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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3)—림강으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0.11일 10:37
흑룡강성 할빈시 서남부로 30킬로메터 떨어진 곳에는 85만 인구를 가진 소도시 쌍성시가 있다. 송눈평원에 위치한 쌍성시는 예로부터 흑룡강성의 남대문으로 불리워왔다. 해방전쟁시기 동북민주련군은 교통이 비교적 발달한 쌍성시에 전선지휘부를 설치하였고 동북민주련군 주요한 지도간부였던 림표, 라영환, 팽진, 소경광, 류아루, 주보중, 담정, 리운창 등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동북민주련군 전선지휘부가 있었던 쌍성시


지금의 쌍성시 무장부자리에는 단층으로 된 푸른 벽돌기와집 건물이 보존되여있다. 동북민주련군 전선지휘부였던 이 건물은 지금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전선지휘부 옛터 기념관으로 사용되고있다. 기념관 서쪽방은 작전실로서 벽에는 료심전역작전지도가 걸려있었고 탁상주변에는 림표, 라영환, 류아루를 비롯한 지휘부 성원들의 밀랍상이 있었다. 그리고 동쪽방은 림표사령원의 침실과 사무실로 사용되였다. 동북민주련군 총사령부는 바로 이곳에서 전국을 놀래웠던 신개령전역, 3하강남 전역, 림강보위전, 하기공세, 추기공세, 동기공세, 료심전역을 지휘했던것이다.

한동안의 정돈을 거쳐 동북민주련군은 원기를 회복했을뿐만아니라 더욱 확고한 동만, 북만, 서만 근거지를 가지게 되였다. 《선남후북》의 전략으로 남만을 중점공격하고있는 국민당의 새로운 움직임을 파악한 동북민주련군 지휘부에서는 남만을 사수하고 송화강이북으로부터 적을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이 전략을 실현하려면 림강을 중심으로 하는 남만근거지 보위임무가 관건으로 나섰다.

《2.3》폭동 진압후 통화부근에서 토비숙청을 하던 남만조선족부대인 리홍광지대는 국민당군의 공격을 막으며 대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통화 옥황산과 비행장부근에 수비진을 치고 우세한 적과 치렬한 전투를 벌였다. 리홍광지대와 기타 부대가 적을 막고 싸우는 동안 통화시의 당정기관과 주요한 군수품은 림강으로 옮겨갔고 주력부대도 안전하게 철수하게 되였다. 대부대와 당정기관의 안전한 철수를 엄호한후 리홍광지대도 철수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질서있게 진지에서 철수하면서 부분적 전사들을 남겨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했다.

엄호임무를 맡은 리홍광지대 사령부의 전사 박일화는 사령부를 보호하며 싸우다가 총탄에 다리를 다쳤다. 그래도 그는 전호속에서 계속 적과 싸우면서 한걸음도 후퇴하지 않았다. 자욱한 초연이 사라지자 박일화의 주변에는 누구도 없었고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적병 몇놈이 몰려오고있었다. 박일화는 단호한 결심을 내리고 수류탄심지를 뽑아들고 자기를 생포하려는 적병에게 덮쳤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박일화는 적 7명을 폭사하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사후 리홍광지대부에서는 그에게 《멸적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추서하였다.

1946년말에 이르러 남만의 주요한 전략요새인 매하구, 통화, 화전이 국민당에게 강점되면서 남만근거지는 장백산남쪽기슭의 림강, 몽강(오늘의 정우), 장백, 무송 4개 현만 남게 되였다. 남만의 투쟁을 견지하기 위해 동북국에서는 중앙위원 진운을 남만분국 서기 겸 료동군구 정위로 파견하였다.

진운은 기차를 타고 동만의 도문에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을 거쳐 다시 압록강을 건너 림강에 왔다. 1949년 12월 11일, 림강현 7도강촌 통명탄광집무실에서 남만 사급이상 간부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를 《7도강회의》라고 한다. 회의에서는 남만근거지에서의 투쟁을 견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남만을 포기하고 북만으로 철수해 주력부대와 합쳐야 한다는 두가지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나왔다.

