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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역사적, 이론적 접근 (1)/정호영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12.08일 09:43
민족 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역사적, 이론적 접근 (1)

정호영(한국 고려대학교)

Ⅰ. 민족: 고루한 그러나 미답의 영역

“We are on-e people, we are on-e family, and we are on-e nation”. – 뉴욕 테러 직후 미국에서 사용된 레토릭

21세기에 막 들어선 지금 다시 민족이 이슈다. 21세기에 웬 민족인가 싶기도 할 테지만, 민족은 한국에서도 서구에서도 ‘낯익지만 새로운 문제 영역’이다(박명규, 1994 a: 376).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반만년’의 레토릭으로 시작하는 민족은 운명 공동체로서 공리적으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서구에서도 민족에 대한 연구가 ‘시대착오적이고 고루한’(anachronistic and archaic) 것으로 간주되기는 마찬가지였다(DÆDALUS, vol. 122, no. 3, Summer 1993: V).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민족의 공리성과 영속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회적 변화들이 급격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민족은 하나의 연구 분야로서 새롭게 주목 받기 시작하고 있다 . ‘미국인문과학학술원’(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이 발행하는 DÆDALUS 1993년 여름호의 특집 기획 ‘Reconstructing Nations and States’의 서문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한물 간 것으로 취급되던 민족 문제가 1989년 이후 새로운 생명(new life)을 얻으면서 이제 하나의 ‘지적 성장 산업’(intellectual growth industry)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밝히면서, 그 이유로는 동유럽에서의 민족 문제 첨예화, 소비에트 연방의 종말, 유럽 통합, 글로벌리제이션 같은 20세기 말의 사회적 변화들을 들고 있다 .


이렇게 새로운 연구 주제로 부상하고 있는 민족이지만, 정작 민족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적 설명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과 서구를 막론하고, 민족은 일상적으로는 지금까지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연구 대상으로서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감정적 오염이 가장 심했던 분야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또 개념적으로는 민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정의가 대단히 모호했고 특히 국가와 혼동되는 경향이 있어왔기 때문에 , 민족이라는 주제에 대한 객관적, 분석적 접근이 어려웠던 것이다. 즉, 민족에 관한 이해 없이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친 지구 인류사가 결코 이해될 수 없지만, 문제는 “우리는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나) 알고 있으나, (정작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것을 아주 빨리 설명하거나 정의할 수는 없다”는 점인데 (홉스봄, 1994: 15), 지금부터 이 논문이 다뤄보려는 것도 바로 이 문제이다. 민족에 관한 체계적, 분석적 설명 하나를 제시해보는 것, 그것이 이 논문의 목표이다.


민족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라는 문제의 핵심은 민족 정체성에 있다. 민족이란 민족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의 집합일 뿐이며, 흔히 혼동되는 국가와 대비시켜 볼 때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민족의 특징도 ‘정체성’에 있다. 민족은 무엇보다 정체성 단위인 것이다. Motyl은 ‘민족은 자기 인식적인 문화 공동체(self-conscious cultural community)이고, 국가는 영토 안에서 폭력을 독점하는 정치 조직(political organization with a monopoly of violence in some territory)이다’(Motyl, 1992: 314)라는 간결한 명제를 제시한 적이 있는데, 민족과 국가의 상대적 차이라는 점만을 놓고 볼 때는 이보다 더 명쾌한 정의를 찾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사회문화적 단위로서의 민족과 정치기능적 단위로서의 국가, 공동체로서의 민족과 제도 혹은 조직으로서의 국가라는 상대적 규정은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민족의 가장 규정적인 특징은 민족 정체성에 있다는 판단 속에서, 이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을 진행시킬 것이다.


