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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항일련군고아 김회루와 그의 한족양부일가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6.03일 09:44
밀산지구 항일유격대밀영 조선인고아 8명의 눈물겨운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맹고군,피금련 특약기자,최성림기자=가렬처절했던 항일전쟁 년대에 중화의 아들딸들은 적들의 포화앞에서,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한차례 준엄한 고험을 겪어내고 정신적 세례를 받아냈으며 보귀한 생명과 선혈로 하나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냈다.전쟁은 무정하나 인정은 살아있었으니 일제 대소탕의 위급한 관두에 한족군중들이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혁명지사들의 자녀들을 부양한 이야기는 오늘도 밀산인민들 사이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4년봄,일위군은 밀산 서대림자지구의 항일무장에 대해 대대적인 수색과 소탕을 시작하였다.당조직에서는 일위군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서대림자촌의 부분적 항일유격대가속들과 항일회회원들을 촌에서 80여리 떨어진 양강구의 밀산항일유격대밀영으로 전이시켰다.겨울철에 들어서면서 밀영에는 련속 몇차례의 큰눈이 내렸는데 놈들은 이기회에 대병력을 동원하여 유격대의 공급선을 봉쇄하고 심산복지까지 들어와 근거지를 위협하였다.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직에서는 밀산유격대를 리연록이 이끄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에 편입하기로 하고 전략적인 전의(转移)를 결정했다.

  당시 밀영에는 부대를 따라온 적지않은 부녀와 8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제일 큰 아이가 11세이고 제일 어린아이는 돐도 채 안되였다.엄혹한 생존환경과 투쟁의 수요에 근거하여 조직에서는 반복적인 연구를 거쳐 이 애들을 모두 한족 백성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군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남자애들은 양자로,녀자애들은 민며느리로 주되 부양자와 아이들의 생명안전을 위해 누구도 애들의 거처와 부양자의 성명을 묻지말며 단독으로 가서 애를 찾아 와서는 더욱 안된다…

  주덕해동지는 현위의 지시에 따라 부녀들을 동원하였지만 이번의 동원은 어린애를 가진 어머니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그들은 애들과 함께 죽을지언정 남에게 주려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동기토벌이 더욱 가혹해져 생활처지가 간고한 양강밀영의 유격대는 점점 불리한 형세에 처하게 되였다.유격대의 령도들은 또다시 부녀들을 모여놓고 형세를 분석하면서 거듭 동원을 하였다.

  다년간 남편들을 따라 혁명에 참가한 부녀들도 사태의 엄중성을 모르는 바가 아니였다.유격대의 생존과 항일의 승리를 위하여 부녀들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참으며 끝내 아이들을 당지의 한족들의 집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주덕해는 어린애들을 입양하는 한족항일회원들의 손목을 잡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오래서 15년을 넘기지 않고 우리들이 꼭 돌아올것이니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어린이들만 잘 키워주시오."

  원 목릉현 항일유격대 대장 김한식과 안해 리범숙의 5살이 채 되지않은 아들 김현철도 그중의 한명이였다.리범숙은 가까스로 비통을 참아내며 천쪼각을 찾아 거기에 아이의 이름과 생일(1929년6월22일)을 적은후 애옷의 겨드랑이 밑에 꿰매넣었다.그러고는 현철에게 "오늘저녁 우리는 이사를 하니 배불리 먹고 일찍자야 한다..."고 말했다.

  현철이는 비록 어렸지만 이미 '이사'에는 습관되여 있었던것이다.기타 아이들로는 황옥청의 안해 허현숙의 9살이 안되는 딸애,박덕산과 안순복의 작은 딸애,최일륜과 김도자의 작은 딸애,오복어머니의 작은 딸애 등 남자애 둘과 녀자애 여섯 총 8명이였다.

  이 아이들을 입양한 사람들은 모두 시랄린즈항일회의 성원들로서 루경옥은 루경옥은 리범숙의 5살 채 안된 아들 김현철을 입양하고 등사우는 허현숙의 9살되는 딸애를,류씨네 막둥이는 3살되는 여자애를,류발자가 다른 남자애를,관목수와 설씨 그리고 로광신이 각각 녀자애 한명씩을 입양했다.나머지 녀자애 한명을 입양한 사람은 이름을 모른다.

