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녕장풍변호사사무소 김창동변호사의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료녕장풍변호사사무소의 김창동(67)씨는 변호사로 재직하여온 19년간 수백건의 사건을 처리하면서 명실공히 료녕조선족변호사계의 대선배로 불리우고있다.
조선족변호사가 가뭄에 콩나듯이 적었던 1990년대초에 그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여직껏 그는 형사변호, 민사, 행정대리소송, 외상투자기업 설립, 기업 파산과 청산을 비롯한 비소송업무와 한국적피고인 변호 등 다양한 분야의 안건들을 해결하면서 법률지식과 현지법을 잘 몰라 어려움을 겪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9년 길림공학원을 졸업하고 길림철도국과학기술연구소의 공정사로 있던 김창동씨는 1981년부터 선후로 길림, 심양의 철도운수중급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면서 전국법원간부업여법률대학의 법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다 심양철도국 법률사무실 주임으로 전근한 그는 199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되여 48세 나이로 당당히 변호사행렬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동안 법률계통에서 탄탄한 기반과 풍부한 경험을 쌓은 실력자였지만 정작 변호사일에 정착하고보니 생각보다 힘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웬만한 안건을 해결하려면 1, 2년이 걸려야 하는건 물론 어떤 안건은 도리는 뻔한데 해당 법규가 희미하여 어려움을 겪었는데 국내판례상 전례없던 안건을 다룬적도 있었다.
심양시에 있는 한 94세의 로모가 자신이 사놓은 집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아들과 증여계약을 체결하고 공증하여 시방산국에 소유권이전등록을 신청하였으나 가옥소유증이 아직 나오지 않아 접수되지 못했다. 하여 시방산국을 찾아가 가옥소유증을 내는 절차를 밟았는데 규정에 따르면 한달이면 나와야 할 가옥소유증이 1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고 그사이 로모는 로환으로 사망하고말았다. 가옥소유증이 나온후 아들이 소유권이전등록을 재차 신청하였는데 시방산국에서는 아들이 그 집을 증여받으려면 반드시 로모와 아들이 공동히 신청해야 한다는 리유로 거절하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망한 사람이 어떻게 신청을 한단말인가. 김변호사는 아들의 위임을 받고 시방산국을 피고로 행정소송을 걸었는데 이 안건은 국내 행정소송사상 류례없는 사건으로 관련 행정법규에도 정확한 규정이 없었다. 하여 1, 2심에서 무려 6번이나 법정을 열었는데 김변호사는 헌법 등 여러 법률조항을 근거로 원고의 소송청구가 합법적임을 론증, 승소했다. 옹근 3년에 걸친 긴 소송이였다. 마침내 법원에서는 피고에게 아들의 소유권이전수속을 해주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안건의 판결은 이후 류사사건을 심리함에 있어서 판례로 되였고 방산관리국이 해당 방산등록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근거로 되였다.
나이로 따지면 고희가 래일모레인 김변호사는 나이에 비해 믿기 어려울 왕성한 정신력과 넘치는 열정으로 변호일에 몰두하고있는바 기자가 취재하고있는 동안에도 쉴새없이 상담전화를 받으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있었다.
얼마전부터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의 요청으로 법률고문을 맡고 조선족사회를 위한 길에 나섰다. 요즘도 조선족사회에 관한 여러가지 안건을 맡고있는 그는 “현재 조선족들의 법률지식이 너무 박약해 많은 손해를 보고있다”고 말하면서 요즘 화제가 되고있는 “신립촌문제”의 근원도 촌민들의 모호한 법률의식에서 발생한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있는 농촌에서 법을 몰라 상당한 피해를 보고있는데 촌의 대다수 지도자들이 토지법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촌민들을 인도하다보니 촌민들의 리익을 침해할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와했다.
이어 그는 “합법적권익을 보호하려면 반드시 법률지식을 습득하고 부단히 법률의식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기회가 되면 조선족유지들과 함께 법률의식이 비교적 낮은 농촌지도자들을 대상해 법률학습반을 꾸려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고싶다고 의향을 밝혔다. /료녕조선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