민족 정체성을 설명항이 아닌 피설명항으로 삼고 있는 이 논문은 민족 정체성의 내용적 특징들보다는 그것을 발생시키고 확립시키는 과정 또는 동학에 논의를 집중시키게 되는데 , 이 논문에서는 민족 정체성이 민족적 범주 규정, 민족적 동일시, 민족 정체성 교섭의 세 가지 국면들로 이루어진 동학 속에서 형성, 발전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본다. 우선, 범주 규정은 그 성원들이 아직 민족 정체성을 획득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하나의 단일 집합체로서는 확립되는 국면을 말한다. 다음으로, 동일시는 한 범주에 속한 개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획득하여 내적 상호 유대를 형성하는 국면을 지칭하며, 마지막으로 정체성 교섭은 민족 정체성을 획득한 한 집합체가 다른 집합체들과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국면을 뜻한다. 그리고, 실제 역사 과정 속에서는 이들 세 국면들이 각각 주권 국가의 확립 및 그 이후 국가 형성 프로젝트의 발전, 부르주아 혁명 및 그 이후의 민족 형성 프로젝트의 진전, 18세기 말 이후 유럽 국가들 간의 다양한 형태의 국제적 상호작용들과 그에 따른 민족 정체성의 국제적 보편화 과정에 조응된다.

Ⅱ. 공동체로서의 집단: 범주, 집단, 그리고 집합적 정체성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향한 유용한 출발점이 되어 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범주(category)와 집단(group)의 구분이다. 집합체(collectivity)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것들이 있다: 성원들이 자신들이 한 집합체의 성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집합체에 소속되어 있는 범주, 그리고 성원들이 자신들이 한 집합체의 성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상태에서 소속되어 있는 집단 (group).


범주의 경우, 범주에 속한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사성은 외부의 관찰자에게만 유의미한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집단의 경우에는, 성원들이 집합체 성원으로서의 상호적 인식과 집합체에 대한 소속감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에, 집단은 외부적으로는 물론 내부 구성원 자신들에게도 유의미한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 된다. 범주는 그 성원들 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형성되어 있지 않지만 성원들 각자가 갖는 어떤 공통점이나 유사성을 기준으로 하여 한 묶음으로 분류된 인구 집단일 뿐이다 . 따라서, 어떤 개인들을 범주로 규정하는 외부자가 사라지면, 범주도 사라진다. 반면, 집단은 공유된 인식과 소속감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집합체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외부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집단에서는 성원들이 서로 아무런 사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도 갖지 않더라도 서로를 동일 집단의 성원으로 인식할 수 있다. 범주와 집단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성원들간의 상호적 인식과 집단에 대한 소속감인 집합적 정체성의 존재 여부인데, 이 때 집단이 바로 공동체에 해당하므로 공동체 규정의 핵심도 바로 집합적 정체성이 된다. 이 때, 공동체 규정의 핵심인 집합적 정체성은 ‘같은 집합체 안에서 그리고 하나의 집합체로서 살아간다는, 성원들간의 공유된 인식과 성원들의 자신의 집합체에 대한 공유된 소속감’(정호영, 2001: 42-43, 68)으로 정의될 수 있다.


범주의 집단으로의 변모 과정이 공동체 형성 과정이자 집합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인데, 이 범주와 집단의 관계를 집합적 정체성 형성의 전체 과정 측면에서 보자면, 범주는 집합적 정체성 형성의 출발점이자 조건이다. 그 어떤 것이든, 사회적 관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관계 이전에 반드시 둘 이상의 행위자가 존재해야 하며, 관계는 둘 이상의 행위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위에서 형성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주는 집합적 정체성 구성 과정의 한 국면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정체성 구성 과정은 동일시와 정체성 교섭으로 이루어지지만, 집합적 정체성 구성 과정에는 이들 국면 이외에도 범주 규정이라는 국면 하나가 추가되어야 한다 .

