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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18. 영어클래스로 가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2.11일 09:22
그때쯤 가도판사처에서 복장강습반을 꾸린다기에 나는 등록하고 매일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수업을 받았다. 수업이 끝난 뒤 부지런히 걸어 집으로 가도 늘 10시가 넘군 하였다.

하루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집으로 돌아갈수 없게 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출장을 나가고 집에는 언니와 남동생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소식을 알려줄수가 없었다.


판사처가까이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가 밤을 묵으면서 언니가 애타게 기다릴걸 생각하니 마음은 몹시 불안하였다. 이튿날 그길로 《일터》에 나간 나는 언니가 찾아오려니 하고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가 언니는 직장에 나갔다가 청가를 맞고 나한테 왔는데 여간만 화를 내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 눈이 많이 왔으니 내가 의례 돌아가기 힘들겠다고 생각하고 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맞추어 내 마중을 오다가 웬 남자들한테 뒤를 밟혀 요리조리 에돌며 겨우 떼놓고 집으로 돌아갔단다. 언니는 나를 보자 아무리 사정이 어떻게 되였든지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돌아올 궁리를 하지 않고 남의 집에 가 자면 어떻게 하냐며 호되게 꾸짖는것이였다.


사실 나라고 왜 집에 돌아가고싶지 않았겠는가? 걷기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더라도 또 전화나 있는 때라도 얼마나 좋았을가? 인력거나 택시도 보고 죽자 해도 없는 시대였다. 내가 살아가는데 이렇게 억울할 때가 참 많았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는가? 참아야지. 허구픈 웃음만 웃을수밖에 없었다.

그때 약 40일동안에 바지, 웃옷, 적삼 등 기본 옷 만드는 법을 다 배웠다. 나는 강습반이 끝날무렵 집에서 쓰지 않는 천으로 바지를 아주 작은 비례로 만들었는데 선생님은 너무 잘했다고 칭찬해주는것이였다.강습반이 끝나는 날 판사처주임은 나더러 꼭 배운 재간으로 복장점을 꾸려 자립하라고 신신당부하는것이였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든 배우는데는 빠른데 무슨 일을 하려면 어찌나 굼뜬지 복장점을 차렸으면 밥 먹고 죽 벌이도 할것 같지 못하였다.

나와 같이 배운 다른 장애인들은 너나없이 복장점을 꾸려 돈을 척척 벌어들이는데 나만은 안된다. 이러다가는 정말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는가 근심을 했더니 어머니는 아무 걱정말고 공부나 잘하란다. 역시 나의 어머니다.


가방 뜨는 일도 일본에서 주문이 들어오지 않으니 다 해산되고말았다. 어머니는 차리리 잘됐단다. 그리고는 여러 곳에 수소문하여 영어클래스를 찾아놓았다. 인제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본격적으로 영어공부를 하란다.


내가 쓴 일본어편지를 본 뒤 어머니는 내가 뭘 좀 할수 있겠다고 느꼈던지 내가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겠다면 극구 말리고 나섰다.


돈은 한평생 벌수 있지만 공부할수 있는 시간은 딱 한시기란다. 누구나 다 공부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이것은 어머니의 론리이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힘껏 뒤를 밀어주겠으니 열심히 한번 해보란다. 나는 이런 어머니가 계셔서 항상 고맙다. 나도 어머니 말대로 하고싶다. 하지만 영어클래스에 다니자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낸단 말인가?

6월 1일에 클래스를 시작하니까 그전에 꼭 말해야 한다. 나는 련며칠 계속 아버지한테 할 말을 속으로 련습하고 또 련습하였다. 말 떼기가 너무 힘들어 몇번이나 하나부터 백까지 세였지만 끝내는 말을 못하고말았다. 이제 래일이면 공부하러 가야 한다. 더는 미룰수 없게 된 나는 점심에 꼭 말하리라 다짐하였다.


일이 될라고 그랬는지 그날따라 아버지는 아침부터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점심을 먹은후 나는 눈을 딱 감고 무거운 입을 뗐다. 《아버지, 과학기술관에서 영어를 배워준다는데 내가 가면 안되겠습니까? 일어를 공부하는데 영어를 알면 좋을것 같아서 배우려고 그럽니다. 허락해주십시오.》겨우 이 몇마디를 하는동안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화끈 뜨거워나는 감을 느꼈다.


잠자코 있던 아버지는 《그래. 네 발로 다닐만 하겠니? 옛날처럼 남한테 업혀다니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가거라.》라고 하는것이였다. 벼락같은 호령이 떨어질가 주저주저 말하였는데 너무나도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대답하니 정말 아버지가 하는 말이 옳은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윽하여 아버지가 출근하자 나는 어머니를 향해 《만세!》하고 소리높이 웨쳤다. 너무나 큰 승리였다. 이렇게 쉽게 허락을 받을줄 알았더면 련며칠 벼르고 또 벼르며 잠마저 설칠 필요가 없었겠는걸. 그동안 애매한 셈은 또 얼마나 세였다구.


