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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가 활성화되려면 은행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북한 은행은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주민으로부터 신뢰를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은행이 신뢰를 받던 시절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신뢰마저 깡그리 잃어버린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다.
당시 은행은 주민들이 저금을 찾으러가면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몇 년 동안 지급을 거부했다.
이러는 사이 북한돈 가치가 급속히 하락했다. 분명 저금할 때는 쌀 1㎏에 북한돈 5~6원이었는데 돈을 못 찾고 있던 몇 년 사이 쌀값이 120원 선까지 올라버린 것이다. 애써 저금한 돈은 휴지조각이 됐다.
그때 잃은 신뢰는 지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지금도 은행에 돈을 저금하라고 부추기면서 저금한 사람에 한해 ‘인민생활공채’라는 북한판 ‘로또’도 도입했지만 북한 주민은 콧방귀를 뀌고 있다.
인민반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강제로 저금을 독촉하면 주민들은 마지못해 잠깐 소액을 저금했다 한 달도 안 돼 다시 찾아온다. 은행에 맡긴 돈은 자기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은행장 좋은 노릇을 할 이유가 있느냐”는 불만도 많다. 요즘에는 대다수 은행장이 자기 은행에 저금시킨 돈을 장사꾼에게 불법적으로 높은 이자율로 빌려주어 회전시킨 뒤 여기서 나오는 이자로 먹고살고 있다.
은행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것은 아니다. 공장, 기업소의 월급을 지급하고 기업에 대출해주는 기능은 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을 상대로 한 영업은 거의 못하고 있다. 그나마 있어봤자 저금을 받는 것뿐 지역 간 송금 서비스 같은 것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장사를 하려면 송금 서비스가 필수적이다. 은행이 해주지 않는 이 부분을 이제는 개인 스스로 해결하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실례로 평양과 신의주에 각각 A, B라는 장사꾼이 있다. 신의주에 사는 B는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들을 평양의 A에게 보낸다.
앞서 말했듯이 요즘에는 운송의 정확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B는 자신이 직접 평양에 가지 않고 열차를 통해 물건들을 수하물로 보낸다. 이것을 북한에선 ‘올리 쏜다’고 표현한다.
A는 이 물건들을 장마당에 ‘먹인(넘긴)’ 뒤 판매대금을 다시 B에게 보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돈을 수하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돈 전달을 남에게 부탁하기도 쉽지 않다. 자신이 매번 돈을 갖고 신의주로 갈 수도 없는 일이다.
이래서 등장한 것이 ‘이관집’이다. 이관집은 물건을 전문으로 ‘올리 쏘는 집’이나 ‘내리 쏘는 집’을 말한다.
A는 평양에서 신의주로 물건을 계속 ‘내리 쏘는’ 집을 찾으면 된다. 이 집은 신의주에서 거래 대금을 받아야 할 집이기도 하다. B가 신의주의 이관집에서 돈을 받는 것만큼 A는 평양에 있는 이 이관집의 대방에게 돈을 넘겨주면 된다.
돈 거래가 정확히 됐는지는 전화로 바로 확인이 된다. 때에 따라서는 A가 직접 이관집이 되기도 한다.
이 방식은 국가 간 불법 돈 거래 방식인 ‘환치기’나, 이슬람식 거래 방식인 ‘하왈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관집’에는 일반적으로 수수료가 없다는 것이다.
ㄱ이라는 지역에서 사는 사람이 ㄴ이라는 지역으로 갔다가 급히 큰돈이 필요한 경우에도 ㄱ지역과 거래하는 이관집을 찾으면 된다. 이관집은 장마당에서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 집에 이관집의 대방을 찾아가 얼마를 넘겨주라는 전화를 한다.
거래가 성사되면 즉시 전화로 서로 확인한 뒤 넘겨준 액수만큼 ㄴ지역의 이관집에서 받으면 된다.
카드 한 장이면 어디 가서나 돈을 뽑아 쓸 수 있는 남한에서 볼 때는 이런 상당히 복잡한 거래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은행이 제구실을 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이것이 최상의 돈 거래 방식이다.
그나마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런 방식이 퍼져 있기에 망정이지 이전까지는 북한 주민이 허리에 거액이 든 돈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했다.
북한에 등장한 이관집이라는 원초적인 돈거래 방식은 최근 들어 점차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거래수수료라고 할 수 있는 ‘이관비’를 받고 전문적으로 돈을 송금하는 집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영업형태는 주요 도시들에 믿음직한 거래 대방만 있으면 가능하다. 현재 시세로 이관비는 북한돈 100만원당 5000원 정도라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관집 거래에서 외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한돈은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한 배낭을 담아도 달러로 한 묶음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중국 위안화나 달러로 결제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지방별로 보통 북한돈 대 외화의 환율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환차익은 서로 보상해주어야 한다.
(이 글은 북한에서 화폐교환 하기 이전인 2009년에 작성된 것임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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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주성하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