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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4)—림강보위전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0.11일 11:08
1946년말부터 1947년초까지 남만의 상황은 극히 어려웠다. 국민당군이 화전, 반석, 매하구, 통화를 차지하고 반월형으로 림강을 중심으로 한 근거지를 포위했다. 수만 군인과 난민이 림강에 몰려왔기때문에 근거지의 물질적조건은 극도로 결핍했다. 게다가 군민들은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며 투쟁을 견지해야 했다.

《맞아 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 이 세가지 각오는 당시 림강근거지 보위투쟁에 참여했던 로인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였다. 근거지의 군민들은 바로 이와 같은 드높은 정신력으로 모든 곤난을 이겨내고 국민당군의 공격을 막아냈던것이였다. 그리고 무릎까지 빠지는 두터운 눈과 장백산맥의 높은 산봉, 깊은 골짜기, 수많은 강과 하천들은 국민당 기계화부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켰다.

료동군구 각 부대 서렬


남만의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는 료동군구의 독립사와 리홍광지대로 편성된 독립4사를 비롯한 지방부대와 함께 걸음걸음 적을 견제하면서 싸웠고 제4종대는 적후에 심입해 교란작전을 진행했다.

료동군구의 명령에 따라 독립4사는 로야령산맥의 남부, 휘남부근에 수비진을 치고 국민당군을 견제하면서 싸웠다. 그들은 우세한 적을 분산시키고 고립된 적을 포위, 섬멸하군 하였다. 조선족으로 편성된 독립4사는 작전뿐만아니라 근거지의 조선족군민을 이끌고 많은 사업을 했다. 조선인민주동맹과 함께 농촌의 정권건설과 토지개혁을 지도하였고 교도대, 륙군중학교를 세워 우수한 간부들을 양성했으며 후방에 위생부를 세워 전선의 부상병들을 대량 치료해주었다.

오늘의 림강시에서 십여리 떨어진 림강시 대호가(大湖街)에는 당시 리홍광지대가 꾸린 륙군중학교 옛터와 리홍광지대의 부대 위생부 옛터가 있다. 뭇산들 사이로 강이 흐르고 강가에 오붓한 산간마을들이 있는 대호가를 찾은 심양의 변혜옥로인은 답사팀에게 륙군중학교와 위생부가 있었던 곳을 알려주었다.

림강시 대호가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사생들

대호병원 위치를 찾아준 심양의 변혜옥로인


당시 륙군중학교학원이였던 변혜옥로인은 기타 녀성학원들과 함께 리홍광지대 위생부를 도와 부상자들을 간호하였다 한다.


《여기는 림강 대호병원입니다. 지금도 대호병원이지만 옛날에도 대호병원입니다. 옛날에는 조선의용군의 위생부가 여기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 집이 평방(단층집)이였는데 지금은 더 붙여 2층으로 올리짓고 확대되였습니다. 이전에는 우리 상병원들이 많이 여기서 치료를 받고 전선에 나갔습니다. 우리 의용군의 병원입니다. 의사나 간호원은 모두 조선족입니다.

아직도 살아계시는 우리 전우들이 지금 아직두 심양에 있습니다. 조순옥, 최옥림 등 여럿이 다 이 병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륙군중학교에 있었는데 바로 이 아래 촌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륙군중학교 학생들이 군사훈련과 여러가지 생산운동을 했습니다. 바로 이 산등을, 산골짜기를 넘나들면서 나무를 하고 손발이 얼도록 많은 곤난을 극복하고 선봉대로 되였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조선족 의사와 간호원, 직원들로 구성된 이 대호병원은 당시 얼마나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여 다시 전선에 보냈는지 모른다. 간호원이 부족할 때는 륙군중학교 녀성구대 학원들까지 동원되였다고 한다. 극히 어려운 상황이였지만 당시 남만근거지에서는 생산운동을 중지하지 않았고 리홍광지대 장병들은 주둔지부근의 마을을 지켜주었다. 그때까지도 토비들이 자주 출몰하여 량곡을 략탈했던것이다.

심양의 리홍광지대 중기반장이였던 최창수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가 30리밖의 강냉이가을을 도와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기를 메고 가는데 수압중기관총은 무거워서 넷이 메야 합니다. 탄알 한상자에 250발인가 들어있는데 그걸 한상자 가지고갔습니다. 무송은 지대가 높아 곡식도 잘 안됩니다. 그래도 농사지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을하는데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토비들이 우리를 포위했던것입니다. 총 쏘며 들어오는데 우리가 그놈들을 혼내주려고 중기관총을 마구 쏘았습니다. 기관총소리는〈타타타〉하고 중기관총소리는 〈퉁퉁퉁〉하고 울립니다. 놈들은 중기관총소리를 듣고 대부대가 있는줄 알고 물러났기에 가을을 순조롭게 완수할수 있었습니다.》

 최창수(78세) 심양, 원 리홍광지대 중기반장


림강근거지 군민들이 한결같이 적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간고한 투쟁을 진행하고있을 때 1947년 1월 2일, 동북민주련군 주력은 림강보위전을 돕기 위해 령하 40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송화강을 건너 남진했다. 동북국에서는 사평으로부터 철수한 팔로군, 신사군 각 부대에 동북의 우수한 청년들을 대량 보강해 동북민주련군 1종대와 2종대, 6종대를 편성하여 막강한 야전군병력을 확보하였다. 이번 남진에 야전군 도합 12개 사의 병력과 동만, 북만의 많은 지방부대가 동원되였다.

동북민주련군은 길림시와 장춘시, 농안 사이의 구태, 장마자구, 치따무, 초가령 등지를 주요 공격목표로 하였다. 동북민주련군 1종대 3사는 신속히 치따무(其塔木)를 포위공격하고 1사는 장마자구(张麻子沟)에 도착해 구태방향으로 오는 적 지원군을 소멸할 포위망을 쳐놓았다.