Ⅲ. 공동체 형성의 동학

공동체의 형성, 곧 집합적 정체성의 구성 과정은 범주 규정(categorization) – 집합적 동일시(collective identification) – 집합적 정체성 교섭(collective identity negotiation)의 세 가지 상호 연관된 국면들로 구성된다 . 그리고, 정체성 구성은 모두 어느 정도 정치적 성격을 띠지만, 집합적 정체성의 경우에는 그 정치적 성격이 더욱 강하다. 범주 규정, 집합적 동일시, 집합적 정체성 교섭의 국면들 각각의 규정은 평등한 행위자들 사이의 자연발생적, 진화론적 과정이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 위치하는 행위자들간의 정치적 상호작용에 의해 진행되며, 한 국면에서 다음 국면으로의 이행도 정치적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집합적 정체성 구성의 전 과정은 동원과 저항, 부과(imposition)와 동조, 갈등과 합의, 거래와 협상 같은 정치적 과정들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집합적 정체성 구성은 정치적 프로젝트로서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

1. 범주 규정

집합적 정체성 형성의 출발점이 되는 범주 규정 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미 제시되었듯이 집합체는 범주든 집단이든 그것이 집합체가 되기 위해서는 성원들 사이에 공유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공유되는 것이 객관적 특징이면 범주가 되고 성원들간의 호혜적 인식과 집합체에 대한 소속감이면 집단이 된다. 따라서, 범주 규정이란 성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비성원들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성원들만이 공유하는,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객관적인 공통점 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의 개체군이 형성되는 과정을 뜻한다.


범주 규정에 관한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주는 외부자의 눈에만 유의미한 사회적 사실로 드러나고, 외부자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사람은 성별이나 나이 같은 생물학적 특징들과 교육 정도나 경제적 지위 같은 사회적 특징들을 가지며, 이와 같은 다양한 각각의 특징들은 모두 범주 규정의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수많은 잠재적 범주 규정 기준들을 갖는 수많은 개인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떤 특징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들을 하나의 무리로 묶을 것인가는 애초부터 범주를 규정하는 외부자, 즉 범주 규정자 (categorizer)의 정치적 의도와 능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범주 규정에는 권력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범주 규정에 있어서 권력의 중요성은 대외적 측면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하나의 범주가 형성되는 과정은 그 범주와 다른 집합체들간의 관계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어떤 한 범주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집합체들과의 경쟁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원의 획득과 이용에 있어서의 제약과 가능성이 범주 규정에서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 따라서, 자원의 유한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집합체들간의 경쟁은 범주의 경계 결정 및 유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며(Jenkins, 1996: 94-95), 이것은 한 범주의 대외 정치적 과정을 구성한다.


범주가 형성되면, 그것의 규모가 아주 작지 않은 한, 현실적으로 범주의 유지는 제도화된 행정 체계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범주 규정자가 아무런 내적 상호 관계나 상호적 인식을 갖지 않는 독립적 개인들을 하나의 범주로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제도화된 행정 체계는 외적으로는 다른 집합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범주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자 내적으로는 성원들에 대한 범주 규정자의 의지를 실현시켜 주는 정치적 수단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범주는 성원들의 수치로만 존재하는 통계적 추상물이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규모, 제도화, 조직화를 갖춘, 자원이 투입되고 배분되는 실체적 조직체이다. 자원의 투입과 배분은 주로 다른 범주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범주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질 뿐, 범주 성원들의 필요는 자원의 투입과 배분에 관한 결정에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지 못하는데(Jenkins, 1996: 156), 자원 처분에 관한 결정권은 범주의 정치적 주체이자 행정적 주체인 범주 규정자가 갖는다. 따라서, 범주의 규정과 유지에는 권력 자체 뿐 아니라 권력을 실현할 수 있는 행정 체계라는 제도화된 권력 수단도 필요하다.


범주 규정은 성원들간의 유사성 창출 가능성을 내포한다. 사람들을 범주로 규정하는 것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잠재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범주라는 단일한 제도적 틀의 개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범주 규정자는 외적으로는 다른 사회적 행위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범주의 경계를 유지하고 내적으로는 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행정 체계를 지속적으로 작용시키는데, 이 행정 체계는 성원들의 삶을 동일한 모습으로 조직화해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행정 체계는 작동과 더불어 즉각적으로 성원들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고, 개입이 지속되면 상이했던 각 성원들의 삶은 점차 유사한 유형으로 주조되어 나간다.


