셜다이닝 사이트의 메뉴판을 훑는다. 지난해부터 ‘밥 한 끼 같이 먹기’를 제안하며 식사 모임을 주관해온 ‘집밥’(www.zipbob.net) 사이트에는 매일 도시 곳곳에서 차려지는 밥상 메뉴가 업데이트된다.

4월24일 저녁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한 식당에서 열린 집밥 모임에 참여한 회원 이정헌(36·가명)씨는 혼자 산 지 17년째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에서 나온 이씨는 각종 찌개는 기본적으로 끓일 정도로 요리에 능숙하지만 가끔 자신의 식탁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면 집밥 모임을 신청한단다. 요리는 좋지만 혼자 차리는 밥상이 자꾸만 풍성해진다면 요리사로 소셜다이닝에 참여할 수도 있다. 집밥 사이트를 통해 격주 월요일마다 식당을 차리는 ‘월요식당’ 호스트 엄윤정(25)씨는 아마추어 요리사들을 1일 셰프로 초청해 사람들과 밥을 나눈다.

함께 먹기 대신 함께 만들기를 택하는 이도 있다. 지난 4월8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민중의집에서는 왁자한 소리와 함께 짭조름한 반찬 냄새가 풍겼다. 민중의집과 마포의료생협이 함께 주최한 ‘1인 가구 반찬 만들기 소모임’ 첫날이었다. 마포구와 서대문구 일대에 사는 독립생활자 10여 명이 모여 반찬을 만들고 지역 주민에게 반찬 만들기 노하우를 배우는, 이른바 소셜쿠킹인 셈이다. 이날 사람들은 인근 망원시장에서 장을 봐 냉이초무침, 달걀간장조림, 얼갈이배추된장국, 오이소박이 등을 만들었다. 냉이 가격이 올라 처음 걷었던 회비 5천원에서 좀더 보태 비용은 1인당 7천원이 들었다. 민중의집 오현주 사무국장은 “제철 재료로 만든 반찬 세 가지를 5천원에 만들어간다는 콘셉트”라고 설명했다. 첫 모임 뒤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져 앞으로는 3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반찬 만들기 모임을 할 계획이란다.

술어를 여럿 바꾸는 매일의 식사

4월23일 취재에 응하며 밥상을 차린 박씨는 장 봐온 재료에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보태 샐러드를 만들고 버섯전과 애호박전을 부치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음식을 자주 해먹지 않는 요즘 박씨는 “갓 만든 ‘뜨거운’ 음식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울컥 솟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비 오는 저녁 뜨거운 된장찌개를 호호 불며 박씨는 위로를 얻었을까. “다시 밥을 차려 먹어야겠다”고 다짐한 박씨는 공들여 차린 자기만의 식탁이 주는 뜨거운 위안을 안다. 이날 장보기부터 밥을 차려 먹기까지 총 1시간30분이 걸렸다. 그러니 박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맛 좋은 식당을 찾아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한 식사를 나누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식사를 차리겠다는 의지를 이기리란 것 또한 안다. 때때로 혼자 먹기가 고단해지면 지역의 밥 먹기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박씨를 비롯한 이 도시의 싱글들은 밥이란 주어에 뒤따르는 술어를 여럿 바꾸며 매일의 식사를 이어나갔다. 독신의 식탁은 이렇게 따로 또 같이.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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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의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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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 “슬프고 따뜻하고 존엄하고 비루한” 독신의 식탁으로 살아온지 8년. 부럽네요.
"늘어난 1인 가구의 ‘갓 만든 뜨거운 음식’ ‘함께하는 식사’를 위하여 1인용 슈퍼마켓·제철음식 꾸러미, 모르는 사람끼리 소셜다이닝·쿠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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