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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정말 키에 신경 안 써요”

[기타] | 발행시간: 2013.10.12일 14:45

호텔 안내인으로 일하는 이태동씨는 매일 오후 청계천 거리를 청소한다. 깨끗한 거리를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다. 사진은 9일 오후 이씨가 일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청계천3가의 센추럴관광호텔 로비에서 근무복을 입고 찍은 모습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 [토요판/몸] 나의 몸

⑩ 호텔안내원 이태동의 키

▶ 백설공주는 어찌 보면 이상한 동화입니다. 공주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뻔한 외진 숲 속에 키 작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이들은 불쑥 나타난 공주를 경계합니다. 독사과를 먹고 잠든 공주가 얼굴도 모르는 왕자의 키스로 깨어나고, 옆에서 노심초사하던 이들은 그저 왕자와 공주의 결혼을 축하할 뿐입니다. 어릴 땐 그저 아름다운 동화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을 만나고 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태동(51)씨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단 걸 깨달은 나이는 예닐곱살이었다. 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의 키는 훌쩍 커버렸고, 자신은 그대로였다. 남들보다 키가 작을 뿐 아니라, 더 크지도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점점 놀림감이 되기 시작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눈빛이 달라졌다. 길을 가면 뒤돌아보는 시선을 느꼈다. 영문 없이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의 몸이 남과 다르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부모의 키는 평범했고, 같은 피를 이어받은 일곱 남매도 작지 않았다. 왜 나만 이런 걸까.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40년 전, 이씨가 하염없이 고민하던 것들이다.

“난쟁이 아들 사겠다”던 서커스단 사람

청계천이 가을하늘과 마주 보며 흐르던 10월9일 오후 1시께 서울 종로구 청계천3가에 있는 센추럴관광호텔에서 이태동씨를 만났다. 키가 1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는 이씨는 이 호텔에서 안내, 관리, 청소 등의 일을 맡고 있다. 이씨는 “평생 동안 키를 재본 적이 없다. 남들이 1미터도 안 되겠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살았다”고 말했다.

기자는 평소 청계천 인근을 지날 때마다 호텔 앞에서 안내하는 이씨를 눈여겨봤고, 여러차례 요청 끝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지만, 이씨는 기자의 질문들에 속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불편함이 없는지, 물건을 살 때 손에 닿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지, 집 안에 가구들은 어떻게 배치돼 있는지 등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물어도 이씨는 “조금 불편하지만 괜찮다”고 대답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고 해도 비슷한 대답만 나왔다. 기자로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기사 쓰기가 어렵다.

이씨의 두리뭉실한 대답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성장이 멈췄지만, 일찍 철이 들었다. 소설 <양철북> 속의 등장인물 오스카는 위선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세계가 싫어 스스로 성장을 멈췄다면, 이씨는 오히려 성장을 멈춘 몸으로 인해 일찍 어른이 됐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머니’였다.

올해로 아흔살이 넘은 어머니는 모진 세월을 살면서도 늘 키가 작은 아들을 걱정했다. 이씨의 기억에서 아버지는 늘 술만 마시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경북 안동에서 남의 땅에 농사짓는 소작농이면서도 입에서 술을 떼지 않았다. 집안일은 물론 농사, 산에서 땔감 구하기 등 궂은일도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가을에 추수를 한 곡식은 대부분 아버지의 밀린 술값으로 나갔다. 일곱 남매는 배곯는 일이 많았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이씨는 어머니의 곁에서 일을 도왔고, 어린 동생들을 보살폈다. 밖에서 놀림을 받고 해코지를 당해도 어머니에게 얘기할 수 없었다. 이씨는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집에서 얘기할 수 없었다. 내 몸이 이렇다 보니 안 그래도 어머니는 자나 깨나 내 걱정을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를 생각해 아픔을 얘기하지 않던 이씨는 말을 아끼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런 어머니와 이씨는 지금도 각별하다. 지난 추석 때에도 아내와 함께 어머니가 사는 대구를 찾아 삼일간 머무르다 왔다.

