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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허수아비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1.15일 11:18

나는 가을바람에 소매자락 펄럭이는 허수아비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있다.

쌀독에 거미줄치던 가난한 세월에도 해마다 기대가 부푸는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이면 우리 마을에서는 논과 조이밭에 김삿갓이나 할머니를 닮은 허수아비를 내세우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날새들로부터 곡식을 지킨다. 밤이면 개간지 감자밭에서 화약총을 쏘면서 메돼지를 쫓는다. 한줌도 안되는 곡식을 놓고 사람과 짐승이 피비린 쟁탈전을 벌이는데 흉년드는 해일수록 목숨걸고 달려드는 날짐승들을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 세월에 쪼들리고 짐승에게 개평당하고 남은것이 얼마더냐? 감자밭에서 메돼지가 먹다 남은 새알감자를 주을 땐 분통이 터진다.

농사가 흉년이면 산열매는 풍년이라는데 산에 흔해빠진 도토리를 두고 왜 감자밭에 달려들어 묵사발을 만드는지.산에는 메돼지가 살판치고 들에는 새떼가 날아들어 기대하던 탈곡이 끝나면 먹을알이 별로 없었다. 해마다 북데기만 차례지다보니 이사짐을 싸는 집들이 늘어났다.

짐승과의 대결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사명이였다. 민병들에게 맡겨진 준엄한 사명이요, 적극분자들을 고험하는 시금석이 되였다. 당시 민병패장이던 나는 밭에 줄총을 놓고 조이밭에 빈깡통을 달아놓아 바람에 흔들리게 하였다.

우리는 38식보총을 메고 감자밭에 가서 밤을 지새우군 했다. 부녀대장 겸 민병부패장인 미옥이는 사격술이 전 공사에서 손꼽히는 처녀다. 무쇠처녀라고 소문난 그녀가 밭머리에서 남자들과 씨름을 할 때는 녀자인지 남자인지 분간못한다. 남자들도 싫어하는 곰바위골 감자밭에서 보초를 서겠다고 따라나서는게 기특하다 할가 고맙다고 할가. 인적없는 고요한 산속에서 미옥이와 단둘이서 긴긴밤을 함께 한다는게 한없이 기뻤다.

서리찬 하늘에 찬별들이 깜박이는데 고요한 산속 캄캄한 밤나무밑에서 나와 미옥이는 나란히 엎드린채 메돼지들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며칠째 기다렸건만 메돼지는커녕 쥐새끼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가랑잎을 담요처럼 푹신하게 깔고 처녀총각이 붙어있노라면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며 싱숭생숭해난다. 어둡기전에는 걸죽한 롱담에 호랑이도 때려잡는다고 큰소리치던 미옥이가 밤이 깊어가자 부엉이 울음소리에도 내곁으로 바싹바싹 다가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갑자기 밭머리에서 한쌍의 반디불이 반짝인다. 이어 덩치 큰 검은 물체가 움직이는것이 어렴풋이 안겨왔다. 분명 메돼지였다. 내가 한창 총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메돼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있는데 갑자기 미옥이가 내 가슴팍을 마구 파고들지 않는가! 순간, 온몸이 찡해나면서 뜨거운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심장이 벌렁벌렁 밖으로 튀여나온다.

메돼지가 다가올수록 미옥이는 더욱 내 품속을 파고들었다. 나의 몸도 순식간에 불덩이로 달아올랐다. 나는 메돼지고 총이고 구중천에 팽개치고 미옥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응석부리는 그녀의 입술을 찾아서 벼락키스를 퍼부었다. 미옥이는 얼떨결에 입술을 빼앗기고 내가 하자는대로 몸을 맡기는것 같았다. 내손이 허우적거리며 그녀의 젖가슴을 찾았고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내 손을 꽉 깨물었다.

발정난 메돼지처럼 온몸이 불덩이가 되여 발광하는 나를 물리치지도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던 그녀는 내 입을 막느라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린다. 뒤에는 성나 씩씩거리는 메돼지요, 앞에는 발정난 청춘이라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놓인 미옥이의 처지는 얼마나 딱했으랴? 미옥이가 어느결에 총을 잡았는지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땅!! 벼락치는 총소리에 화들짝 놀란 내가 벌떡 일어섰고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빛속에 메돼지도 어데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냘픈 어깨를 들먹이는 미옥이앞에서 나는 후회막급이였다.

생각지 않게 미옥이를 품에 안았다가 하루밤새 낯 못드는 죄인이 되였다. 실성한 사람처럼 온 하루 집에 들어박혀 한숨만 펄펄 쉬는데 미옥이가 찾아왔다. 메돼지가 살판치겠는데 빨리 산으로 가자고 재촉한다. 어제 일은 벌써 까맣게 잊었는가? 우리는 이렇게 산돼지를 쫒다가 사랑에 빠져들었다.

사래긴 조이밭에서 꽹과리를 두드리는것은 새가 아닌 사람을 쫓는것이다. 둥당 짱! 꽹과리를 한번 울리고는 입을 한번 맞추고 두번 울리고는 입을 두번 맞춘다. 토실토실한 감자를 입김으로 훌훌 불면서 껍질을 발라주던 미옥이가 한없 이 그립다.

내가 추천을 받아 대학에 가게 되자 미옥이는 칠색무지개를 수놓은 꽃쌈지와 목달개를 주며 춘향의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나는 곰바위골 감자밭에서 맺은 참사랑에 충성할것을 골백번 맹세했다. 그런데 정작 학교에 가보니 세상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졌다. 시골처녀인 미옥이가 점점 화분없는 꽃으로 보였다. 첫사랑 맹세를 저버렸지만 미옥이는 한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의 집에 자주 들러 늙으신 부모님에게 정성을 다했단다. 그러는 미옥이가 두려워서 나는 방학에도 감히 집으로 가지 못했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던 해 미옥이는 간다온다는 기약도 없이 고향을 떠나버렸다.

내가 없는 고향의 들판에서 내가 만든 허수아비와 동무하던 미옥의 입에서는 소태처럼 쓰거운 열물이 돋아나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졌을것이다. 첫사랑을 배반한 내가 얼마나 괘씸했으면 속지없는 편지봉투에 조이밭 외로운 허수아비를 그려 마지막 편지로 보냈을가? 나는 허수아비를 볼때마다 누군가 나를 비웃는것 같아서 얼굴을 들수 없었다.

미옥이와 헤여진지도 어언 반세기란 세월이 흘렀다. 인젠 그녀의 눈에 허수아비가 보이지 말것과 나의 머리속에 속이 텅빈 허수아비가 남아있지 말기를 바랄뿐이다.

사랑을 배반한 사람은 승자가 아닌 영원한 패자이다. 내 추악한 령혼이 새겨져있는 허수아비는 오늘도 내 눈앞에서 흐물거린다.

● 리태근(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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