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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실력파 청년화가 리산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8.13일 10:21

【리산호 략력】

  1981년 4월 24일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태여남

  학습경력:

  1999년8월~2003년7월 중국 연변대학교 미술대학 유화전공

  2005년3월~2007년8월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학위 취득

  직무:

  2000년9월~2002년9월 연변대학교 미술학원 학생회 회장

  2005년6월~2007년7월 주한중국대사관류학생총회 미술동맹회 회장

  2008년5월~2009년12월 북경 쿠아트센터 예술총감독

  2010년1월~현재 중국조선족청년미술동맹회 회장

  2012년10월~현재 북경송좡환구공예품유한회사 대표

  구학경력:

  (흑룡강신문=하얼빈) 어려서 3살에 오른손을 잃고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불우한 유아기를 경험. 이후 그림그리기를 좋아한다는것을 발견한 어머니는 4살때 황길수 선생님의 집에서 개인지도를 받게하였으며 6살부터는 화룡시 연극원 미술보습반에 다니기 시작. 9살때 이미 석고상 소묘과정을 전부 마치고 수채화, 공예, 조소 등 다양한 미술장르를 학습,경헙 하였음. 1991년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미술대전에서 최우상을 받았으며 1993년 중국청소년서화가신동백과대사전에 작품이 수록됨. 13살때 부터 더 많은 미술공부를 위하여 연변전역를 돌아다니면서 수소문 하여 미술 선생님을 찾아다녔었고, 18살 되던 해에 미술대학 진학을 위하여 김동운 교수님의 추천과 최헌기 작가님의 도움으로 천진미술대학의 손건평(孙建平)교수님을 찾아서 떠나게 됨. 반년간의 가르침을 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연변대학교 미술학원에 최우수 성적으로 입학하였으며 4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한국 류학의 길을 결심함. 한국에서 현 중앙미술대학 김일룡 교수님의 추천으로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이두식 학장님과 신종식교수님의 가르침하에 4년간의 류학과정을 원만히 마치고 귀국함. 2007년 7월 북경 최헌기 작가님의 작업실에서 1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훌륭한 선배작가들과의 견습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현재 중국 송장 예술구에서 미술창작의 길을 견지하고 있음.

  1.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까? 미술창작에 종사한 경력을 알고싶습니다.

  그건 저의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3살때 한차례 불행한 사고때문에 엄지손가락을 뺀 네 손가락이 잘려나갔어요. 4살때 어머니는 엄지손가락만 남은 저의 오른손을 잡고 화룡시영화관에 있는 황길수선생님의 미술반으로 찾아갔어요. 제 기억 속에 당시 미술반에는 모두 저보다 나이가 몇십세는 족히 많은 어른들이 낡은 군용외투를 입고 그림을 배우고있었지요. 나중에 제가 연변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해서야 그들이 바로 문화혁명이 끝난 뒤 제1기 미술전공 입시생들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 중에는 지금의 연변대학교 리승용원장님도 계셨고 전 조소과(雕塑专业) 김춘일교수님도 계셨습니다.

  난로를 둘러싸고앉아 “괴물”을 그리는 기괴한 아저씨군단과 저는 그때부터 같이 그림을 그리게 되였어요. 당시에 저는 어머니가 옆에서 지켜보는가운데 아동그림책에 있는 사과며 오리며 비행기 같은것을 그렸는데 처음에는 연필 잡을줄도 몰라서 자꾸 연필심을 끊어먹었지요. 어머니는 제옆에서 계속해서 연필을 깎아주다가 나중에는 선생님이랑 한가지를 의논했는데 그것은 바로 제가 그림 한폭을 완성할 때마다 옆의 극장에 가서 영화를 한편 볼수 있게 해주는것이였습니다. 이 보상을 얻기 위해 저는 제 예술인생에서 가장 어마어마한 도전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손으로 연필을 깎는것이였습니다. 결국 약 2개월이 지나서야 저는 드디여 영화 한편을 보게 되였습니다. 내용은 잘 기억되지 않지만 무지하게 깨고 부수며 싸우는 액션영화였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곽원갑(霍元甲)”이라는 영화였음을 알게 되였지요.

