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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시문학 무엇이 문제인가 / 신경림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12.03.22일 13:04
우리시대의 시문학 무엇이 문제인가

집으로 배달돼 오는 시집이 하루에 꼭 한두 권은 된다. 계간지 등 시 전문지에 실려 있는 시에 동인지까지를 포함하면 내가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시는 백 편을 넘는다. 부담되는 분량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읽는다. 물론 전부를 읽을 수는 없다.

시집의 경우 대표작으로 보이는 몇 편을 뽑아 읽고 전문지 등 잡지에 실린 시면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시인의 작품을 주로 읽는다. 몇 편 뽑아 읽는 것으로 치우고 마는 시집도 적지 않다. 생동감도 활기도 없는 시집을 끝까지 읽을 인내심은 내게도 없다. 그러나 시를 읽는 즐거움을 어느 정도 맛보게 해 주는 시집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정말 괜찮다, 그럴 듯하다고 생각되는 시집이면 따로 빼 두었다가 뒷날 다시 읽는다.

1년이면 이런 시집이 적어도 열댓 권은 된다. 전문지, 잡지, 동인지에서도 이런 시는 종종 발견된다. 한데 그 다음이 문제다. 가령 1주일이나 한 달 뒤 그 시집을 다시 읽으면 괜찮기는 한데 무언가 울림을 주지 못한다. 최근에 읽은 시집이 거의 그렇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우선 시를 너무 만들어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시란 쓰여지는 것이고 시인이란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시란 만드는 것, 이것이 오늘의 시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이고, 시인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고 시인이 될 수 있는 것, 이것이 재능을 의심하면서도 시를 공부하거나 계속해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의 위안이 되는 소리요, 또 부분적으로는 맞는 소리다. 조금 양보하여,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존 벤슨의 말을 인용, “시인이란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한다.”라고 말을 해도 구닥다리 소리를 면하기 어렵다.

‘왜 시인은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쌓는 훈련을 안 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한 어떤 시인의 질문이 본 취지와는 다른 쪽으로 편리하게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만들어도 억지로 만든다는 데 있다.

자연스러운 데가 없다는 뜻이다. 처음 읽을 때는 눈에 쉽게 띄지 않다가도 다시 읽으면 억지가 확연히 눈에 드러나고 또다시 읽으면 바느질 자국까지 보인다. 나 자신 높이 평가한 바 있는 꽤 반응이 좋았던 어떤 시집이 처음 읽을 때는 참 근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다시 읽으니 싫증이 나고 또다시 읽으니 지겨워졌던 근래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이것은 오늘의 우리 시에 거의 공통되는 것 같다.

젊은 시인이나 중견이나 마찬가지로써, 세상의 흐름이 튀는 쪽으로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으나, 이는 요즈음 시인들이 정말 좋은 우리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결과라는 한 평자의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한편 요즘의 시에서 리듬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들도 하지만, 이 또한 시가 자연스럽지 못한데 연유하는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시를 억지로 만들다 보니까 오늘의 우리 시 중 많은 것들이 말장난으로 시종하고 있다. 물론 시에는 말장난이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말을 가지고 하는 예술에서 말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그 나름으로 매우 의미있고 재미있는 시적 동력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말장난이라는 것이 “이걸 몰랐지”식의 천박한 발상에 그치거나 질 낮은 개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된 말장난이라고 할 수 없다. 말장난 자체가 적어도 시에 있어서라면 읽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하며 그 즐거움은 분명 천박한 발상이나 질 맞은 개그에서 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은 경험의 축적이요 그 구체화로, 말장난에도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 한데 요즈음의 시들의 말장난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삶과는 아무 관계없는 말들을 이리저리 뒤바꾸고 돌리고 비틀고 해서 말의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뿐이다. 젊은 시인이라면 모험심도 있고 감각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또 이해가 될 법도 한 일이다.

한데 나이 많은 시인들이 젊은이 흉내를 내며 경박한 말장난에 동참하는 것은 정말 역겹다. 이는 새로운 것을 향한 탐구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문학저널리즘에의 영합에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잇대어 생각나는 것이 가벼움이다. 가벼움이 우리 민족성과 맞는다는, 그래서 인터넷 시대는 바로 우리시대이기도 하다는 우스개도 있지만, 요즈음의 우리 시(시뿐 아니라 문학 전반에 걸친 현상이지만)는 너무 가볍다. 또 너무 쉽게, 너무 함부로들 시를 쓴다.

