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국가당안국 사이트에 의하면 일본 전범 게이지 사가나카의 중국 침략 죄행 자백서가 13일 공포되었다. 자백서에 따르면 그는 1937년 4월부터 1945년 9월 3일까지 자신이 사살, 척살, 참수를 비롯해 흉기로 찌르거나 높은 데에서 떨어뜨리고, 굶기고 옥에 가두는 등 각종 방식으로 살해한 중국인이 총 831명이라고 밝히고 강간한 중국인 부녀자도 총 34명에 이른다고 진술했다.
이하는 게이지 사가나카의 중국 침략 죄행 자백서이다.
게이지 사가나카의 1954년 11월의 기록 자백서에 따르면 그는 1916년에 일본 후구시마현에서 출생하였다. 1937년 4월 괴뢰 만주국 삼강현에 주둔해 있었다. 1938년 7월부터 보병 소위 소대장, 중위 중대장, 경비대장, 대리 대대장, 대대장 등 직무를 담임하였다. 일본이 투항한 후 염석산 부대에서 소장 참모장, 연대장 등 직무를 맡았으며 1949년 4월에 포로되었다.
중요한 죄행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38년 7월 27일 대대장의 참살하라는 명령에 팔로군 포로 참살행동에 참가하였다. "나는 군도로 그중의 약 40세 되는 농민 1명을 살해하였다."
1938년 10월 26일 난궁현이 신허현을 공격할 때 "나는 군도로 요지에 숨어있는 청년주민 1명의 팔을 찍었다."
1940년 5월 선츠현에서 "사복민병 3명을 쏘아 죽였다.", "팔각보루 남문 밖에서 중대가 다옌베이진부근에서 체포해온 민병 2명을 총살하였다."
1940년 7월, 주자촨일대에서 체포해온 12명 주민을 심문, 고문한 후 총검으로 8명을 찔러죽이고 4명을 쏘아 죽였다." 그외 또 약 70명 되는 싱궁언부근의 주민을 체포하였고 싱궁언 동쪽으로 약 1000미터 되는 곳에서 남은 주민 30여 명을 땅에 묻어놓고 기관총으로 무차별 발사하여 죽였다." 또 본부의和泉군의관 중위와条田위생군조가 함께 팔로군 휴양소에 있는 중상을 입은 병사 1명을 "산채로 해부해 살해하였다."
1940년 9월 팔로군 바이퇀대전의 반격작전에 참가하여 런자촌"제3중대장 카토유기가 이 촌의 주민 20명을 체포하였고 닝화보루에서 모두 쏘아죽였다."
1941년 9월 하순, 왕자거우 습격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보고 도망가는 주민은 모두 적성분자이기에 한 사람도 놓치지 말고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사격한 결과 부상한 주민이 7명이였다." "둥자이진에서 나는 10명의 주민을 고문하고 5명의 부녀자를 윤간하도록 눈감아 주었다."
1941년 8월~10월중순 사이, 사토특무공작대가 "약 40명의 주민을 체포 및 고문하였고 그중 20명을 구타해 살해했고 쏘아 죽이고 찔러죽였다."
1942년 2월 "마가하촌을 소탕하여 명령에 따라 3명의 주민을 쏘아죽였다." "명령에 따라 서쪽으로 도피한 주민을 추격하여 3명의 주민을 사살하고 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나는 1937년 4월부터 1945년 9월 3일까지 직접 또는 다른 일본군과 함께 중국인 831명을 살해했다. 이중 남성 주민 420명, 여성 주민 14명, 민병 98명, 팔로군 병사 252명, 항일군 병사 38명, 포로 9명 이다." 살해 방식도 총살과 참수를 비롯해 찌르거나 높은 데에서 떨어뜨리고, 굶기고 옥에 가두는 등 각종 방식으로 이뤄졌다.
"상하게 한 사람은 519명에 이른다." 수단은 총살하고 베어 상처를 입히고 지뢰를 밟아 상하게 하였으며 찔러서 상하게 하였다.
"강간한 중국인 부녀자도 34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체포한 주민의 총 인수는 112명이었다, 그외 전장에서 포로한 병사는 368명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후방으로 옮겨 처리하였는데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체포, 나포된 경과와 고문 및 구타 심문한 경과가 있는 사람 숫자만 주민 215명이다. 그외 평민을 붙잡아다 지뢰 밟기, 길 인도, 마부, 짐꾼 및 무대가 노역으로 부리면서 군용 도로 건설과 성을 쌓는 공사에 내몬 사람이 1171명이다."
"팔로군과의 전장에서 독가스(적통 12개)를 한 번, 한 건 사용하였다."
출처: 중신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