치렬한 론쟁이 있었지만 도저히 결론이 없었다. 회의를 사회했던 소경광사령원은 할수 없이 남만분국 서기 겸 료동군구 정위로 파견된 동북국의 부서기 진운을 찾아갔다. 13일 밤, 진운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7도강에 도착해 회의에 참가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참답게 귀담아 들은후 진운은 국민당군을 소에 비유하면서 《지금 우리 남만은 북쪽으로 밀고나가려는 소꼬리를 단단히 잡고있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소꼬리를 놓아버린다면 소는 거침없이 북쪽으로 밀고갈것이고 우리는 더는 소를 잡지 못하게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반 동북의 정세로부터 남만근거지의 중요한 역할을 분석하면서 남만근거지에서의 투쟁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운의 생동한 비유와 예리한 분석은 회의참가자들을 설득시켰으며 부대간부들의 사상을 통일하게 되였다.

7도강회의 기념관, 회장 복원실

7도강회의 장면 력사사진자료


1946년 12월 17일, 국민당군 동북총사령인 두률명은 6개 사단의 기동부대를 모아 림강을 공격했다.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인 정동국은 통화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직접 부대를 지휘했다. 7도강회의이후 아군은 제3종대 7사, 8사, 9사와 각지의 기동(机动)부대를 동원해 정면으로 적의 공격을 막고 제4종대를 적후에 배치해 교란작전을 하게 했다.

림강근거지에 도착한후 리홍광지대는 동북민주련군 료동군구 독립 4사로 재편성되였다.

독립 4사 지도부 성원표는 다음과 같다.


   师长 王子仁  政委 方虎山  参谋 卢哲用 政治部主任 洪林


       第一团 团长 리응표(리방남 후임)


           政委 송춘석(한일해 후임),参谋长 장 훈


       第二团 团长 심 청


           政委 주홍성(송준석 후임), 参谋长 김성일


       第三团 团长 조 관


          政委 황석, 参谋长 현 파


사장에 왕자인이고 정치위원에 방호산이였으며 참모장에 로철용이였다. 이 시기 남만분국에서는 류자의와 오정우를 비롯한 한족간부들을 리홍광지대에 파견하였다. 류자의와 오정우는 독립4사 부사장으로있었다.

재편성된 독립4사 1퇀 퇀장은 리응표이고 정치위원은 송춘석이였으며 2퇀 퇀장은 심청이고 정치위원은 주홍성이였다. 그리고 2퇀 퇀장은 조관이고 정치위원은 황석이였다. 당시 독립 4사의 병력은 약 8000명에 달했다.


매하구, 통화를 점령한 국민당군이 계속 림강으로 밀고나오게 되자 독립4사는 몽강, 금천, 휘남 3개 현의 린접지에 위치한 로령산에 방어진을 치고 적의 공격을 막을 준비를 하였다. 장병들은 드높은 열의를 안고 언땅을 파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들은 공격해 오는 적군을 분산시키고 견제하면서 림강보위전의 승리를 위해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

국민당군이 공격해옴에 따라 남만 각지의 당정기관과 난민이 대량 림강에 모여오기 시작했다. 림강을 중심으로 한 남만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해 근거지 군민이 모두 동원되였다.

남만 민주련맹 성원이였던 장춘의 변철호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런데 이때는 내전이 붙어 림강보위전이 시작되였습니다. 국민당이 들어오면서 당시 중앙군이라 했는데 조선사람과 의용군에 참가한 조선사람 군속이나 또 군속이 아니라도 조선사람을 막 해치니까 피난을 나오는 조선사람들이 많았습니다다. 륙도강은 통화에서 나오는 첫 역이였습니다. 륙도강에서의 중요한 임무는 바로 이분들을 돌봐주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이분들에게 길쪽지를 써서 후방에 보냈습니다. 이걸 가지면 되는데 도장을 하나 찍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1946년 11월 12일부터 1947년 1월까지 내가 접대해 후방에 보낸 조선사람이 아마 2000명은 될것입니다. 심지어 통화의 조선중학교 학생들이 전부 철퇴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중국력사에서도 륙군중학이라는것이 아마 창시적일것입니다. 륙군중학교 14살, 15살나는 아이들이 이불짐을 해가지고 많이 림강으로 갔습니다.》