설명할 것도 없이 이는 7,80년대의 이른바 민중시의 무거움에 대한 반동의 결과라는 측면이 강하다. 민중시인이란 시 하면 얼굴부터 근엄하고 엄숙해지는 웃음이 없는 시인이란 야유도 받은 바 있지만, 사실 7,80년대의 민중시 또는 사회시로 불리는 시들은 쓸데없이 무거웠다. 분단현실을 다루지 않은 시가, 혹은 노동문제를 다루지 않은 시가, 또는 권위주의에 저항하지 않는 시가 어찌 이 시대의 시일 수 있겠는가 라는 문학 안팎의 채찍질과 서슬 퍼런 눈초리 앞에서 시인들의 상상력이 한껏 위축되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 통에 마치 위의 것들만 다루면 다 시가 된다는 잘못된 잣대에 따라 불량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기도 했다. 80년대 말, 안으로는 권위주의가 패퇴하고 밖으로는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위의 잣대는 하루아침에 폐기되고 그 자리에, 앞서의 내용을 다루지 않은 것만이 좋은 시, 나아가서 현실을 다루지 않아야 새로운 시대의 시가 된다는 통념이 들어서게 된 것이 말하자면 가벼움의 시의 출발점이 된다.

7,80년대의 민중시는 실제로 반성할 대목이 많다. 과연 그 시들 가운데서 좋은 시로 우리 문학사에 남아 독자의 사랑을 받을 시가 몇 편이나 될까. 첫 번째로 반성할 것은 일제시대의 카프 시를 거울로 삼지 못했다는 점이다. 카프 시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한 역할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많은 카프 시 가운데 오늘 우리에게 기억되는 시는 몇 편이나 되는가.

임화의 시를 제하면 박세영이나 이찬 그리고 권환의 시가 있을 정도다. 물론 임화는 말할 것도 없고 박세영이나 이찬, 권환 다 뛰어난 시인들이다.

예컨대 북쪽으로 올라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쓴 이찬의 “오오, 북만의 15도구 말없는 산천이여/ 어서 크낙한 네 비밀의 문을 열어라// 여기 오다가다 깃들인 설움 많은 한 사나이/ 들어 목메던 그 빛, 그 소리로 한껏 즐거워 보려노니”로 끝나는 「눈 내리는 보성의 밤」(1938) 같은 시는, 모든 사람들이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의 실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을 때 그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려는 노력의 시적 형상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오늘의 감각으로 보아도 결코 쳐지는 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만한 시는 그에게서조차 몇 편 되지 않는다. 사회성에 치중한 나머지 시가 갖는 말의 예술이라는 점을 소홀히 생각했던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7,80년대의 민중시 또는 사회시 쪽의 시 중 일부 시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시는 말로 하는 예술로써 사회성 자체도 명확한 말에 의해 경험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터이다.

이들 시들을 ‘사회성은 강하지만’으로 인정하면서 ‘예술성이 약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떠한 사회성도 시에 관한 한 명확한 말에 의해 경험된다는 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명확한 말에 의해 경험된다는 것이 예술성을 뜻한다면 그것은 시의 필요조건으로, 예술성이 약하다는 것은 말에 의해 경험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요, 아무리 사회성이 강해도 좋은 시로 인정될 수는 없다.

90년대의 시가 7,80년대의 이 점을 반성하고 옳은 길로 나갔다면 탓할 일이 못 된다. 예술성의 회복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7,80년대의 시에 대해서 올바른 진단이 따르지 못했고 그 처방도 바르지 못했으니, 시인은 본질적으로 정확한 말을 가지고 삶을 재창조함으로써 비로소 그 삶이 의미를 가지게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이들 또한 중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90년대 시의 가벼움은 똑같은 잘못의 반복으로써, 예술성의 상실과 시정신의 결여로 이어질 밖에 다른 길이 없었지 않나 여겨진다.

나는 요즈음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케케묵은 화두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다 알다시피 이것은 워즈워드와 콜리지가 공동으로 낸 시집 『서정시집』의 제2판 서문에서 제기했던 질문이다.