조선인 어린이들을 입양한 한족 형제들은 애들을 부양하고 나어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리범숙의 아들 김현철을 입양한 루경옥(娄景玉)은 홀아비로서 부모와 동생부부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현철이는 루씨집에 금방 왔을때 조선족복장을 하고 있었다.루씨의 어머니는 인츰 그에게 한족아이의 복장으로 갈아입히고 이름을 루해정(娄海廷)이라 지었으며 아명은 대희(大喜)라 불렀다(3년후 루경옥의 동생 루경명의 아들이 태여나자 이희라 불렀다).루씨네는 모두 해정이를 귀여워했으며 평소 해정이가 엄마생각을 할때면 그에게 엄마는 일본놈들과 싸우러 갔으니 이제 일본놈들을 소멸하면 데리러 온다고 달애였다.또 만약 누가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 루경옥이라 대답하고 엄마가 어디갔는가고 물으면 죽었다고 대답해야 하며 지금부터는 여기가 바로 너의 집이고 절대로 조선인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루씨네는 현철이를 되도록이면 밖에 나가 다른 애들과 놀지 못하게 했으며 집식구들과 놀면서 부지런히 한어를 가르쳤다.

  봄이되여 날씨가 따뜻해지자 해정이는 이웃아이들과 놀기 시작하였다.그런데 한번은 이웃에 사는 열서너살되는 류씨성을 가진 아이가 해정이를 보고 '쑈꼬리(小高丽)'라고 욕했다.이 일을 알게된 할아버지 루봉각은 두말없이 삽자루를 둘러메고 류씨집에 찾아가 따졌다.류씨네는 인츰 잘못을 승인하고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루씨일가는 이 일을 통해 경각성을 높이지 않을수 없었다.그것은 당시 일위특무들이 도처에 득실거렸기 때문이다.고심끝에 루씨네는 목릉강남안의 류모하 반라성자(柳毛河半拉城子)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이때 함께 이사한 집은 역시 항일자녀들을 입양한 등사유와 류씨네 막내 두집이다.

  1939년 겨울의 어느 정오에 일본놈과 륙씨라는 한간 한놈이 사냥총을 둘러메고 루씨네 집에 들이닥쳤다.두놈은 수상한 눈길로 루씨네 집안과 집주위를 살피더니 루씨 집안일을 묻기 시작했다.놈들은 해정이를 가리키며 누구의 아이냐고 질문했다.루경옥의 어머니는 겁에 질렸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이애는 큰 아들 루경옥의 아들이며 큰 며느리는 몇년전 보청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놈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아예 루씨네 집에 묵으면서 루씨네가 밖으로 나가서도 안되고 산에 나무하러 가도 안되며 외인과 접촉할시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루씨네는 도대체 놈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오리무중이였으나 해정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편으론 이 불청객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놈들은 밤에도 륜번으로 교대하면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하루는 일본놈이 새사냥을 나가자 륙씨한간이 혼자 남게 되였는데 놈은 루경옥에게 자기는 계서헌병대에서 왔으며 함께온 일본인은 헌병대소대장라고 말했다.또 자기는 원래 호적(토비)이였는데 항일유격대와도 거래가 있었고 일본인들이 온후 우리를 접수하였다.이번에 여기로 온것은 주로 1934년겨울 항일동맹군제4군이 양강북골밀영에서 철수할때 몇몇 아이들을 당지 백성들에게 맡겼는데 헌병대에서는 이 아이들을 미끼로 항일련군들을 끌어내려한다고 씨벌었다.놈은 잠간 말을 끊은후 교활하게 루씨일가의 반응을 살폈다.한참후 놈은 선심을 쓰는듯 "이 며칠 우리가 다 료해해 보았다.너희집은 마을복판에 있지만 다른 외지인들과도 잘 래왕하지 않고 또 애들이 잘 어울려놀고 한어를 아주 류창하게 하므로 전혀 조선아이들 같지 않다. 너희 일가는 모두 소박한 사람들이니 내가 이렇게 귀뜸해 주는것이다"고 말했다.

