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지현 기자] '혹시 다음은 내 차례?'
'막장의 귀재' 임성한 작가가 데스노트를 다시 폈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 임 작가 특유의 스토리에 배우들은 안절부절하며 다음 대본을 기다리고 있다. 데스노트에 이름이 오르는 순간, 출연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
지난 2일 방송된 MBC 일일드라마 '압구정 백야'에서는 주인공 백야(박하나)의 남편 조나단(김민수)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사고는 늘 그렇 듯 우연히 일어났다. 이날 백야와 조나단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마친 뒤 맹장염으로 입원한 서은하(이보희)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들렸다.
조나단은 병원에서 시비를 거는 깡패들과 마주했고, 이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벽에 머리를 부딪혀 쓰려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조나단은 동공이 풀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백야는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채 쓰러진 남편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슬퍼야 하지만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이었다. '병원에서 깡패와 말다툼을 하다 식물인간이 되는' 설정이 황당했기 때문. 심지어 무성의해 보일 정도였다.
그동안 임 작가는 더 이상 캐릭터가 필요치 않다고 판단되면 이들을 죽음이나 유학, 여행 등으로 하차시켜 왔다. 사실 캐릭터를 처리하는데 죽음 만큼 편안한 설정은 없다. 하나의 캐릭터가 사라지려면, 이 캐릭터가 극에서 맺고 있던 수많은 인연들을 정리해야 하는 또 다른 스토리가 필요하다. 개연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만큼 작가의 노력과 고민이 뒤따라야 한다.
물론 자신의 세계에 갇힌 임 작가에게 작품성을 요구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에게 왜 자꾸 주인공들을 죽이냐고 묻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적어도 개연성은 필요하다. 이는 대본을 쓰는 작가의 기본적 자질에 해당하는 문제다.
모든 주인공들을 죽음으로 해결하는 임 작가의 대본은 무성의해 보인다. 쓸 수 있는 소재가 고갈되서 죽음을 끌어다 쓰는 느낌이다. '압구정 백야'는 비단 주인공들의 죽음과 같은 소소한 장치 뿐 아니라 임 작가의 전작들을 섞은 듯한 기시감이 강한 작품이다. 복수는 '인어아가씨'를 연상케 하고, 금기된 사랑은 '하늘이시여'를 연성케 만든다. 죽음의 향연은 '오로라 공주'를 닮아 있다.
죽음에 대한 임 작가의 집착 때문에 힘든 건 배우들과 제작진이다. 대본을 받기 전까진 아무도 누가 죽는지 알 수 없기 때문. 배우와의 소통이 전무하고, 대본 유출을 지독히 꺼려하는 임 작가의 고집에 배우들의 속만 타 들어가고 있다.
한 출연자 측 관계자는 "배우들끼리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니냐.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고 있다"며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 도 없는 노릇이다. 신인을 주인공으로 캐스팅 해줬는데, 감히 어떻게 항의 하겠느냐"고 털어놨다. '오로라 공주' 출연진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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