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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를 하는 행복한 글쟁이 김훈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2.10.25일 22:38

젊은 시절의 김훈.



인터뷰를 앞두고 그에게 그간 창작한 작품명단과 수상경력 등을 부탁했다. 그는 지난세기 80년대 조선족문단에서 내노라 했던 글쟁이이었다. 그럴지라도 나중에 글자가 빼곡히 적힌 A4용지를 무려 18페이지나 받고 일순간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재기사라는 작은 소쿠리 하나에 어느것부터 또 어떻게 주어 담아야 할지 망연했다.

이러니저러니 김훈에게는 작가라기보다 잡가(雜家)라는 이름이 걸맞을것 같았다. 그는 소설가, 연극작가, 영화작가, 칼럼니스트, 방송기자 등 수두룩한 명찰을 달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있던 그런 글쟁이의 이미지를 마구 헝클어뜨리고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수두룩한 명찰에도 불구하고 시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듯 하였다. 작품집은 십여권이나 되였지만 시는 단 한수도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첫 작품은 후날 이름을 날리게 된 극본도 소설도 아닌 시였다고 한다.

“시로 시작했다구요? 그럼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게 아닙니까?”

솔직히 누구라도 선참 떠올리게 되는 물음이 아닐지 한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중국 조선족시단에서 거두로 평가받는 김철시인이기때문이다. 그런데 글의 화제에 아버지가 오르자 김훈은 별로 달가운 기색이 아니였다. 후문이지만 그에게 아버지는 마냥 긍지를 느끼면서도 또 제일 꺼리는 명사였던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더군요. 아버지가 너무 유명해서 그런것 같아요.”

아버지의 이름과 한데 이어놓을 때면 김훈은 어쩔수 없이 김철시인이라는 이 거목의 그림자에 묻히는 왜소한 아들의 자기를 새삼스레 느껴야 한단다.

사실 그가 글을 시작할 때 아버지가 그에게 준게 있었다면 반동의 자식이라는 이름뿐이였다. 김훈이 첫 작품을 쓸 때 아버지는 “반동학술 권위”요, “조선특무”요 하는 감투를 쓰고 수감되여 있었다. 김훈은 반동의 아버지때문에 주위에서 따돌림을 받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때는 누구도 웬만하면 빠질수 없었던 생산대의 회의에 참석할 자격조차 없었다고 한다.

1970년 김훈은 열다섯 나이에 그 시절 숙명처럼 밟아야 했던 지식청년의 하향 코스로 시골에 내려갔다. 그는 시골에서 대부분 시간을 내처 소를 기르는 사육원으로 보냈다. 자그마한 사육장에는 늘 그 혼자 외롭게 소들을 동반하고있었다. 말동무할 친구도 없었고 읽을 책도 없었다.

“그냥 심심해서 시를 썼지요. 소를 살찌우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첫 작품 사양원의 노래는 그렇게 우사간에서 소가 여물을 반추하는 소음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시는 문화혁명기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출간한 시집 “태양의 빛발아래”에 수록되였다.

물도 곬을 찾아야 큰 강에 흘러든다. 비록 시로 문단에 등단할 때 시인인 아버지가 곁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때부터 시작되는 그의 창작생애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고무지우개처럼 모조리 지운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의 작가 지망생의 꿈은 멀리 어린 시절부터 싹을 틔운것이였다. 벽을 가득 채운 아버지의 책궤에는 도서관에도 보기 힘든 책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그때로서는 금물인 애정시집들을 넣은 책궤에는 자물쇠를 달고 어린 아들을 위해 따로 자그마한 책궤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책의 훈훈한 향기 속에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은 언제인가부터 김훈의 머리에 똬리를 틀었던것이다. 그의 첫 작품이 소설 아닌 시라는것에 능히 리해를 할수 있는 부분이다.

후날 연변대학에 입학한후에도 김훈은 부지런히 시를 썼다. 그러자 주변에서 이런저런 추측이 란무했다. 시인인 아버지가 직접 써주었거나 적어도 어딘가 손을 봐줬다는것이었다. 그맘때 김철시인은 마침 출옥한 상태였고 집에서 무직자로 있었다.