  어렸을 때의 이런 기억들은 저의 유년시절 내내 이어졌는데 7살 되던 해에 저는 또 하교길에 기이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것은 어느 여름날 저녁이였습니다. 하늘에는 저녁노을이 예쁘게 물들어있고 작은 개울가 옆에는 저보다 수십살은 많음직한 아저씨들이 앉아서 컬러로 된 “괴물”을 연출해내고있었어요. 저는 그들에게서 그 비법을 배우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저에게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전거타기였답니다. 그리하여 제 인생의 두번째 도전, 바로 한손으로 자전거타기 도전이 시작되였어요. 약 한달뒤에 저는 그 컬러”악마”들을 배울수 있었고 그것이 수채화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몇년간의 고된 련습끝에 12살 즈음 되였을 때 저는 그 당시 선생님들을 초월하게 되였고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제자들도 두게 되였답니다. 당시 자전거로 20~30리 되는 길을 타고 산이며 협곡이며 다니면서 각종 모험도 많이 했는데 그 영광의 상처자국들이 지금도 몸에 남아있답니다.

  그뒤 대학입시준비를 할 때는 연변대학 김동운교수님과 천진미술원 손건평교수님, 입시반 김용철교수님 등의 가르침을 받아 연변대학 미술학부 유화전공에 합격하게 되였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학교에서 전국예술고찰과정으로 장춘 원동미술관에 가서 참관하게 되였는데 제 눈에는 어떻게 봐도 금상과 은상 작품이 리해가 안되였습니다. 오히려 저는 동상작품(리철호교수)이 더 수긍되였고 은상이나 금상보다 더 잘 그렸다고 생각되였습니다. 두번째로 참관한 곳은 오래동안 기대하고 갈망해온 전국미술전이였는데 이것 또한 금상작품이 도통 리해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는 송장(宋庄)에 가서 박광섭, 리용 등 선배님들의 화실을 탐방했는데 저는 더욱 혼란스러워졌지요. 그때서야 저는 크게 뭔가 깨닫는바가 있었습니다. 제가 여태껏 배워온것들이 오히려 이들 예술작품을 리해하는데 큰 방해가 되여왔음을 말이지요.

  이 충격을 안고 저는 계속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결정한것이 바로 한국행입니다. 당시 저는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에 자비로 류학하고 생활비까지 충당하려면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모든것을 마치고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은 언어적인 측면이나 생활적인 측면이나 바로 그런 조건에 부합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모두 한가지 리유때문에 저를 만류했습니다. 남들보다 부족한 한손으로 이국땅에 가서 어떻게 시험을 볼것이며 또 높은 학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할것이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념려들이 오히려 저한테는 더 큰 도전의지를 불러 일으켜서 저는 제 인생의 세번째 도전인 “한손으로 한국 류학하기”를 실천하기로 결심하게 되였습니다.

  홍익대학교 들어가서 연구생 첫 수업때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분석하고 창작방향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저는 이제껏 이와는 상반된 교육을 받았던터라(제가 기억하기로는 저의 학부 교수님들은 그림은 입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것이라고 노상 말씀하셨지요) 대중앞에서 무언가를 발표한다는것은 영 어색한 일이였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몰랐고 머리속은 이미 하얀 백지장이 되였습니다. 제가 하는 얘기를 그들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그들이 하는 얘기 또한 제 머리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결국 교수님은 저에게 “중국 촌놈”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어요. 이 비극적인 순간을 저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것입니다. 중국에선 그토록 촉망 받았던 미술인재가 한국에 와서 한순간에 “미운 오리새끼”로 전락하다니! 그때부터 저는 저에게 “새도 아니고 쥐도 아닌 박쥐”라는 또 다른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이 또한 저의 예술인생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어요. 그때 저는 비로소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였는데 그것은 “삶에서 손 하나가 없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고할수 있는 머리가 없는것이 더 큰 문제이다”라는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최헌기화가님의 인연은 1998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당시 저는 미술입시를 준비하고있었고 김동운교수님은 저에게 명문미술학원에 들어가려면 “고수”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며 그 당시 미술계에서 명망 높은 최헌기선생님을 추천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최헌기선생님은 당시 중요한 작업때문에 은거중이였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있었던터라 저를 직접 가르치지 못하는 대신, 천진미술학원의 손건평선생님에게 저를 소개시켜줬습니다. 그렇게 서로 한번도 뵙지 못한 상태에서 2004년, 한국에 류학 와서야 저는 최헌기선생님이 마침 한국에서 전시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우연찮게 전해 듣게 되였습니다. 기쁘고 떨리는 마음을 주체 못한채 바로 전시장으로 달려가 6년만에 저는 그렇게 보고싶었던 최헌기선생님과의 일면식을 치르게 되였습니다. 그후부터 저희는 줄곧 련락을 이어왔으며 석사졸업후 북경으로 간것도 최선생님한테서 그가 이룩해놓은 예술경험과 사회경험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제가 나중에 전시를 총괄하고 감독하는 일을 하게 된것과 상당히 밀접한 련관성을 갖습니다.

