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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9)—산성진과 서안 해방전투에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0.19일 11:10
1947년 5월부터 동북민주련군 1종대와 2종대는 북만 독립 1사와 독립 2사의 협동하에 장춘서남부로 공격하여 회덕(怀德)을 수복하고 곧바로 사평으로 진격했다. 한편 남만의 3종대는 남만독립사와 독립4사의 협동하에 심양-길림철도중부의 주요도시 산성진(山城镇)과 초시(草市)를 점령한후 매하구와 서안을 거쳐 사평쪽으로 진격했다. 남만 4종대는 매하구의 적 수비군 7,000여명을 소멸한후 통화, 안동, 본계를 비롯한 십여개 도시를 점령하고 적을 심양에로 몰아넣었다.

장춘, 길림부근에서 활동하던 6종대와 길림군구 동만독립사, 독립3사 그리고 기타 지방부대는 길림과 장춘사이를 지나 사평으로 공격했고 다른 한갈래는 화전에서 출격해 남만과 동만근거지를 이어놓았다.

료녕성 해룡에서 입대하여 동북민주련군 남만 주력부대인 3종대 포병부대에 편입되였던 권상준(权相俊) 로인, 권상준로인은 부사급 간부로 퇴직하여 장춘에서 만년을 보내고있었다.

《한동안 휴식하고 그다음 내선에서 외선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림강보위전때는 내선전투죠. 그리고 우리의 전략도 원래의 방위가 진공으로 넘어가면서 그래 형세가 변했지요. 국민당은 다시 힘이 없어 진공을 못하지요. 후퇴해서 그저 요지만 점령하고있지요. 산성진, 매하구, 청원, 사평 그런데 류하에서 동원해서 우리가 반격을 가했습니다. 출발하는데 거기 군사행동이라서 비밀이지요. 우린 물어볼수도 없고 가는 방향을 분석하니까 산성진이였습니다. 류하에서 산성진이 멀지 않았습니다.》

동북야전군 3종대 포병 권상준로인.

권상준로인의 해방후의 모습.

5월 13일, 3종대와 4종대 10사는 산성진과 초시에 대한 공격을 발동해 국민당 60군 182사를 비롯해 적 수비군 3,000여명을 소멸하고 지원하러 온 신6군 22사 1,500명을 소멸하였다. 

(권상준) 《어떻게 싸우다싸우다 제집앞에 와서 포를 쏘게 되였지요. 부모님들은 알고있겠는가? 그 당시 모르지요. 아들이 어느 부대에 있는지 부모들은 모르지요. 철도를 넘어 산성진 북산을 점령하고 산성진밑 역전수탑이 있는 거기에 국민당군 한개 퇀이 수비하고있었습니다. 수탑이 지휘소였지요. 포를 몇방 쏘지 않고 해결되였지요. 저는 산성진에서 공부했기에 북산에서 산성진을 내려다보니 다 알렸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거기서 공부했으니깐.》

산성진을 해방하고 남산성자에서 신6군 22사의 적을 소멸한후 부대는 다시 승리의 자세로 산성진을 거쳐 전선으로 나가게 되였다. 산성진을 거쳐 갈 때 해방받은 농민들이 거리에 나와 우리군 장병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머리가 흰 로인, 호기심에 찬 눈으로 거리를 지나는 군인들을 바라보는 어린이들 그리고 흰 치마자락을 날리며 애타는 심정으로 자기 자식을 찾아보는 어머니들…

(권상준) 《돌아올 때는 산성진 거리로 오는데 거리에서 모친을 만났지요…그 당시 우리 모친도 몰랐지요. 산성진을 해방시키고 국민당을 소멸했으니 창고를 털고 량식창고를 털어 구제한다고 하여 자루를 하나 들고서 량식 타러 산성진에 올라왔지요. 우리집이 산성진에서 십여리 되는데 십자길중간에 서있다가 마침 부대가 돌아오는걸 봤지요. 먼저 우리 동생을 만나고, 그다음 불과 십분후에 나를 만났답니요.》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드디어 씩씩하게 걸어가는 우리군 장병들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발견했던것이다.

《상준아! 에이구 상준아 에미다, 에미!》

말로 대포를 끌고가던 몇몇 군인들속에서 한 전사가 달려나와 어머니의 두손을 꼭 잡는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어이구 장하다. 아까 네 동생도 봤다. 량식 바꾸어 먹으라며 고무신 한컬레 주더라, 참 너희들 고생많지?》

《동생까지 부대에 참가했으니 집에서 얼마나 고생 많으셨겠습니까? 어머니! 집 일은 어쩌구요?》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고 아들의 손을 잡고 《괜찮다. 국민당이 와서는 많이 굶고 얼구 그랬는데 이젠 경루도 지나고 해방되였으니까, 이렇게 가난한 사람에게 쌀도 나누어주니 집 걱정은 말어라.》 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꼭 승리할것입니다. 앞으로 좋은 날 꼭 있을겁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전사는 말을 마치고 급급히 행군대렬을 따라 달려갔다.