그런데 그렇게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던 아버지가 무슨 생각에 허락을 하였는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다. 이젠 공부할 일만 남았다. 이튿날 오후 3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기에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차비를 하였다. 련 며칠 비가 내렸기때문에 꼭 걷기 어려울것이였다.

우리집에서 과학기술관까지 거리는 멀지 않으나 포장길이 아니여서 비만 오면 말이 아니였다. 간신히 과학기술관에 도착해보니 교실은 5층에 있었다. 5층까지 8단계를 오르는데 약 20분 걸린다. 나는 보통사람들처럼 층계를 오를 때 정면으로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서 올라가야 한다.


다리를 저절로 올리지 못하기에 돌아서서 엉뎅이 힘으로 한발 한발 올려놓아야 한다. 하기에 처음 보는 사람은 내가 움직이지 않고 서있으면 도대체 올라가는 사람인지 내려오는 사람인지 분간 못할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은 내가 내려가는가고 여기고 자기가 내려갈 때 업어다주겠다고 할 때가 있다. 사실 나는 한창 오르느라고 힘들어 죽을지경인데.


교실에 들어가니 한사람도 없었다. 너무 일찌기 왔나 했는데 좀 있으니 삼삼오오 들어서는것이였다. 오는 사람들을 보니 대부분은 중년들이였다. 이들은 단위의 선줄군들인데 모두 공정사나 의사, 회계사 등 직함시험을 보기 위하여 영어공부하러 온것이였다.

다 앉아보니 모두 80여명이나 되였다. 꽉 들어앉은 학생들을 둘러보던 선생님은 어이가 없어하더니 그저 웃어보이는것이였다. 선생님은 30대 젊은이였는데 영어를 참 잘하였다. 정말 부러웠다. (내가 선생님처럼 영어를 잘하려면 언제까지 공부해야 할가 조급해나기까지 한다. 어째든 30세까지 공부하여 적어도 세가지 언어는 장악하려고 계획은 했지만 생각대로 될는지 모르겠다. 3년에 한가지 언어씩 배우느라면 되겠지.)

영어클래스에 다니니 학교 다니는듯한 감이 나서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서로 면목이 없어 모두 서먹서먹한던것이 한달두달 지나니 서로 인사도 나누고 이야기도 하고 모르는것을 묻기도 할수 있어 정말 좋았다. 모두들 나에 대해 신기하게 생각하는것 같았다.


왜 다리가 그렇게 되였는가고 묻는 사람도 많고 힘들어서 어떻게 다니겠는가고 관심해주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반장은 관심이 더 지극하다. 반장은 나이가 40, 50세 돼보이는분인데 어느 단위의 과장직을 맡고있다고 했다. 직함시험을 치기 위하여 영어공부를 하고있었는데 나이가 있어 정말 힘들어하는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나에게 무슨 곤난이 없냐 묻기도 하고 층계를 내려가기 힘들면 자기가 업어주겠다고 등을 들이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거절하군 하였다. 아버지와의 약속도 있었거니와 나절로 걸어다니니 힘겹기는 하지만 몸이 거뿐한게 건강에도 좋을것 같았다.


사실 힘들기야 더 말할나위 없었다. 특히 비가 오거나 바람이 씽씽 불 때면 걸어가는것이 아니라 기여갈지경이였다. 한번은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쳤는데 나는 바람에 밀려 서있을수조차 없었다. 당장이라도 바람에 날려갈것만 같았다.

내가 집에서 나와 얼마를 가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내가 힘들줄 알고 동생을 시켜 나를 업어가게 하였다. 동생은 우산을 내 손에 쥐우고 나를 훌쩍 업고 앞으로 냅다 뛰였다.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부는지 우산은 반대방향으로 훌쩍 번져져 근본 쓸수 없게 되였다. 나는 우산이 번져진 모양이 너무 우스워 웃다나니 손에 든 물건들을 제대로 간수하기 어려웠다.

그때는 소똥이 굴러가는걸 보아도 웃어대는 시기여서 웃기 시작하면 참지 못하였다. 내가 너무 웃으니 동생도 우습던지 《웃지 말아요. 웃지 말라는데》 하면서 간신히 나를 업고 뛰여서 과학기술관에 다달았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나를 흙탕물에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들은 좋다고 웃어대며 수다까지 떨어댔다.


이런 날은 그래도 행운스러운 날이다. 어떤 때에는 흙탕물에 넘어져 웃옷부터 아래바지 그리고 신발까지 몽땅 적실 때가 있다. 학교에 가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면 집에 돌아가 옷을 바꾸어 입자니 수업시간이 늦어지겠고 계속 그런대로 학교에 가자니 몸이 너무 어지럽다. 정말 그런 안타까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수 없을것이다. 혹시 지나가는 사람들이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면 정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싶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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