  최선생님의 작품과 예술에 대한 시각은 제 또래의 젊은 조선족예술가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최선생님은 현대의 다양한 재료를 부단히 시도하고 또한 평면작품중 회화언어에 대한 한계를 돌파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오늘까지 이어져내려왔는데 선생님은 저의 작품방향에 대한 조언과 비평들을 아낌없이 주고있습니다.



2. 화가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꼽을가요? 화가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4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는 몇번의 큰 도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중에서 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것은 저의 어머님이십니다. 4살에 한손으로 연필을 깎기 시작해서 매번 저의 작은 손이 칼에 베이거나 하면 어머니는 저보다 백배는 더 가슴 아파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제가 포기하지 않도록 늘 격려해줬지요. 9살 때 한손으로 자전거를 배울 때도 어머니는 제가 매번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끝까지 일어날수 있도록 격려해줬습니다. 어머니는 줄곧 제가 혼자 일어날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언젠가 다리피부가 찢어져서 병원에 가서 봉합할 때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어렸을 때 너는 지금보다 훨씬 용감했어, 너의 오른손은 아기때에 백바늘 넘게 기웠는데도 잘 참아냈는데 오늘 몇바늘 같은건 얼마든지 잘 이겨낼거야.” 그런 말을 들자 저의 두려움은 신기하게 사라졌어요.

  그리고 어느 한번 그림반에서 야외사생을 하러 협곡에 갔는데 밤이 되여서 폭우가 내렸어요, 흙길은 온통 진흙탕이 되여 그림반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 밖에서 야영할수 밖에 없었습니다(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답니다). 이튿날 새벽에 비가 그쳐 그림반으로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잡은 한손이 미끄러지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자전거 바퀴에 깔리게 되였고 순간 기절하게 되였습니다. 저희를 이끌던 선생님이 급히 구급을 진행하여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만 이튿날 오전, 그림반 선생님은 더 이상 저를 따라가지 못하게 했고 저도 너무 피곤했던터라 그날은 길을 나서지 않고 화실에서 잠들었지요. 그런데 마침 그날, 어머니가 며칠전 도성에 가서 산 미술도구를 저에게 주려고 화실에 들른거예요. 혼자 누워있는 저를 보고 어머니는 다음과 말했어요. “아들아, 진짜 산호랑이는 용맹하기 그지없단다. 네가 계속 화실에 누워있으면 너를 어찌 산호랑이라고 부를수 있겠느냐, 작은 고양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부터 저는 그 어떤 어려움과 피로가 몰려와도 더 이상 화실에 드러눕지 않게 되였어요.



  작품 "악화수아- 초혼(初梦)"

  3. 화가님의 사생시리즈작품에서 장백산 및 고향 연변에 대한 깊은 사랑을 엿볼수 있는데 이런 감정은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고있습니까?

  저는 장백산 기슭에서 태여나 어린 시절부터 성산의 흙을 밟고 물을 마시며 그 륙덕을 느끼면서 자랐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예에 대한 뜻을 버릴수 없어 고향을 떠나 이국타향에서 예술공부를 하였지요. 학업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이 순백의 넓은 공간을 밟으면서 또 한번 저를 낳아 길러준 성산의 모성을 가장 따뜻한 체온으로 체험했습니다. 잠재적으로 거대한 생명력을 가지고있는 이 땅은 변함없는 세월의 퇴적으로 제 령혼에 쌓인 먼지를 훌훌 털어버리며 억겁의 세월 뒤에도 새로운 생명의 자궁으로 거듭날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웅장한 산악과 령혼을 깨우는 바람결로 또 한번 제 안에 도사리고있던 꿈을 깨워주는 위대한 자연의 흐름에 전률했지요. 저는 그 자연의 호흡을 놓치지 않고 그 리듬을 그대로 형상화하려고 애썼습니다. 원만하고 푸근하지만 심지가 굳은 자연의 땅을 그림으로써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라도 소중한 존재임을 알리고싶었습니다.