키가 1m 조금 넘어 보이는 그는

호텔 안내·관리·청소를 한다

“평생 키를 재본 적 없다

남들이 1m도 안 되겠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살았다”

마음마저 위축되기 싫어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높이 있는

물건 꺼내달라 요구하고

남들보다 성실하게 살면서

호텔 옆 청계천 도로도 청소한다

어린 시절 이씨는 세상이 궁금했다. 이씨 가족이 농사를 짓고 살던 안동의 마을은 좁은 동네였다. 그는 키가 왜 크지 않는지, 제대로 진단 한번 받아본 적이 없다. 근처에 이씨를 진단할 만한 병원이 없었고, 만일 있어도 병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씨가 학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이씨와 어머니는 아쉬웠지만, 아버지의 반대는 완강했다. 이유가 있었다. 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기 전에 서울에서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서커스단에서 일한다는 그 남자가 “난쟁이 아들을 사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람을 돈 주고 사려 하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고,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 남자는 놀라서 줄행랑을 쳤지만,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의 우려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평상복을 입은 이태동씨가 기자와 센추럴관광호텔 앞에서 대화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나 사회에 나가면 납치돼 서커스단에 팔려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술만 마시면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또한 무작정 학교를 나가기엔 집에 남아 고생하는 어머니가 눈에 밟혔다. 그는 결국 지금까지 초등학교를 비롯해 정규교육 중 그 어느 과정도 밟아본 적이 없다. 이씨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도 한글을 잘 읽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씨를 인터뷰한 날은 공교롭게도 ‘한글날’이었다.

“결혼할 때부터 자식 낳지 않기로 했어요”

이씨의 아버지는 1979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생들과 함께 임종을 지킨 이씨는 아버지가 “네 엄마에게 미안하다. 앞으로 잘 돌봐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씨는 아버지의 유언을 마냥 따를 수가 없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고, 다른 키 작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해 가정도 꾸리고 싶었다. 키가 작은 사람이 자신뿐인 작은 시골 마을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씨는 어머니에게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여비만 챙기고 나와 기차역에서 어머니와 인사를 했다. 당시 어머니는 “몸조심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씨는 북한산성 인근에 있는 ‘푸른농원’이란 식당을 찾았다. 안동에서 만난 적이 있는 이 식당의 사장을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사장은 이씨를 반겨주고 일자리를 줬다. 이씨는 식당에서 주차 안내와 청소, 각종 심부름을 도맡았다. 식당에서 일하던 이씨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동에 있는 유흥업소로 자리를 옮겼다. 십수년간 그곳에서 안내, 청소 등 궂은일을 했다. 처음엔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당하고, 술에 취한 사람들이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위축되기 일쑤였다. 억울하고 속상해도 안으로만 삼키며 말을 아끼다 보니 상처가 곪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몸이 이렇다 보니 몇번 무시를 당하면 주눅이 들더라고요. 문득 몸이 이런데 마음마저 위축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내가 당당하고 밝게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턴 물건을 살 때도 당당하게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내 달라고 요구하고, 버스를 탈 때도 기다려 달라고 해요. 이렇게 살다 보니 사람들도 배려해 주더군요.”

서울에 올라와 20, 30대 청년기를 맞은 이씨는 다른 키 작은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처음엔 유흥업소에서 쇼를 하던 키 작은 사람을 만났고, 소개받길 되풀이했다. 사는 곳이 좀 떨어져 있어도 굳이 찾아가 만났다.