1월 7일, 장마자구에 도착한 국민당 신1군 113퇀은 도로량켠에 미리 매복한 아군의 드센 공격을 받았다. 아군은 포격으로 적의 진세를 깨친후 과감히 돌진해 적과 백병전을 벌였다. 아군 전사들이 급작스레 코앞에 나타나자 적은 미처 선진적인 자동화무기를 써볼 사이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두시간 남짓한 격전을 거쳐 대부분 적이 소멸되였다.

한편 민주련군 6종대도 초가령(焦家岭)에 매복진을 펼쳐 덕혜로부터 치따무를 지원하러 오는 국민당 신 1군 30사 90퇀을 소멸하였다. 그리고 치따무를 포위했던 1종대 3사도 치렬한 공격전을 거쳐 1월 8일에 치따무를 공점하였다.

동북민주련군 1종대,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첫 주력군단으로 유명했던 이 영웅적 부대에도 1000여명 조선족전사들이 있었다. 1종대 3사 7퇀 3영 9련의 부반장이였던 전투영웅 고광동로인은 지금 서란(舒兰)에서 만년을 보내고있다. 용감하고 싸움에 능한 그는 치따무전투에서 적의 탄약창고를 공격할 때 날창으로 적 세놈을 찔러 눕히고 적 패장 한명을 생포했을뿐만아니라 중기관총 한정을 로획하기도 했다.

82세 고령이였지만 아직도 밭일을 돌보고 흰술을 반근정도씩 마신다는 고광동로인은 아득한 기억을 더듬으며 치따무전투를 이야기해주었다.

《치따무전투, 부대에 참가한 후의 첫 전투지요. 한개 진인데 백리돼요. 한개 영인데 국민당군이 한 500명 될가. 한개 사 그러니 3사와 같이 싸웠더랬어요. 일주일 싸워 억지로 이겼어요. 그때 처음이지 뭐. 다 국민당원이고 무기도 전부다 련발이고 그랬는데 다 수류탄 가지고 함께 죽을지언정 포로 절대 안합니다. 옆에 가서 꾹 누르면 터져요. 자기도 죽고 그래요….이래 가지구 상급의 명령은 포로는 뿌요라(포로를 잡지 말라), 그냥 죽여라 이랬지요. 포로 붙잡으면 자기도 죽고 우리도 죽는데 뭐 어찌겠어요. 일주일 싸웠습니다. 국민당 하나에 일곱이 덮쳐 싸웠으니까 그놈들 얼마나 강해요. 그때 우린 아무것도 없지요. 총알은 한두발씩인데 그놈들은 몇백발이지 뭐. 하나에 일곱이 대들어 일주일 싸워 승리했지요.대단하지 뭐.》

치따무 전투장면 (자료사진)

동북민주련군 1종대 3사 전투영웅 고광동로인


국민당 신 1군은 항일전쟁시기 원정군으로 미얀마에서 동맹군과 함께 싸웠던 부대로서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장병들의 전투의지가 강한것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전부 미국제무기로 무장되였다. 그러니 고광동과 제1종대 장병들은 첫 전투부터 이처럼 강한 적과 싸워 이겼던것이다.

북만의 민주련군 주력부대가 대거 남진할 때 동만의 각 부대도 송화강을 넘나들며 적과 싸워 림강보위전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1947년 새해 벽두에 대다수 조선족청년으로 편성된 길동군분구 경비 2려 4퇀과 6퇀은 길남군분구 24려 71퇀, 72퇀과 더불어 화전부근의 전략적요새인 화수림자(桦树林子)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양상곤(杨尚坤)을 퇀장으로 하는 길남군분구 24려 72퇀은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개편한 부대였다. 이 부대는 연안항일군정대학 출신인 양상곤을 비롯한 한족간부 몇명 내놓고는 부퇀장 송무선(宋茂璇)이하 1400여명 장병이 전부 조선족이였다.

72퇀 부퇀장 송무선


1910년 조선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송무선은 10살때 반일에 뜻을 둔 아버지를 따라 중국 길림성 영길현에 왔다. 1928년 그는 길림육문중학교를 졸업한후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시작했으며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송무선은 길림, 반석 등지에서 투쟁하다가 항일련군 1로군 1사 정치부 주임으로 있었다.

그후 1로군 총사령 양정우가 희생됨에 따라 부대가 흩어지고 그는 일제에게 체포되여 갖은 고생을 다 하다 출옥했다. 출옥후 조직을 찾지 못한 그는 고향에 있다가 일제의 패망을 보게 되였다. 일제가 투항하자 송무선은 길림시의 당조직을 찾고 천여명 조선청년을 모아 길림보안총대 제7대대를 건립하였다.  제7대대는 화전에 주둔하고있다가 조선의용군을 만나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편성되였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는 화전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계속 조선청년을 받아들였으며 또 군정학교를 꾸려 간부를 양성하였다. 1946년 봄에 이 부대는 화전현 보안퇀으로 편성되였다가 길남군분구 24려 72퇀으로 재편되였다. 72퇀 퇀장은 양상곤이고 부퇀장은 송무선이였으며 제1영 영장은 송무선이 겸하고 제2영 영장은 문제민이였으며 제3영 영장은 량명주였다. 국민당군이 화전을 점령한후 72퇀은 줄곧 송화강기슭에서 국민당군과 싸웠으며 강동(江东)근거지를 개척했다.


화수림자 공격명령을 받은 72퇀은 신속히 화수림자쪽으로 이동했고 1947년 1월초에 공격준비를 했다. 그들은 길동군분구의 조선족부대인 경비 2려 4퇀과 6퇀에 배합해 화수림자를 공격하였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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