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com한국어방송]인천 중화거리는 한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다. 한국에서 화교가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하다. 과거 서울에도 차이나타운이 없었다.
중화거리는 인천항구와 가까이하고 있다. 1883년 인천항이 도시로 거듭나면서 청정부의 조계지로 지정되었으며 그후 차츰 화교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현재 중화거리에는 많은 중화요리 음식점이 밀집되어 있으며 한편 중한문화교류의 장소로 부상했다.
역사 기재에 따르면 고종 19년인 1882년, 임오대란이 일어났고, 청조 정부는 광둥성의 3000명 병사와 40여 명 상인을 조선으로 파견한다. 이때 파견된 상인은 한국 화교의 근간을 이뤘다.
1883년 청정부가 한국 인천에 영사관을 설립하면서 북성동, 선린동 일대에 화교들이 늘기 시작했고 차츰 중화거리를 이루었다. 최초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져간 식염, 곡물, 잡화를 팔아 한국의 사금을 사들여 다시 중국에 건너와 경제세력을 확장했다. 화상이 가장 많을 시기는 만 여 명에 달했다.
1884년, 한국 서울에는 350명 정도의 화상이 활약하고 있었으며 인천에는 235명에 달했다고 한다. 화교가 한국에 자리 잡고 거주하기는 1894년 11월 양국이 ‘청상보호규칙’을 실시하면서부터다. 그때 한국으로 이주한 화교는 대부분이 산둥, 허베이, 장쑤, 저장, 푸젠, 광둥 등지의 중국인이었다. 그중 산둥이 가장 많았다.
1884년 중화요리 음식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짜장면은 한국인들의 식성에 잘 맞았다.
중한문화교류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2005년 중화거리와 인천광역시 정부는 한중문화전시관을 개설했다. 전시관에는 산둥, 저장, 윈난 등 8개 성시에서 보내온 393점의 실물이 전시되어있다. 그중에는 항저우의 비단 방석, 비단 서적, 칭다오의 조가비 공예품, 윈난의 대리석 식기, 붉은 색의 중국결, 경극에 사용하는 탈 등이 있다.
한국 영남대학에서 30여 년 중국어를 가르친 쿵칭신 교수는 산둥성에서 온 공자 후대이다. (출처:중국신문넷)
번역:김선화, 감수:전영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