  그날저녁 교활한 일본놈 소대장이 돌아온후 놈은 할아버지 루봉각에게 시탐조로 말했다."듣자니 너희집에서 항일련군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하던데 그 아이는 조선인이다.너희집은 항일련군의 비밀련락점이라는 사람도 있었다.만약 너희가 항일련군의 아이를 기르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추구하지 않을것이니 계속 길러도 된다."

이에 루봉각은 "우리는 항일련군을 모르오.우리집에는 조선인아이가 없소.보시오,이 아이들중 어느 아이가 조선인 아이란 말이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렇게 놈들은 루씨집에서 한달간이나 눌러있었다.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지못하자 륙가놈만 남겨놓고 먼저 떠나갔다.일본소대장이 떠나자 놈은 루경옥에게 이렇게 말했다."이번 우리가 여기로 올때 확실한 증거가 없이 그저 추측으로 왔을뿐이다.너희들이 원래 서대림자에 살았고 집에 또 어미가 없는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그러니 만약 너희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우리도 방법이 없는것이다."그제서야 루경옥은 마음이 좀 든든해 졌으나 또 무슨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이 한간놈을 더욱 조심스레 대접했다.또 한달이 지나도 진전이 없자 한간놈은 그제서야 루씨네가 챙겨주는 약담배와 소비돈을 넙적 받아가지고 떠나갔다.

  이번 일은 루씨일가에게는 한차례의 대재난이였다.두달간 루씨네 남녀로소는 하루도 발편잠을 자지 못했으며 매일 악몽같은 나날을 보냈다.더우기 경제상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았는바 많은 빚을 지게 되였으며 집에 겨우 있던 말두필과 차 한대를 팔아 빚을 갚지않으면 안되였다.이로부터 루씨네 가정의 생활은 더욱 쪼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루씨네는 누구도 이 일로 인해 서로 원망하지 않았으며 해정이를 더욱 친자식처럼 대했다.해정이도 철이 일찍 들어 열살밖에 안되였지만 매우 근면하고 어른들을 존경했고 형제사이에 우애가 깊었다.

  1943년 여름,위만경찰 장학례는 루봉각과 등사유를 촌공소에 불러와 이렇게 말했다. "너희 두집에서는 모두 항일련군 자녀들을 키우고 있는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승인하지 않으면 일본헌병대에 알리겠다."이미 사상준비가 있은 두 로인은 이런 공갈에 넘어가지 않았다.그들은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좀 누그러진 그놈은 이번에는 "먼저 돌아가 잘 생각해보고 다시오라"고 뒤를 두었다.

  두 로인은 돌아온후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또다시 재난이 닥쳐오는것만 같아 불안하였다.그들은 상론끝에 먼저 돈을 먹여 장학례와 가까운 사람을 통해 허실을 알아보기로 하였다.역시 이번에도 확실한 증거는 쥐지 못하고 돈을 뜯어내려 한다는것을 알아낸 두 집에서는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또다시 빚을 내여 주석을 마련하고 적지않은 뢰물을 주지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끝난것이 아니였다.1945년8월초의 어느날,일본헌병대의 특무 임옥소란자가 갑자기 두 로인을 촌공소로 호출했다.놈은 다짜고짜로 "너희 두집에서는 항일련군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이는 반만반일행위이다.오늘 내가 이일을 책임지고 조사하게 되였으니 로실하게 승인하면 여기서 해결될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헌병대에 가서 톡톡히 맛을 봐야 할것이다.그때면 승인해도 늦을것이니 잘 생각해보고 다시 오라."고 호통쳤다.