(권상준) 《모친은 날 보고 〈방금 너희 동생을 만나봤다. 아 이젠 시름놓았다며 아주 기뻐했어요. 그래 어머니가 얼굴이 부어가지고 〈어째 그런가?〉하니 〈국민당이 와서 굶고 얼고 겨울을 나다가 그랬다〉했어요. 그리고 〈이제 너 동생이 지나가면서 고무신 한컬레 주더라 량식 바꾸어 먹으라구〉했습니다. 저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동생은 고무신 내놓았는데 난 내놓을것이 없어…그러나 다 무사한줄 알고 기뻤습니다. 당시 힘이 얼마나 나는지…》

사평과 매하구사이의 주요도시인 료원시는 해방전쟁시기 서안이라고 했다. 3종대가 서풍을 공격하고있을 때 남만 4종대와 독립 4사는 사평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서안을 공격하였다.

림강보위전을 마치고 휘남을 해방한 독립 4사는 얼마간의 정돈을 거친후 서안공격전을 치르게 되였던것이다. 서안공격전에 참가했던 최창수로인은 당시 독립 4사 3퇀의 중기반장이였다.

《사평쪽 가는데 서안전투, 역시 휘남전투와 비슷해요. 그때 국민당이 많이 집결하고 도시도 컸습니다. 거기도 포대가 많고 부근에 또치까도 많았습니다. 포대는 이렇게 있고 또치까는 낮추고 기관총하고 이게 상당히 위험합니다. 목표물이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우리동무들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독립 4사 중기반장이였던 최창수로인.

독립 4사 각 부대는 기관총화력의 엄호하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서안은 휘남보다도 훨씬 더 큰 도시였기에 공격은 시작부터 상상외로 치렬하였다. 전사들은 거리마다 골목마다 그리고 매 건물마다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도심으로 공격해 들어가야 했다. 부대의 모든 중형무기들이 동원되여 아군의 공격을 엄호해나섰다. 하지만 한동안 사격하던 기관총소리가 멎었다. 참모장 로철용이 달려와 보니 낡은 일본제 중기관총의 격발기에 문제가 생겼던것이다.

(최창수) 《거기서 나두 중기를 가지고 우리 중기가 일본놈들이 그냥 쓰던것이여서 총구멍이 낡아 명중률이 낮았습니다. 이걸 나가면 이렇게 중기의 격발기가 내리쏘는게 우리가 두드려려만든 격침도 많이 쓰면 꼬부라지는데 중기의 격발침이 아무리 굵어도 한참 쏘면 굽어집니다…》

기관총이 고장났다 하여 전투를 그만둘수는 없었다. 최창수와 중기반의 전사들은 두조로 나누어 수류탄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갔다.

(최창수) 《우리가 7명인데 두개조로 나누었지요. 우리는 총이 없어 반장도 총을 못가지고있었어요. 할수 없이 기관총을 버리고 수류탄을 들고 내가 한개조 그리고 부반장이 한개조를 데리고 나갔습니다…수류탄을 들고 맨몸으로 돌격해서 우리 동무들 많이 희생했어요. 한개조는 다 죽구 내가 거느린 네명은 두명이 부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국민당 한 50명 잡았어요. 그때 이놈들은 집안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문을 당겨열고 수류탄을 던지니 놈들도 무서워 숨어있는데 〈총을 바쳐라〉하니 안에서 총 하나가 나왔어요. 〈옳다 됐다〉 그래서 앞뒤를 지키고 들어가 50명 잡았습니다.

그안에 중기관총, 60미리구경의 포도 있고 그랬습니다. 돌격이 끝나니 로획한 중기를 넷이서 끌고와서 싸웠습니다. 그래 넷이서 큰공을 세웠는가 했는데 셋이서 우리보다 더 많이 잡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 그사람 공을 가지고 우리는 3소공을 가지고 책 하나씩 가졌습니다.》

서안을 해방한 동북민주련군 4종대와 독립 4사 그리고 산성진과 초시로 공격해온 동북민주련군 3종대는 서남방향으로 사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심양으로부터 공격해 올 적의 지원군을 견제하면서 사평에 대한 포위권을 줄였다. 그리고 북쪽으로부터 남진한 동북민주련군 주력인 1종대와 2종대는 장춘과 길림지역의 적 수비군을 우회하여 동부와 북부로 사평에 대한 포위권을 좁혔다. 이제 길림지역의 적만 견제하면 고립된 사평을 공격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

길림시에 둥지를 틀고있는 국민당 60군과 간고한 대치전을 치르고있던 동만 각 부대는 사평에 대한 아군의 공격을 돕기 위해 더욱 치렬한 전투를 준비하고있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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