보통, 한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그 범주가 방금 전에 규정된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이 다른 집합체에 속한 누군가에게는 한 무리의 같은 종류의 사람들로 비춰질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은 범주 규정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갖는 함의들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거나, 인식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범주란 그 성원들이 범주의 존재와 자신들이 그 범주에 속해 있다는 점은 인식하면서도, 그 범주가 자신들의 삶에 대해 갖는 의미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의 집합체’(Jenkins, 1996: 85-86)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원들이 인식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범주의 성원들 삶에 대한 침투를 통한 유사성 부여 작업은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맥락에서, 앞의 범주 정의는 ‘범주란, 성원들의 삶을 동일한 제도적 틀 안에 가둠으로써, 생애 경험(life-experience)의 공유라는 상황을 만들어 내지만, 성원들은 아직 그로부터 서로에 대한 동료 의식을 얻고 있지는 못하는 상태의 집합체’라고 변형될 수 있다. 생애 경험의 공유라는 상황이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성원들은 결국 자신들이 모두 동일한 상황 속에 놓여 있으며, 그로 인해 유사한 경험들을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데, 그러면 벌써 이들은 서로를 확대된 자아로 인식하기 직전의 단계까지 간 셈이다. 범주에 이미 동일시의 잠재력이 탑재되어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


결국, 범주의 규정과 유지는 범주 규정자의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범주 규정자가 갖는 권력과 제도적 권력 수단 없이는 범주의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주가 집합체로서 장기적 존속성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베버적 의미에서 권력의 권위로의 전환, 즉 권력의 정당화가 필수적이다. 이것은 범주가 갖는 동일시 잠재력의 실현에는, 위로부터의 필요성에 의해서든 아래로부터의 필요성에 의해서든, 범주 규정자의 성격 전환이 관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성격 전환은 진화론적, 자연발생적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원들과 범주 규정자간의 정치적 상호작용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범주 규정자의 성격 전환이 이루어지고 나면, 성격 전환된 범주 규정자의 정치적 프로젝트 또한 범주의 규정과 유지가 아니라 집합적 정체성 형성으로 전환된다.


범주가 집합체로서 장기적, 안정적 존속성을 보장 받는 길은 궁극적으로는 ‘외부적 권력에 의해 규정된 집합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일, 즉 권력의 정당화이자 범주의 집단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집합적 동일시를 이루어 성원들이 서로를 그리고 범주 자체를 확대된 자아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 뿐이다. 그러나, 범주는 범주 자체로서도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대외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범주의 안정성이 성원들로부터 확보될 수 없는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그것은 다른 집합체들과의 대외적 관계로부터 추구될 수밖에 없다. 앞서 본대로, 범주는 생태학적 환경 속에서 자원의 확보를 위해 다른 집합체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으며, 이 경쟁은 범주들간 관계의 불안정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경쟁’ 관계라는 것이 항상 ‘상호 파괴’의 관계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 범주들은 경쟁적 파국이 아니라 경쟁적 공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것은 무차별적 경쟁의 파괴적 속성을 인식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 의하여 가능하다. 범주적 안정성은 대외적 관계의 안정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범주의 정의상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2. 집합적 동일시

동일시는 동일시 주체가 동일시 대상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이 행위와 태도의 기준이라는 측면에서는 적절하고 물질적 측면에서는 유익해야만 가능하다 . 그렇다면 우선, 집합적 동일시에 있어서 동일시의 주체는 누구이고 동일시의 대상은 누구(혹은 무엇)인가? 주체는 집합체의 개별 성원들이며, 대상은 집합체 내의 다른 성원들과 전체로서의 집합체이다. 개별 성원들은 다른 성원들과 전체로서의 집합체를 모두 동일시 대상으로 삼으며, 실제로 이들에 대한 동일시가 이루어지면 동료 성원들과 집합체가 자아의 연장으로 간주되고, 그러면 ‘성원들간의 호혜적 인식’과 ‘집합체에 대한 소속감’의 합인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된다.