  장백산기행을 통해 본 악화(岳桦)숲은 저한테 경이로움을 주었고 동시에 그 분위기가 현실의 실감을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악화나무는 해발 1800~2000메터의 장백산일대에서 자라고있는 나무로서 매서운 추위와 척박한 자연조건에 잘 견뎌내고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8급 이상의 강풍에도 끄떡없이 자신의 생태사명을 짊어지고있는 악화나무를 부분적으로 절단하여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였으며 동시에 량감(量感)에 넘치는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환경으로 놓고 말하면 악화나무는 황산송보다 더 렬악한 환경에서 생존합니다. 황산송에 대한 례찬은 많지만 묵묵히 장백산천지를 지키고있는 악화나무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있습니다.



작품 "김C 뱀을 잡았다"

  4. 최근 북경 송장에서 “리산호—마술적사실주의(魔幻现实主义)작품전”을 개최하고 있는데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마술적사실주의는 종종 콜롬비아작가 가르시아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련상하게 합니다. 20세기 50년대 전후에 라틴아메리카에서 흥기된 마술적사실주의는 일종의 문학사조였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사실 20세기 30년대에 이미 유럽 후기표현주의회화 저서에서 나왔는데 제목은 “마술적사실주의, 후기표현주의, 오늘의 유럽회화에 관한 제(诸)문제”입니다. 마술적사실주의는 초현실주의가 출현한 다음에 나온 일종의 새로운 현대표현의 류파입니다. 저의 마술적사실주의회화작품중 대다수는 류학시절 의식의 변화와 현실상황을 왜곡, 변형 및 마술적사실주의 풍자수법으로 표현한것입니다. 그 당시 체계적으로 마술적사실주의 문학작품을 통독하진 않았지만 표현한 내용은 거개가 문학작품속의 “기괴하고 황당한 인물과 줄거리 및 각종 초자연적현상을 현실적인 서사와 묘사 가운데 개입시켜 현실적 정치사회를 일종의 현대신화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현실주의적인 서사와 국면도 있지만 기괴한 환상이 뒤섞이게 된다”는 마술적사술주의의 특징과 일치했습니다. 그속에서 환상과 현실이 하나로 융화되는데 이 “환상”은 독특한 자신의 풍격을 지니고 있지만 진실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10년 창작기간 동안의 작품을 “마술적사실주의”라고 칭하고저 하는데 사실 마술적사실주의가 칭하는것은 마술이 아닌 현실입니다. “마술”은 방법일뿐이고 “현실”이 진짜 목적인 셈인데요, 아르헨띠나 유명한 문학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적이 있습니다. “마술적사실주의작가의 목적은 마술의 힘을 빌어 현실을 표현하는것이지 마술을 현실처럼 표현하는것이 결코 아니다”라고요.



 시인 윤동주 초상화

  5. 화가님의 작품중 스스로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하거나 또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어느것인가요? 어떤 심미적감각과 예술시각을 표달했나요?

  시리즈물로는 우에서 언급한 “악화혼”입니다. 악화나무에 대한 성찰은 높은 지성을 필요로 하기때문에 장백기행을 통해 “악화혼”이라는 일련의 작품을 만들어 이 영원한 생명을 세상에 알리고싶었고 그 살아 숨 쉬는 느낌을 화폭에 담아내고싶었습니다.

  인물화로는 윤동주시인의 초상화입니다. 윤동주시인의 초상화 창작에 있어서 본인이 가장 핵심적으로 고민하였던 문제는 기존의 전통적인 초상화관례나 규정된 인물배치가 되지 말자는것이였습니다. 일상적인 인물화구도는 화면의 안정감과 상향숭배심리의 시각을 도모하여 대부분 피라미드식의 상승형으로 설정합니다. 이러한 구도는 미술에서뿐만아니라 현대의 사진학, 영상학 분야에서까지도 관례적으로 련속되여 내려오고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업에서는 시인에 대한 경배나 숭상심리보다는 일제통치시대 우리 민족의 힘든 력사적고초를 두 어깨에 무겁게 지니고 짧은 생을 마감했던 한 젊은 시인으로서의 전반 생애와, 순수하면서 강인한 의지가 숨겨져있는 량면적인 그의 모습을 표현하고저 하였기에, 일반적인 3각형 피라미드식의 관례적구도를 파괴하여 주인공의 눈을 중심선으로 응시의 균형중심을 구사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주인공 인물은 전반 화면에서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주게 되기에 그 대안으로 시인의 삶의 력사적도영을 은유하고있는 뒤부분의 아치형배경을 구사하게 되였습니다.