남만의 광범한 조선족인민을 발동하기 위해 리홍광지대에서는 줄곧 조선족간부양성에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별도로 교도대를 조직했을뿐만 아니라 간부학교와 륙군중학교까지 만들어 많은 조선족 인재를 양성하였다.

무순의 최강로인은 당시 리홍광지대 교도대의 간부로 있었다.

《완전 조선족으로 구성된 민족사단으로서 군사임무를 제외하고도 또 민족사업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사회 각 방면에 수요되는 우리의 간부를 양성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무송에는 조선독립4사 군정학교가 설립되였습니다. 그후에 〈교도대대〉라 하여 림강의 대호에서 조직되였고 또 매하구에 료녕군구 교도참이 있었습니다. 교도참에는 우리 조선족대대 하나, 한족대대 하나가 있었습니다.

교도대에서는 또 전시의 정치지도원과 중대장의 임무 이를테면 전투전에 동원, 전투시 구호를 부른다든지 전투가 끝난 다음 전투 총화를 하고 공훈자들을 표창하며 전투 우렬을 찾아내고 금후 전투의 참고로 한다는 이런것을 소책자로 직접 만들어 학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잘하기 위해 토지개혁에 관련된 계급식별방법 등 이런 지식소책을 만들었고 이를 기초로 소고운동을 하고 토지개혁에 참가할 간부들의 정치각오를 높이는 이런 사업을 했습니다.

우리 교도대는 중대나 소대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그런 사업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류하, 통화, 신빈 등지에 우리 조선족중학교 학생들을 전시에 안전한 장백산에 철퇴시켰다가 국민당이 진공할 때는 다시 림강 대호라는 곳에 집중시켜 〈륙군중학교〉를 세웠습니다.

비록 전시였지만 그들에게 물리, 지리, 수학, 력사, 정치 이런것을 학습시킴으로써 해방 직전과 직후 이들이 조선족학교에서 교원을 담임하고 다른 지방에 가서 간부를 하도록 교육했습니다. 심양에 있는 변혜옥이라고 심양외사처 처장인데 그분도 륙군중학교 학생이였습니다. 우리 사단은 군사임무외에도 이렇게 우리 조선족의 각 방면의 간부양성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고 생각합니다. 》

독립4사 교도대 간부였던 최강로인

륙군중학교 학원이였던 리태성로인


매하구의 리태성로인은 륙군중학교를 졸업하고 혁명에 참가한 분이였다.

《륙군중학교에 대해 간단히 소개합시다. 원래 림강에 련합중학교를 하려고 했는데 후에 림강을 내주어야 한다고 하여 전략적 후퇴를 했습니다. 참 간고한 일이였습니다. 림강 대호라는 곳에 모여 내내 교육하는데 굶어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 이 3대 각오교육을 했습니다.

그래서 혁명군대에 들어와 3대 각오를 하지 않으면 견지못합니다.륙군중학교에 녀성구대까지 합치면 300여명입니다. 우리 4학년이 직속대이고 3학년이 1구대, 2학년 1학년이 2구대이며 그다음 녀성구대입니다. 해남도에 홍색랑자군이 유명했지요. 사실 우리 녀성구대도 홍색랑자군이였습니다. 장백에 갔을 때는 총이 없었는데 무송에 와서 군복이랑 총이랑 받았습니다.》


15~16세 어린 나이에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에 나선 륙군중학교 학원들은 림강을 보위하기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 싸웠다. 적의 포위로 하여 생활과 생산은 그토록 어려웠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갖은 시련을 이겨내면서 싸웠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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