아버지의 명성이 자기에게 압력을 갖다 준다는것을 절감한 김훈은 부친의 세계를 멀리 떠나는것을 선택한다. 젊은 오기라고 할까, 반발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때부터 김훈은 시에 아예 머리를 돌려버리고 아버지와 다른 외도를 내처 달린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아버지 김철시인의 첫 작품은 시가 아닌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로 등단한 시인 아버지와 시로 등단한 소설가 아들이 그야말로 한편의 영화같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것이다.

대학을 졸업한후 김훈은 길림성 룡정시 예술단창작실에 전속작가로 배치되였다. 그는 여기에서 연극 "두부장사"를 내놓아 연극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때는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라 연극계는 아직도 옛날의 좌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연극 “두부장사”는 골목에서 두부를 파는 최하층 서민의 생활모습을 그린 작품으로서 연극계에 대뜸 신선한 돌풍을 몰아 왔던것이다.

이때 김훈은 집 없는 집시이였다. 일년 열두달에서 장장 열달은 집을 나와 있었던것이다. 작가모임, 생활체험 등 그의 바깥생활은 도무지 끝을 몰랐다. 그는 결혼후에도 기회가 생기면 방랑객의 이런 행보를 절대 멈추지 않았다.

한국 작가 박경리 저택에서



“그게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요. 지금은 꿈에도 바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현재 중국조선족 작가군은 거개 경제여건이 어려운 형편이다. 독자가 중국 200만명 조선족들에게 제한되여있으니 말이다. 그만큼 공비(公費)나 사재로 중국 전역을 답습한다는건 하늘의 별을 따기이다.

아무튼 김훈은 계획경제시대의 행운아로 되여 인간과 사회라는 큰 바다에 여한없이 몸을 담을수 있었다. 작가로서 풍부한 경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후 김훈은 북경영화대학 씨나리오작가반에 다니게 된다. 그때 영화대학에는 도서증이 하나 있었는데 김훈은 그것을 빌어 북경도서관을 뻔질나게 나들었다. 하루가 멀다하게 도서관에 다니다 보니 도서관리원의 얼굴을 익히게 되였다. 그 덕분에 책들을 한번에 30권씩 한달동안 빌수 있게 되였다. 김훈은 방학기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책더미에 파묻혔다.

영화대학은 김훈에게 잊지 못할 락인을 찍어주었다. 바다우에 일엽편주처럼 떠돌던 배가 대안을 찾은 셈, 후날의 창작에 리론바탕을 마련하게 되였던것이다.

1987년 연변연극단에서 공연한 대형 연극 “망각된 인간들”은 그런 신선한 느낌과 다른 시각에서 만든 작품이었다. 극은 인간의 력사박물관이라고 할수 있는 정신병원을 무대로 삼아 펼쳐진다. 어느 시기인가 정신세계가 붕괴되여 정상적인 사유를 멈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정신병원이다. “정상인도 때때로 정신병환자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단 통제력이 있기때문에 정상인인 거지요.”

김훈은 지나온 력사를 정신병환자를 통해 조명하면서 사람들 모두가 자기의 정신세계도 한번쯤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이 연극의 대본을 쓰게 되였다고 말한다.

후날 이 연극은 한어로 번역되어 한문(漢文) 간행물에 실리고 관련기사들도 줄을 이었다. 나중에 이 작품은 전국 소수민족제재의 연극 평의에서 은상을 받았으며 중국인 평론가들로부터 김훈의 연극 가운데서 가장 연극 같은 연극이라고 평을 받는다.

그런데 당시 연변에서 선전을 책임진 “어르신”이 개혁과 개방이 잘 되여가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 사람들이 다 정신병자라는게 제 정신이냐? 라고 하면서 현지에서 공연을 금지시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극단 단장은 별수 없이 단장 자리를 내놓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는것이다. 글쟁이가 “정신병자”로 취급되여 난데없는 “수술대”에 오르내려야 하는 “정신병원”의 단면도라고 하겠다.