동일시 형성의 첫 번째 요건인 ‘경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원들이 전체로서의 집합체를 경험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범주 규정에 관한 부분에서 보았듯이, 범주 규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범주의 제도적 체계가 성원들 삶에 체계적으로 개입해 들어오면서 성원들간의 생애경험 공유라는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비록 그것이 범주 국면에서는 부정적인 경험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성원들이 집합체를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범주 규정자의 성격이 권력적 행위자에 권위적 행위자로 바뀌면, 이 경험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바뀐다.


성원들간의 상호적 경험에 대한 설명은 약간 복잡한데, 이 문제의 핵심은 성원들이 권위적 행위자로 성격이 전환된 범주 규정자는 전체로서의 집합체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범주든 집단이든 그 규모가 일정 정도 이상인 한, 개별적 성원들이 서로를 모두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집단에서는 서로를 직접적으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동료 성원들간에도 마치 서로에 대한 오랜 경험을 공유한 것과 같은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가능하다. 집단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전체로서의 집합체에 대한 경험과 성원들간의 상호적 경험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범주가 집단으로 전환되면, 범주 규정자는 ‘성격 전환된 범주 규정자’가 된다. 이전과는 달리, 물론 정치적 압력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범주 규정자는 성원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을 경험하기에 유익하고 적절한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성격 전환된 범주 규정자는 자기 집합체를 정당하게 대리하는 ‘집단 대표자’(group representative)가 된다. 집단 대표자는 원칙적으로 개별 성원들 모두의 이해와 요구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집단 내 모든 개인들은 집단 대표자를 자신의 확대된 자아로 간주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성원들 각자가 집단 대표자를 경험하면, 그것은 성원들이 서로를 모두 경험하는 것으로 정서적 치환이 이루어진다. 집단 대표자는 전체로서의 집단의 대표자인 동시에 집단 내 모든 개별적 성원들의 대표자이기도 하므로, 집단 성원들간의 상호적 경험은 이렇게 집단 대표자에 대한 경험을 통한 매개적 경험 형태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전체로서의 집단에 대한 경험과 성원들간의 상호적 경험은 집단 대표자에 대한 경험을 통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 경험의 유익성과 적절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범주 규정자로부터 집단 대표자로 성격 전환이 이루어지고 나면, 집단 대표자는 정당화를 통한 안정성 확보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성원들과 자기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집합적 동일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집단 대표자가 구성원들에게 자기 자신이 행위와 태도의 준거로서 적절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얼마나 잘 설득시키는가, 그리고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물질적 유익함을 제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집합적 동일시에는 상징적 과정과 물질적 과정이 개입된다 .

3. 집합적 정체성 교섭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나면, 한 집합체는 단일의 행위 단위, 즉 하나의 사회적 행위자가 된다. 이 때, ‘사회적’이라는 용어는 그 행위자가 복수성의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하나의 집합적 행위자는 다른 사회적 행위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사회적 행위자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사회적 상황 속에서는 스스로의 정체성 주장 못지 않게 그렇게 주장되는 정체성에 대한 다른 행위자들의 반응 또한 중요하다. 한 행위자의 정체성에 대한 타자들의 인정 없이는 그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다. 한 집합적 행위자가 형성한 정체성의 사회적 수용 과정인 집합적 정체성 교섭은 범주 규정 – 집합적 동일시 – 집합적 정체성 교섭으로 이어지는 집합적 정체성 구성의 과정을 완결짓는다.


더구나, 한 집합체의 정체성은 정체성 교섭 과정을 통해 더욱 공고화된다. 내적으로는 다양성을 허용하지만 외적으로는 유사성과 통일성을 유지하는 집합적 정체성이라는 가면(정호영, 2001: 33, 60-62)은 관객들 앞에서는 더 이상 가면이 아니다. 공연자가 가면 자체가 된다. 공연자는 관객 앞에서 오로지 그 가면에 의해서만 존재를 인정 받을 수 있으므로, 그는 그 가면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다.