  두 로인은 이번에도 재물을 뜯어내려는 수작이란것을 뻔히 알수있었지만 이미 빚더미에 앉은 그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들은 큼마음을먹고 이번에는 버티기로 작심하였다.약 7~8일이 지난후 그들은 또다시 촌공소에 불리워갔다.임가놈이 생각해 보았는가고 묻자 두로인은 엄연히 우리 아이들인데 뭐가 더생각할것이 있는가고 대답했다.아무리 얼리고 닥치고 해도 말을 듣지 않자 이번에는 시커먼 권총까지 빼들며 위협했지만 효험이 없자 맥빠진 임가는 "이제 마지막으로 하루만 더 말미를 주겠다"고 호통치고는 나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한 특무놈이 말 두필을 끌고 허둥지둥 촌공소로 들어와 임가를 찾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놈이 말을 타고 촌서쪽방향으로 급히 달아났다.정오가 되자 비행기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전투기 3대가 고공에서 내려오며 일본군병영을 향하여 륜번 소사하기 시작했다.소련군이 출병한것이였다.

  이날 저녁 16세가 된 루해정은 온 집안과 함께 온밤 뜬눈으로 지새웠다.할아버지 루봉각과 아버지 루경옥은 더욱 희비가 엇갈렸다.비통한것은 해정이를 부양하기 위해 장장 10여년을 일본헌병과 특무들의 시달림을 받으며 심신이 망가지고 가정이 파탄의 위기에 직면한것이고 기쁜것은 충성과 의지로 항일유격대의 후대를 끝까지 지켜냈다는 자부심이였다.

1945년8월12일,밀산이 해방되였다.해정이와 루씨일가는 동북항일련군의 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하지만 밀산에 진주한 부대는 모두 소련홍군이였고 얼마후에는 시내에 지방유지회,치안대 등 어수룩한 부대들이 나타났다.

  1946년 겨울,토지개혁공작대가 류모하 반라성자촌에 진주하였다.공작대는 당의 토지정책을 선전할때 지금의 팔로군은 공산당이 령도하는 부대이며 동북항일련군 역시 공산당이 령도하므로 모두 한집식구라고 말했다.이말을 들은 해정이와 루씨일가는 모두 기뻐하였다.

  토개공작대는 이들의 사정을 료해한후 전촌대회에서 루씨일가의 사적을 선전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많은 촌민들은 "우리는 한마을에서 10여년을 살았지만 해정이가 항일련군고아라는것을 전혀 몰랐다"고 하면서 "목이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련군고아들을 길러냈다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토개공작대는 류모하에서 제1차공판대회를 열고 위만경찰 장학례를 공개심판하였다.17세의 해정이는 용감하게 강단에 올라 일본침략자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과 장학례등 위만경찰과 특무들이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고 못살게 한 죄행을 성토했다.

  공판대회후 해정이는 참군하여 구중대에 소속 되였다.구위서기와 구장은 해정이의 정황을 료해한후 구위에 조동하여 구위서기의 경위원을 맡게 하였다.어느하루 구위서기 후개는 해정이에게 이름을 고칠것을 건의하였다.해정이는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다.저는 루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숙부, 숙모께서 키워주셨습니다.저는 이미 루씨집안 사람입니다.만약 이름을 고친다면 은혜를 배반하는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이에 후서기는 "해정이의 아버지는 이미 희생되였고 어머니와 형님의 생사도 알수없으니 김씨집안의 대가 끊어질수도 있다오.루씨네는 자식들이 많으니 괜찮다오.비록 성명은 고쳤지만 그들과의 관계가 개변되는 것이 아니라오.물론 그들의 은정은 영원히 잊으면 안되오."라고 말하면서 조직에서 이미 루씨네와 상론했고 그들도 동의했다고 말했다.

  후서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름을 무엇으로 고칠가 의론하기 시작했다.누군가 해정이의 원래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다.그는 김현철이라고 대답했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원래 이름보다 새로 매우 의미가 있는 이름을 짛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후서기는 잠간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김회루(金怀娄)가 어떻소?루씨의 길러준 은혜를 위해, 그리고 혁명사업을 위하여 목숨바친 친아버지를 영원히 잊지않는다는 의미에서 말이요."

  이때로부터 해정이는 김회루로 불리기 시작했다.