글쟁이의 행보는 산악인과 마찬가지로 그런 가시덤불때문에 멈춰지는게 아니다. 지난 세기 80-90년대 김훈이 창작한 작품은 그야말로 쏟아지는 봇물을 방불케 한다. 이 기간 작품집도 중, 단편소설집, 연극집, 씨나리오집, 기행문집 등으로 그의 다양한 창작양상을 일각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한다. 김훈이 창작한 소설, TV드라마, 대형 무용극, 연극은 줄줄이 상을 받아왔다. 대형연극 “시름거리 웃음거리”, “망각된 인간들”, TV드라마 “민들레꽃”, 단편소설 “희로애락”, 소설집 《청춘략전》, 연극집 《김훈연극집》, 대형무용극 “백두산천지 전설”, 등은 중국소수민족 우수창작상, 중국 제1회 무용극 1등상, 중국연극진흥상, 길림성 예술작품 1등상, 연변연극제 우수창작상, 연변 진달래상,연변예술제 창작 1등상수상, 작품명은 둘째 치고 상패이름을 적기에도 뻐근할 정도. 김훈 그 자신도 전국청년작가상, 연변 우수작가, 길림성로력모범 등 상패와 칭호를 수여받는다.

한국 해인사를 찾은 김훈부부.



북경의 중국국제방송국으로 전근한후 김훈은 부득불 글쓰기에 한동안 제동을 걸어야 했다. 여직까지 부딪치지 못했던 난사(難事)가 일거에 들이닥쳤던것이다. 한때 집이 없어서 네 식솔이 침대 하나에 매달려야 하였고 또 왕복 수십리나 되는 출퇴근에 엄청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야 했다. 더구나 국제방송국은 뉴스와 시사보도가 위주이며 그마나 번역이 주종이여서 글쟁이가 글재주를 마음껏 부릴수 있는 무대가 아니였다. 말은 나면 제주도에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에 보낸다고 하지만 북경의 방송국 생활은 글쟁이 김훈에게 자의든 타의든 글의 세계를 떠난 외도가 되고 있었다. 워낙 술을 좋아했던 그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떠날 줄 몰랐다. 귀찮은 세상만사를 잠시라도 술에 묻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인제 펜을 꺽은게 아닌가? 새도 날아가면 울음소리를 남긴다는데” 오래동안 작품이 보이지 않자 항간에는 엉뚱한 소문이 나돌았다. 김훈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아직 마음의 짐을 홀가분히 내려놓을수 없는 자신을 원망할수밖에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작가로서의 저의 존재를 알릴 필요를 절박하게 느꼈습니다.”

그동안 “또 하나의 나”는 모진 산통을 호소하고있었다. 김훈은 집이 조금 자리를 잡자 인차 원고지를 펼쳐놓았다. 한 인간의 두 가지 모습을 그린 소설 “또 하나의 나”는 북경에 온후 그렇게 어렵사리 작품으로 완성된다. 이 작품은 렬악한 창작환경의 나방에서 어렵게 탈피를 시도하는 김훈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그린듯하여 더구나 감동이 피부에 닿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로부터 시작된 김훈의 창작생활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는다. 후날 책자로 출판된 계렬소설 “수도권의 촌놈”들은 북경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의 군상을 다루고있다. 북경의 외도 생활은 종국적으로 글쟁이의 작품에 개개의 글자로 녹아들고있었던것이다. 중국조선족의 순수 문학지는 정기간행물 《연변문학》, 《도라지》, 《장백산》으로 요약할수 있는데, 김훈의 작품은 불과 삼년동안 이 세 간행물의 최고상들을 모두 석권한다. 이런 작품과 상은 잠깐이나마 실추되었던 김훈의 명예를 회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네의 글재간이 하나도 죽지 않았더구만. 참 놀라웠어.”

고향 연변의 필우로부터 전화가 련이어 날아들었다.

김훈은 마침내 북경에서 창작의 새로운 도약을 이뤘던것이다. 궁극적으로 중국 조선족문단의 유명한 소설가, 극작가로 자리매김을 한 그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에 이른다.

이 미국방문을 계기로 김훈은 약 10년전부터 해마다 미국나들이를 하고있다. 외국려행의 랑만은 자칫 글의 또 다른 외도에 빠진듯한 그에게 색다른 글감을 주었다. 무려 25만자에 달하는 “미국견문록”은 그렇게 세상에 고고성을 터뜨렸다.

김훈은 그저 글이 좋아서 글속에 묻혀 산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길고 긴 글쟁이의 터널을 40여년 동안 쉼 없이 부지런히 달려왔지만 아직도 얼마나 더 가야 끝날지 알수 없다는것이다. 그는 그냥 술을 마시면서 담소를 즐기듯 글 쓰는걸 인생과 대화할수 있는 행복으로 간주하는 사람이였다. 아직도 날마다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는 그에게 “글쟁이는 자기가 심은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격언의 참뜻을 되새기게 한다

중국국제방송국 김호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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