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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항일투사 33인] 민족사랑·한글사랑 이극로

[온바오] | 발행시간: 2013.07.07일 20:18
한글학회 연구위원, 박용규(朴龍圭)

▲ 이극로

일제강점기 14년간 조선어학회를 운영하면서, 우리말의 규범을 수립하고 우리말 큰사전 편찬에 헌신한 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조선어학회의 주모자여서 일제로부터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함흥감옥에 복역하다가 해방 이후에야 풀려난 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해방 이후 한자폐지실행회를 조직하여 한글전용의 국어정책을 세운 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이 분이 바로 경남 의령 출신의 고루 이극로 선생입니다.

필자는 이극로(1893-1978)가 한국민족을 위해 남긴 업적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중국과 유럽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29년 귀국한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우리말을 사수하는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 한글전용운동과 민족통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중국과 유럽시절의 독립운동

이극로는 1893년 8월 28일에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827번지에서 태어났다. 빈농 출신인 그는 농사에 전념하면서 마을 서당인 두남재에서 6세에서 16세까지 한문 교육을 받았다. 17세에 국권회복을 내세운 단체인 대동청년단(1909)에 가입하였다. 마산 창신학교 시절에 일제에 의한 한국병탄을 알게 되었다. 1911년 독립군이 되려고 만주로 갔다.

서간도 회인현에 있는 독립운동가이며 대종교의 간부인 윤세복을 만나 그의 집에 거처하며, 그를 도와 동창학교의 교원으로 있었다.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4년 회인현에서 이극로는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를 만났다. 이후 그와 계속 관계를 맺으며 독립운동을 함께 하였다. 1915년 1년 동안 무송현의 백산학교에서 독립군을 육성하면서, 이진룡·홍범도 등이 조직한 포수단에 가담하였다. 포수단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는 상해에 있는 동제대학을 다니면서 상해 유학생 총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을 돕는 활동을 하였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인류학·언어학도 공부하였다. 1927년 5월에 철학박사(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이 대학에서 1925년 전후 3년간 조선어강좌를 개설하여 유럽인에게 우리말과 한글을 가르쳤다.

▲ 베를린대학 박사학위를 받고 (왼쪽이 신성모, 가운데가 이극로, 오른쪽이 안호상. 사진은 이승철 교수 제공)

유럽시절 이극로는 항일 독립운동에도 열성적이었다. 1923년 이극로는 독일의 동포들과 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1927년 이극로는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 단장으로 참여하여 이미륵, 김법린, 황우일, 허헌 등과 함께 일제의 식민 지배를 성토하였다.

한편 저술을 통해 그는 일제의 폭압통치를 비판하였다. 1924년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을 저술하여 일제의 강압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홍보하였다. 1927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조선의 독립투쟁(Korea und sein Unabhängigkeitskampf gegen den japanischen Imperialismus)을 발간하여, 일제에 저항한 한국인들의 독립투쟁을 상세히 알렸다.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던 시절, 그는 과거 독일과 영국이 각각 폴란드와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했을 때 폴란드말과 켈트어를 말살했듯이, 이들 나라를 모델로 하여 식민정책을 펴고 있던 일본제국주의자들도 조선을 지배하면서 민족말살차원에서 조선어를 말살할 것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민족의 말과 글을 영구히 지키는 한글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귀국할 때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미국을 방문하였다. 1928년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동포들 앞에서 그는 ‘국어가 민족의 생명이기에, 가장 급한 문제’라고 밝히면서,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모어가 그 민족성이 됩니다. 그런고로 모어를 잃어버린 나라는 민족성을 잃게 됩니다. 그 어머니의 말이 그 민족의 고유성을 보전하게 됩니다.”라고 모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모국어를 유지·발전시켜 민족과 민족성을 유지·보전하자는 주장이었다. 그 실현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국어사전을 편찬하자. 둘째, 국한문으로 섞어 쓰지 말자. 셋째, 순국문으로만 쓰자. 우리말대로 우리글을 쓰자. 넷째, 우리글을 가로로 쓰자.’라고 주장하였다.

미국 뉴욕 강연에서 “국어방면에서 일을 하리라”라고 포부를 밝혔다. 하와이 강연에서도 자신은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전심 갈력하겠다.”는 심경을 드러내었다. 이처럼 이극로는 국어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전개한 언어독립투쟁

1929년 1월 귀국한 이후 이극로는 반일 성향의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를 이끌어갔다. 다른 직업 없이 오로지 조선어학회의 업무에만 전념하였다. 간사장과 간사를 전담하였다.

동료학자들과 함께 민족어 3대 규범집(<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통일안>(1941))을 완성하였다. 1938년 서울 안국동 공안과에서 그는 “한글 사랑은 나라 사랑”(<경향신문>, 1990, 10, 11.)이라고 하면서, “서슬이 시퍼런 일본 제국 치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이 한글을 알아야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태연하게” 공병우에게 말하였다.(공병우,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 1989, 대원사, 78쪽.)