이 서문에서 워즈워드와 콜리지는 대답했다,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나는 이 말을 시인의 특성을 한 마디로 요약한 살아 있는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인가. 시인의 특성으로 뛰어난 감수성과 상상력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철학자나 과학자에게도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비상히 발달한 언어능력이라는 점에 있어 시인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가령 위의 정의에서 “쉽게”라는 말 속에 정확하게, 분명하게 라는 뉘앙스가 있다고 읽을 때 뜻은 더 명료해진다. 시인이란 결국 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다. 시도 일종의 대화라는 뜻이다.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가지고 하는 대화니까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한데 요즘 읽는 시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되는 컴퓨터 탓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말이 어찌 힘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힘있게”가 “감동적으로”를 뜻한다면 이런 유의 시가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유의 시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시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흠잡을 수 없는, 그래서 정말 그럴듯하다고 느껴지는 시도 대부분 울림을 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성이 제거된, 거의 개인적인 문제로 시종하고 있는 시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부류의 시에 대한 평자나 독자의 관심의 경도 역시 7,80년대의 사회성의 강조에 대한 반발로 여겨지는데, 과연 사회성이 사상된 시를 통한 삶의 추구가 가능할까 라는 점도 생각해 볼 대목이다. 물론 사적인 삶은 중요한 것이고, 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개인적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이요 내면의 추구라는 사실을 굳이 경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혼자 사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사는 삶인 만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남과 더불어 살게 마련인 것이 세상이다. 더욱이 말이란 사색이나 자아추구의 방법이기도 하나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소산이다.

말에는 원천적으로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시를 가지고 개인적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시는 한없이 왜소해질 것이다. 실제로 우리 시는 지금 한없이 왜소해져 있다. 이런 시들이 몸을 던져 시를 쓰는 것과는 거리가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치열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독자에의 영합이 더 문제다. 시가 경박해지는 것도, 시를 너무 쉽게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도 남에게 하는 말인만큼 듣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독자가 없는 시처럼 비참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의식한다는 것과 영합은 전혀 다르다. 의식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마음을 열어놓고 있다는 뉘앙스를 가진 반면 영합은 독자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한다는 뜻이 강하다. 한데 이 독자에의 영합이 상업주의와 동무해서 악성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우리 시의 현실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이 대열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것이 이른바 7,80년대의 사회시 계열의 시들, 아니면 적어도 생각이 같았던 시들이라는 사실이다. 시를 언어 탐구나 그 비슷한 것으로 인식한 시들이 이 점 오히려 초연한데 반하여 말이다. 이들의 이전의 사회성의 시들은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독자에 대한 영합이었다는 혐의를 짙게 하는 터로써, 사회성의 시 자체에 독자에 대한 영합내지 세속주의적 요소가 있는가의 여부는 한 번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1998년 10월 일본의 카나카와(神奈川) 대학에서 동북아시아 문학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다. 중국, 일본, 한국에서 평론가, 소설가, 시인이 각각 한 명씩 발표자로 나선 이 세미나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 시>를 주제로 얘기를 했는데, 청중 중의 하나가 한국시에 있어서의 절규성(絶叫性)이란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다.

나는 그 개념이 분명치를 않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일본에서 나온 『현대시의 전망』(思潮社,1899)이라는 책을 그 뒤 보니 이 문제가 주요한 화두가 되어 있다. 일본시가 전체적으로 동인들끼리 즐기는 수공업예술의 수준으로 전락 왜소화된 데는 시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절규성의 상실이 그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었고, 한국시에는 아직 그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활기찬 문학이 되고 있다는 진단도 있었다.

최근에 나온 진보적 문학지 『신일본 문학』에서도 눈에 띄는 시에 있어 절규성이란,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해 보건대 문자 그대로 시는 본질적으로 부르짖음, 웨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 같았다. 가령 우리가 살 수 없는 환경에 봉착했을 때 못 견디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더없는 기쁨에 처했을 때 환호하는 기능과 성격이 시에는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기도 하고 기쁨을 즐기게도 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 특유의 탐미주의와 사소한 것에 대한 편집광적 집착으로 사회성이 사상되면서 일본시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시쪽의 이 진단은 일본시에 관한 한 옳은 것이겠으나 한국시에 대해서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선 우리시에서도 그러한 절규적인 성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절규성이라는 문제는 우리 시에서도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 시가 억지에 의해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말장난에 시종하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 시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고 하는 것이 모두 절규성의 상실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시가 안이하고 느슨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물론 우리가 막 들어선 사이버 디지털 시대에 시가 옛날과 같은 형태로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체로 활자매체에 의존해 온 시에게 탈활자매체의 새로운 시대는 분명히 위기다. 하지만 기계화와 대량생산이라는 산업혁명의 폭풍 속에서 시는 왕자의 자리를 산문에 넘겨 주기는 했지만, 민중언어의 발견에 의해서 오히려 그 영역을 확대하지 않았던가.

사람을 극단적으로 개인화하고 파편화하리라 예상했던 인터넷이 오히려 전지구화하면서 국가간 계급간의 빈부 격차를 확대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연결망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암시하는 바 크다.

시는 어차피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이다. 억지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러워지면서, 잃어버린 절규성을 회복하고, 왜소해짐으로써 놓친 큰 울림을 되찾는다는 일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우리 시가 한 번 시도해 볼 일이다.

신경림: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시집으로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등이 있음.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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