집합적 동일시를 형성한 한 집합체가 정체성 교섭 과정에 들어가면, 그 집합체는 자신의 정체성이 다른 집합적 행위자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인정되지 않더라도 곧장 새로운 정체성 구성에 돌입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경향을 갖는다. 정체성 수정(identity revision)은 그 정체성이 명백히 부적절한 것으로 증명되거나, 지속적으로 보상을 제공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경우에만 일어난다는 지적(Bloom, 1990: 39; Jenkins, 1996: 95)은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만, 특히 집합적 정체성에 관해서는 그 적실성이 더욱 커진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될 수 있다.


먼저, 집합체는 상징적, 물질적 측면에서의 동일시라는 과정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갖는다. 개인이 한 번 구성된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구성하는 것이 그렇듯이, 집합체도 이미 구성된 집합적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집합적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일단 부정하고 새로운 존재를 다시 구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한 집합체가 기존의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생명을 한번 부정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부정하는 일이 어렵듯이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개인이나 집합체는 자신의 사회적 생명인 자아나 집합적 정체성을 부정하기 힘들다. 게다가, 집합적 동일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의 장기간에 걸친 상징적, 물질적 분투의 과정을 다시 반복하는 일은 집합체에 의해 언제나 회피하고 싶은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이 이미 형성한 정체성을 인정 받기 위해 다른 집합체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투쟁하는 것이 저항 없이 수용될만한 새로운 대안적 정체성 형성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쉬운 선택인 것이다.


다음으로, 집합적 정체성은 제도화의 경향을 아주 강하게 가지며, 이 제도화의 경향은 일단 형성된 정체성은 지키고자 하는 구조적 관성(structural inertia)을 만들어낸다. 집합적 정체성은 그 안에 이미 제도화의 수단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정체성을 영속화하고자 하는 주체들의 의지이다(Hall, 1999: 37). 집합적 정체성 제도화의 출발점은 성원들 행위의 습관화(habitualization)와 일상화(routinization)이다. 동일시를 형성하면, 그 동일시를 공유하는 성원들은 동일한 습관화된 행위 유형을 공유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이 하는 행위의 공유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기 시작하고, 그 행위에 대해 동일한 용어들로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습관화와 일상화이다. 습관화되고 일상화된 행위 유형을 공유하는 일이 어느 정도 지속되면, 그 행위 유형은 역사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은 그 행위 유형을 올바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당연시되는 사회적 속성의 하나로 제도화된다. 일단 집합적 정체성이 제도화되고 나면, 제도가 현실이 되어 사람들의 존재를 규정해나가기 시작하면서 제도와 조직을 동일시의 원천이자 동일시의 장으로 만든다. 사실, 사회화 과정 속에서 우리가 공리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회 세계도 제도화된 관행들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Jenkins, 1996: 128-129, 133-134).


사회적 생명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존재의 연속성 추구 경향과 제도화가 낳는 구조적 관성 때문에, 집합체는 한 번 구성한 정체성은 그것이 명백히 부적절한 것으로 증명되거나 지속적으로 보상을 제공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될 경우가 아니면 쉽사리 버리거나 수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명백히 부적절한 것이거나 지속적으로 보상을 제공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어떤 정체성이 폐기되거나 수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 정체성이 명백히 부적절한 것이거나 지속적으로 보상을 제공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는 상황은 어떤 것일까? 내적으로는 혁명 같은 급격한 사회 변동, 외적으로는 전쟁 같은 대외적 관계의 격동 같은 상황들이 한 집합적 정체성의 지속성을 위협한다.


범주 규정이나 동일시 국면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국면에서도 정치적 변인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집합적 정체성 교섭 국면에서도 관련 행위자들은 평등한 시장 관계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기초 위에서 상호작용하고, 이에 따라 교섭 단계에서도 역시 부과와 저항, 요구와 역요구 같은 정치적 관계들이 불가피하게 개입되는데, 이 때 고려해볼 수 있는 관계의 유형은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먼저, 권력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집합체는 그렇지 않은 집합체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쉽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강요할 수도 있다. 반면, 권력 관계에서 열세의 위치에 놓인 집합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집합체들에 부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도출해내기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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