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이정희 기자]
매주 발표되는 시청률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월화드라마에서는 MBC <빛과 그림자>가 월등하게 앞서 나가고 그 한참 뒤를 <사랑비>와 <패션왕>의 시청률 추이가 아옹다옹하며 뒤따르고 있다.
<사랑비>나 <패션왕>은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되는 20대 청춘스타들의 각축장이다. 더구나 각각 소녀시대의 윤아와 유리가 동시간대 상대 드라마에 캐스팅됨으로써 더욱이 방송 초반에는 화제가 됐었다.
하지만 이제 중반에 들어선 이즈음, 두 드라마 모두 20대 청춘의 힘으로는 격동의 세월에 맞서 싸워가는 안재욱의 고군분투를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패션왕>, '찌질'한 젊은이들의 현실적인 이야기
▲ SBS 드라마 <패션왕>은 패션업계에 인생을 건 네 청춘남녀의 성공과 사랑을 담는다.
ⓒ SBS
같은 20대 드라마라 하더라도, <사랑비>가 제목 그대로 온전히 '사랑지상주의'에 올인했다면, <패션왕>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랑과 야망'을 화두로 삼고 있다. 두 드라마가 전혀 다른 주제와 전개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사랑비>는 작가의 전작 <러브레터>등의 그림자가, <패션왕>에는 <발리에서 생긴 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온고지신'이라기엔 너무도 진부하게 느껴지는 점에서 묘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패션왕>의 고군분투는 꽤 주목할 만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왕자, 재벌들이 신데렐라 같은 여주인공을 로맨틱하게 사랑해 주어야만 인기를 끄는 상황. 강영걸 역의 유아인이 SNS에서 밝혔듯이 재벌이건, 동대문을 배경으로 일어서려는 빈손의 젊은이건 모두 '찌질'하고 양아치 같다는 <패션왕>의 설정은 그 어느 드라마보다 현실에 근접한 리얼리즘인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재벌인 정재혁은 본능적으로 자기와 다른 강영걸을 싫어하고 그래서 감히 그가 자기와 맞먹으려 하는 그를 가차 없이 짓밟으려 한다. 강영걸도 마찬가지다. 밥 먹듯이 '정재혁을 싫어한다'는 말을 내뱉듯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의 무임승차를 재수 없어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 "내가 누군데!" SBS <패션왕>의 정재혁(이제훈 분)은 패션계 재벌 2세로 남부러울 것 없는 돈과 외모를 가진 차가운 남자지만, 점점 사랑과 질투에 치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 SBS
흔히 우리나라 드라마가 쉽게 주인공은 착한 놈, 상대방은 나쁜 놈이라는 도덕적 편가르기를 통해 드라마에 몰입시키는 것에 비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 때문에 시청자를 불편하게 한다.
여주인공을 향해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는 재벌에 마음이 가다가도 아버지 앞에서 '짓밟아버리겠다'는 그가 꺼림칙하고, 또 여자의 아버지처럼 보호해 주다가도 자기 필요에 의해 이용도 하는 강영걸이 얄밉다. 우리들 안에 내재해 있는 세속적 욕망, 그걸로 인해 빚어지는 양면성, 그리고 거기서 번민하는 젊음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골조는 탄탄하나, 내용물이 빈약하다
▲ <패션왕>에서 유아인은 군 제대 후 바로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강영걸 역을, 신세경은 어린시절 사고로 부모를 잃었지만 명석하고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야무진 성격에 천부적인 디자인 감각을 가진 여주인공 가영 역을 맡았다.
ⓒ SBS
그런데 <패션왕> 속 욕망은 종종 손에 착착 감기지 않고 붕 떠서 보인다. 주인공들은 그 어느 드라마보다 현실적인데,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그건 아마도, 막연한 오늘날 젊은이들의 욕망의 도가니라는 골조는 탄탄하게 서있으되, 그걸 채워가는 내용물이 빈약해서가 아닐까?
제목이 <패션왕>이듯이 이 드라마는 동대문에서 시작된 강영걸이라는 젊은이의 성공과 실패를 다루고 있다. 거기에 의류 회사 후계자 정재혁이 얽히고, 두 사람 가운데에 천재 디자이너 이가영과 매장 직원에서 디자인 실장이 된 입지전적 디자이너 최안나가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욕망을 다루려면 그들의 일에서 비롯되어야 하는데, 이가영이 얼마만큼 천재인지, 강영걸은 정재혁을 무시하고 넘볼 만큼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가영과 최안나는 어떤 면에서 서로 엇갈리게 되는지 하는 상황이 피상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니 네 주인공들은 매번 서로 고소를 합네, 제휴를 합네 하고 지지고 볶지만, 그들의 치열한 전투가 시청자들에게는 막연하게 전달되고, 그저 두 여자를 둘러싸고 두 남자가 서로 아옹다옹 거리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욕망의 피상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두 여주인공의 수동적 역할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 강영걸과 정재혁이 부딪치는 현 지점에서 그 내용을 담보하는 것은 이가영과 최안나인데, 두 여자가 얼마나 능력 있는지 혹은 입지전적 인물임에도 어떤 면에서 부족한 건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녀들은 일을 하는 시간보다, 남자들을 만나고 갈등하고 기껏해야 재봉틀이나 돌리거나, 음모를 꾸미고 그게 안 되면 술로 달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 <패션왕> 5회에서 가영(신세경 분)은 누명을 쓰고 체포된 영걸(유아인 분)의 일에 휘말려 뉴욕패션스쿨에서 쫓겨나 강제추방 당했다.
ⓒ SBS
21세기의 젊은이들인데도 여전히 남성 본위의 이 세계 속에서 안주한 채 갈등만을 일삼거나, 자기희생 모드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자기 직업의 성공을 위해 결혼도 미뤄버리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근래에 보기 드물게 멋지지만은 않은, 피와 살과 욕망이 살아 펄떡이는 네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패션왕>이 주는 행운임은 분명하다. 그 행운이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패션왕>의 분발을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