▲ 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1940) Ⓒ박용규 동시에 민족어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하고자 조선어사전편찬회(1929)를 조직한 뒤 1942년까지 14년간 오직 우리말사전 편찬에 헌신하였다. 1942년에 16만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의 뜻풀이가 담긴 <조선어대사전>이 발간을 앞두고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 때문에 무산되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이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간파하여, 조선어학회의 사무실을 철저히 여섯 내지 일곱 차례나 수색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조선어학회와 관련된 인사 33명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던 것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의 회원들을 검거하기 이전인 10여 년 동안,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민족주의자들의 소굴’로 파악하고 있었다. 1938년에 이미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요주의단체’로 규정하고 있었다. 조선어학회에 대해 일제는 감시와 탄압을 이어가다가 조선어학회의 회원인 정태진이 연루된 작은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조선어학회를 전면적으로 탄압하였다.

함흥경찰서에 끌려간 이극로는 “한글 운동을 통해서 조선의 독립에 이바지하려 했다.”라는 진술을 하였다. 계속해서 이극로는 “독립사상을 가지고 민족문화 재건을 위하여 하였다.”라고 말하였다.(일제 보안과장 야기의 증언) 이와 같은 이극로의 진술은 독립운동차원에서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그의 입장 표명이었다.

1942년 이극로가 진술한 이 발언은 그가 1928년 미국에서 행한 연설과 같다. 이극로의 진술을 바탕으로 일제 경찰은 조선어학회와 그 한글 운동을 독립운동을 획책한 단체요 활동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보면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의 조작과 날조 때문에 탄압 받은 사건이 아니라, 조선어학회가 언어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하였다. 일제시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극로는 일제로부터 가장 무거운 징역 6년의 판결언도를 받아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해방 뒤에 석방되었다. 이극로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한 최현배 선생은 그의 행적을 ‘일신의 안일과 집안의 이익에 급급한 현대인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을 극복해 내었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해방 이후의 한글전용운동과 민족통일운동

해방 뒤에도 이극로는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을 확립하고자 많은 활동을 하였다. 초중등 교원을 양성하고자 사범 강습회를 열었고, 국어 교과서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동시에 그는 한글전용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주국가에서는 누구나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 문자생활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국민이 있어서는 민주국가라고 볼 수 없다. 조선어학회 선각자들은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면 문맹의 타파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국민의 지식수준의 향상과 문맹 타파의 첩경은 한글 전용의 실시뿐이었다.

이극로는 한자폐지실행회를 조직하여 한자전폐운동을 추진하였다. 그가 관여한 한자폐지실행회는 초·중등 교과서의 한자 폐지와 국문전용을 실시하도록 미군정청 학무당국에 건의하여, 이를 국어정책에 반영케 하였다.

아울러 그의 진두지휘로 1947년 조선말 큰사전 1권을 발간하였다. 이제야 제대로 된 민족어사전이 나왔던 것이다.

아울러 해방정국기에 그는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일제시기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독립운동은 분단국가를 수립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통일이 되었을 때, 독립운동이 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자주적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그는 1945년 9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를, 1946년 1월 31일 통일정권촉성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6월 8일에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획책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1946년 6월 16일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을 위해 조선건민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 3월 민주주의 독립전선을 결성하였다. 1947년 6월 15일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7년 10월 민주독립당을 결성하였고,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48년 4월 건민회 대표와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평양에 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이후 그곳에 잔류하였다. 그에게 북한 잔류는 생사존망의 문제였다. 그는 1947년 7월 민족지도자인 여운형의 서거 이후 남쪽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 1939년 결혼 10주년기념으로 찍은 이극로 가족사진(이종수 님 사진제공)

북한에서도 1978년 서거 전까지 30년간 우리 말글 연구에 헌신하였다. 북한의 언어정책을 이끌어 갔고, 특히 조선어소사(1956) 편찬에 기여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역시 우리 민족을 위해 바쳤다. 1992년 북한 정권에서도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반일애국열사’로 평가하였다.

이극로의 북한 잔류와 행적을 두고 혹자는 아직도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있다.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나 해방정국기 사회주의 단체나 좌익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는 남북의 정치세력이 힘을 합쳐 대화를 통해 평화로운 방법으로 통일국가를 수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 김일성을 만난 김구 선생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듯이, 이극로 역시 독립운동가요 민족주의자였다.


우리 민족에 남긴 교훈

이처럼 이극로는 일생을 한국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운동가요 한글운동가였다. 그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정신과 생명이 있을진댄 그 민족은 영원불멸할 것이니, 또한 행복은 필연적일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극로의 우리 말글 사랑과 민족 사랑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보편타당하다. 언어는 민족의 혼을 담는 그릇이다. 현재 우리 민족의 경우 남북으로 국토, 국가, 민족이 분단되어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언어가 분단되어 있지는 않다. 일제강점기 이극로를 포함하여 국어학자들이 목숨을 바쳐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지켜냈기에, 언어의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극로의 우리말 사랑과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의 가르침을 잘 살려 남북의 동포들이 교류하고, 민족어의 연구와 계승을 통해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의 기초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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