  1948년 겨울,원 서대림자 당지부서기이며 당시 동북행정위원회민정부민족사무처 처장이였던 주덕해는 사람을 전문 밀산에 파견해 당년 밀산항일유격대의 8명 자녀를 찾았다.그들은 현위의 소개를 받아 라층즈에 가서 루봉각,등사유,류씨네 막둥이 등 세집에서 부양했던 3명의 아이들이 바로 당년에 유격대에서 남겨두고 간 조선인 애들이란것을 확인했다. 즉 김회루(루해정,원명 김현철)외에 등사유가 입양한 황옥청렬사와 허현숙렬사의 작은 딸,류씨네 막둥이가 입양한 등금영(후에 지음이름)이다.하지만 기타 5명자녀들의 소식은 찾을길이 없었다.또한 당시 김회루가 출장중에 있었기에 주덕해의 특파원들과 대면하지 못하였다.다행히 김회루가 출장에서 돌아온후 오매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소식과 통신주소를 접할수 있었다.

  김회루는 련며칠 등불아래서 어린기억을 더듬으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조선글을 몰랐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대필하는수밖에 없었다.그는 편지에서 10여년래 루씨 일가와 동네이웃들이 보살펴준 크나큰 은덕을 토로하였으며 당의 배양과 교육하에 토지개혁에 참가하고 참군한 경력을 아뢰였다. 편지를 부친후 그는 매일 손꼽아 어머니의 편지를 기다렸다.드디여 어느날 우체원이 어머니가 조선평양으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전해왔다.

  어머니는 편지에서 "회루 내 아들아,네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는 두번째 해방을 얻은것만큼이나 기뻣단다.네가 이름을 고쳤다고 들었다.괜찮구나,네가 성까지 고쳐도 엄마는 기쁘단다.

네가 어떻게 성을 고치든 너는 영원히 나의 아들이니까!네가 끝내 살아남았으니 우리 가정에 또 한사람이 더 살아남게 되였구나.이시각 엄마는 꿈을 꾸고 있는것만 같단다.정말 믿기 어렵구나.엄마 마음의 기쁨은 그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할수 없구나.이제 전쟁이 끝나면 꼭 밀산에 찾아가 너를 부양해준 그분들을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다.회루야,너는 나를 잊을지언정 루씨네 일가와 이웃분들을 잊어서는 안된다.그들의 은혜는 나보다도 크고 깊으니 우리는 영원히 그들의 길러준 은혜에 보답해야 할것이다..."

  1957년 여름 김회루는 조직의 안배로 방학기간을 리용해 조선평양으로 가 어머니를 만났다.이는 이들 모자가 23년간의 생리별후 첫번째 상봉이였다.모자는 부둥켜 안고 눈물범벅이 되였다.

  이때 회루는 이미 밀산현정부의 추천으로 심양의 동북공학원에서 재학중이였다.1960년 졸업후 회루는 학교에 남아 행정사업에 종사하였다.1984년부터는

  삼중관시분기술연구와 시공을 시작하여 '삼중관시분철근콩크리주추와 고결체방법(三重管施喷钢筋砼桩基和固结体)'을 발명하여 '삼중고압시분콘크리트주입설비(三重高压施喷注浆设备)' 등 3개항목의 특허를 따냈다.2000년에는 국제협회의 전문가 심평을 거쳐 '삼중관시분철근콩크리주추와 고결체방법'이 국제발명 금상을 탓으며 김회루의 이름은 업적과 함께 '세계당대특허발명(설계)인명전 - 중국권'에 기재 되였으며 2001년에는 21세기인재고(人才库)에 올랐고 '세계화인발명가대사전'에 올랐다.

  김회루는 분망한 행정사업과 교학연구여가를 짜내여 경상적으로 루씨네 일가와 련계를 가지고 있으며 명절이면 종종 가족을 데리고 그들과 만나 회포를 나누군 한다.그는 여러차례 그들을 심양에 모셔다 병을 보이고 유람을 시켜주기도 하였다.그는 또 '한족친인들이 나를 길러주었다'라는 제목으로 장편 회억록을 집필하여 루씨일가와 이웃들에 대한 끈끈한 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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