  이 그림에는 숨어있는 많은 상징들이 있습니다. 배경은 내용상에서도 볼수 있다싶이 왼쪽으로부터 오늘의 룡정 일송정과 옛 룡정 마을(원경), 시인이 다녔었던 명동학교, 시인이 수감되였던 후쿠오카감옥(중경), 시인의 묘비에 모인 지인들과 시인의 장례식에 모인 지인들(근경)로 구성되였는데 원경-중경-근경으로의 련속성과 대칭적인 내용으로 구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깨우의 배경은 원경의 련속(하늘)이면서도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 “별 헤는 밤”, 즉 시인의 보았던 고향하늘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가장 하단에서는 옷 주름에 비낀 음영을 리용하여 가슴에서 솟는 홰불모양의 형체를 구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937년 x월 x일”이라는 작품도 상당히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이는 1933년부터 1942년에 이르기까지 일제통치시기가 제일 살벌했던 근 9년간의 식민지노예화교육정책시기에 룡정의 한 소학교 개막식 장면을 재현한 작품입니다. 검은색 일본군경무리속에 한심한 표정을 지을수 밖에 없었던 흰옷의 교장선생님, 왼쪽부분의 원 서당의 목판을 건방지게 기대로 하고있는 일본군경, 철부지 같은 애들을 모아놓고 장난치듯 국기를 게양하는 장면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특별히 교육을 중요시하는 우수한 전통이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이런 미덕이 한때는 처참하게 짓밟히고 수모 당하고 심지어 말살되여 파묻힐번 했었던 억울한 력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침식속에 지금에 와서는 이 철증같은 력사가 대부분 많이 잊혀지고 심지어 왜곡되여가고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작품 <1937년x월 x일 >

  6. 미래 예술의 길에 대하여 화가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있습니까?

  오늘, 예술인생을 영위함에 있어 예술과 시장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수는 없습니다. 저는 보통 창작이 끝난후에 다시 전체적으로 작품이 예술시장에서 매겨지는 가치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재량합니다. 생계문제를 해결하는것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젊었을 때 다양한 직업신분을 체험하는것 례컨대 전시 책임자가 되거나 예술과 관련된 산업을 개발하거나 공공예술항목을 진행한다거나 혹은 종종 통역가가 되는것 모두 중요한 경험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학위과정을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술사와 경영학 공부인데요. 일정한 지식을 습득하고나서 저는 또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예술가가 단순히 자신의 작품만 가지고는 설명하는 힘이 부족하다는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다양한 관점에 접근하기 위해 타인과 또 많은 집단의 힘이 필요하고 이것이 바로 제가 기획자가 된 출발점입니다. 례컨대 한국에는 매우 우수한 예술가가 많이 있습니다만 중국에서 보았던 한국전시는 통상 삼류와 다를것 없었습니다. 좀 더 많은 한국현대예술의 발전면모를 제대로 중국에 소개시키는것, 비록 이것은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또한 하나의 예술공동체의 탄생이기도 하며 큰 예술의 범위에서의 또 하나의 기획양식이기도 하지요. 이 과정에서 두 나라 사 예술가 사이의 교량이 되여 서로의 립장을 리해하도록 하는것입니다. 전의 “새도 아니고 쥐도 아닌 박쥐”가 “새이기도 하고 쥐이기도 한 박쥐”로 전환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실 이 인생 개념이라는것이 너무 방대해서 미리 생각해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저에게 하나의 특별한 상황을 가정해두기로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세계일주를 시작합니다. 이제 제 인생의 가장 큰 꿈이 곧 실현되는 순간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추락해서 무인도에 착륙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거창하게 세웠던 저의 수많은 인생계획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는것은 한 순간이지요. 저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그림을 그리고 또 그것을 즐기는것, 이것이 바로 무인도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남길수 있는것이며 또한 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다채로운 흔적으로 남지 않을가 하는것입니다!

  출처:인민넷 조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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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영화 《결혼등기》...황혼재혼에 대한 사색의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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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서 올들어 네번째 작품으로 내놓은 미니영화 《결혼등기》가 5월16일 오전 연길한성호텔에서 시영식을 가졌다. 연변영화드라마협회 부회장 김기운이 감독을 맡고 전영실이 극본을 쓴 미니영화 《결혼등기》는 리혼한 부모의 재혼을 둘러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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