“저처럼 키 작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늘 궁금했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사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보니, 더더욱 남들이 어찌 사는지 궁금했죠. 막상 만나보니 사는 모습들이 다양했어요. 유흥업소에서 쇼를 하는 사람도 있고, 편의점이나 식당을 하기도 했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름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분들이 한목소리로 조언하는 말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안 받아주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사람들이 돈 떼먹기 쉬우니 절대 돈을 빌려주면 안 된다’였어요. 다들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나름 열심히 살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세상을 배워가던 이씨는 1994년 결혼했다. 부인도 이씨처럼 키가 작다. 이씨는 “한약을 팔던 한 아줌마가 중매를 서서 두 살 연하의 아가씨를 만났다”고 말했다. 부인과의 결혼생활이 20년에 가깝지만, 슬하엔 자식이 없다.

“처음 결혼할 때부터 자식을 낳지 않기로 했어요. 아는 지인 중에 저희처럼 키가 작은 부부가 있었고, 슬하에 두 자녀가 있었는데 둘째가 키가 작은 왜소증이 있었죠. 유전으로 그리됐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부부도 아이를 낳으면 그리되지 않을까 두려웠죠. 제 자식이 이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혼을 할 때도 아내와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아내는 약간 아쉬워했고, 지금은 많이 서운한가 봐요. 나이 들어서 둘만 있으려니 외롭기도 하고요.”

키 성장 멈추는 왜소증의 원인은 수십가지

이씨 부부가 자녀를 낳는다면 어떻게 될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예측하기 어렵다. 병원에서 제대로 진단을 받은 적이 없는 이씨는 무슨 원인으로 키가 크지 않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키의 성장이 일정 수준에서 멈추는 왜소증은 수십가지 원인으로 발생한다. 이 중에는 유전이 되는 형질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연골이 형성되지 않아 성장이 멈추는 연골무형성증은 가족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돌연변이로 나타나지만, 이미 발현된 형질은 우성 유전을 한다. 우성 유전이 되는 왜소증이라고 해도 유전자가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유전 여부가 결정된다. 무조건 유전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호르몬에 이상이 있는 경우엔 유전적인 영향이 없을 수도 있다. 대개 호르몬은 갑상샘이나 부신피질 호르몬에 이상이 있는 경우다. 이처럼 왜소증이 발생하는 원인은 다양하고, 발병 원인마다 증상이나 유전 여부가 상이하다.

이씨는 키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기성복으론 맞는 옷이 없기 때문에 맞춤용으로 제작한 옷을 구매하고, 남들처럼 출퇴근할 때는 버스를 타고 다닌다. 집 안에 특별히 낮은 가구를 들여놓지도 않았다. 이씨는 “장롱에서 위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땐 의자 위로 올라가면 된다”고 말했다. 약간은 불편한 생활이 그에겐 일상이었다. 키에 적응하다 보니 남들보다 철저하게 살아오기도 했다.

“술을 일절 마시지 않아요. 평생 술을 입에 달고 살던 아버지를 보고 술이 싫어지기도 했지만, 이 몸으로 세상을 살기 위해선 남들보다 성실해야 하기 때문이죠. 요즘도 매일 오후 4~5시께에 호텔 인근 청계천 도로를 청소해요. 이 거리를 지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에 10여년째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에요.”

이씨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낯선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씨는 키 작은 사람들에 대한 여러 편견을 지적했다.

“키 작은 사람들이 함께 다니면 많은 이들이 형제냐고 물어요. 외관상 닮은 면이 있어서 그리 볼 순 있지만, 별생각 없이 하는 질문이죠. 소설과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난쟁이’라는 표현도 사실 기분이 좋진 않아요.”

이씨는 이제 다른 키 작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키가 작은 내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키가 인생에 결정적이지 않아요.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보니, 어떻게 마음을 먹고 사느냐가 중요하단 걸 깨달았어요. 키 크고 멀쩡한 친구들도 처음엔 취직 잘하고 잘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중엔 사람마다 다르더군요. 어떤 친구는 잘 지내고, 다른 친구는 노름하다가 재산 다 탕진했어요. 키가 크고 작음보다 얼마나 성실하게 인생을 사느냐가 중요하죠.”

이씨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태동씨에게 키란 어떤 의미예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거죠. 요즘은 정말 키에 신경을 안 써요.”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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