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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1)—참군열조와 전선지원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0.18일 18:47
동북에서의 국공량당간의 겨룸은 주로 군사투쟁에서 체현되였다. 산해관으로부터 금주, 사평, 장춘에 이르기까지 동북민주련은 병력이 부족했기때문에 거듭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우세한 국민당군은 사평, 장춘을 점령함으로써 송화강기슭에까지 공격해왔다. 하지만 국민당군은 대량의 병력으로 대중도시와 중요한 교통선을 수비해야 되였기때문에 기동병력이 부족해 대규모의 공격을 발동할 여력이 없었다.

1946년 6월이후 동북에서의 동북민주련군과 국민당군은 잠시나마 대치단계에 처하게 되였다.

군사투쟁은 정치, 경제 투쟁의 연속이다. 막강한 국민당군을 격파하려면 더욱 강대한 군사력이 있어야 하고 강대한 군사력을 갖추자면 우선 확고한 근거지와 훌륭한 정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여야 했다. 이를 파악한 중공중앙 동북국에서는 잠시나마 나타난 대치단계를 리용해 광범한 동북농촌에서 토비숙청을 진행하고 일제 잔여세력과 주구들을 청산했으며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이러한 정치, 경제, 군사적인 조치는 큰 성과를 가져왔고 동북의 공산당의 력량을 크게 강화시켰다.

토지개혁의 혜택을 본 동북의 광범한 농민들은(이 시기에 와서는 대부분의 한족농민까지 포함) 드디어 공산당을 믿게 되였으며 자기의 터전을 보위하기 위해 대량으로 인민의 군대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동북의 동만, 북만, 남만의 광범한 조선족농민들도 계속 우량한 혁명전통을 발휘하면서 다투어 참군, 참전하였고 전선지원에 모든것을 아끼지 않았다.

《참군은 영광이다!》이는 당시 조선족사회의 기풍으로 되였다. 연길현 동불사구 세린하의 박씨할머니는 세아들을 전선에 보냈고 딸까지도 군대에 보냈다. 그는 만약 전선에서 수요된다면 18살에 나는 막내아들까지 전선에 보낼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광범한 조선족인민은 부모가 자식을 군대 보내고 안해가 남편을 군대에 보냈다. 일부 가정에서는 형제가 서로 자기가 군대에 가겠다고 다투기까지 했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도시의 학생들까지도 참군열조를 일으켰다. 1947년 6월 4일, 연길시 제2중학교에서는 131명의 남녀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참군하였고 연길 기타 학교와 룡정의 학교에서도 수백명 학생들이 참군했다.

1946년 8월 15일, 광복을 경축하면서 연길 서시장에서 대량의 조선청년들이 참군.

1946년 화룡현 청년들의 참군기념사진.

1947년 화룡현 고령촌의 청년들의 참군기념 사진.

길림성군구 참군상황자료를 보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길림성 참군자총수는 18만 9,400여명인데 그중 연변의 참군자수가 5만 2천여명에 달해 27.5%를 차지했다. 연변의 참군자수가운데 대부분이 조선족청년들이였다.

비교적 일찍 토비숙청을 끝내고 토지개혁을 실시했기때문에 동만의 혁명열성은 더욱 높았고 정치, 경제적 토대가 더욱 확고했기때문에 해방전쟁초기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만근거지의 역할과 기여는 더욱 돌출했다.

동만뿐만 아니라 이 시기 북만과 남만에서도 토지개혁을 진행하여 많은 농민들이 공산당을 따라 동북민주련군에 참가하였다.

토비숙청과 토지개혁을 진행함과 동시에 동북국에서는 부대확건과 전투력향상에 진력하였다. 관내에서 들어온 팔로군과 신사군의 주력이 대부분 할빈을 중심으로 한 북만에 집결되였기때문에 북만군구는 할빈에 본부를 둔 동북민주련군 총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동만에 주보중을 사령원으로 하는 길림군구를 두고 남만에 소화를 사령원으로 하는 료동군구를 두었다.

동북민주련군 총부에서는 또 북만에 집결한 팔로군, 신4군을 바탕으로 제1종대, 제2종대, 제6종대를 편성하였다. 제1종대는 대량의 병력을 확충한 산동 제1사와 2사를 주축으로 하고 장춘, 길림지역에서 활동하던 동만 제7종대를 제1종대 3사로 개편하였다. 때문에 동북민주련군의 주력으로서 후에 사람들로부터 《천하제1군》로 불리운 제1종대에는 많은 조선족전사들이 있게 되였다.

신4군을 주축으로 편성한 제2종대산하에는 4,5,6사를 두었고 신4군과 산동 팔로군을 주축으로 한 제6종대는 16, 17, 18 세개 사를 두었다. 뿐만 아니라 각 군구에 6만명에 달하는 7개 독립사를 새롭게 편성하였다. 이와 같은 주력부대와 기동부대를 제외하고도 해방구에는 대량의 독립퇀과 현, 구 무장이 있었다. 여기에 남만에서 투쟁을 견지하고있는 제3종대와 제4종대, 료동군구의 3개 독립사와 리홍광지대를 합치면 동북민주련군은 수십만의 병력을 확보하게 되였다.

토지개혁의 혜택을 본 빈곤한 농민자제들을 대량 확보했기때문에 동북민주련군의 전투력은 크게 강화되였고 전사들의 계급적 각성도 아주 높았다.

미국제 무기로 발톱까지 무장한 국민당정규군과 싸우려면 단순한 좁쌀에 보총만으로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동북민주련군은 병력을 확충함과 동시에 부대의 무장을 강화하는데 힘을 몰부었다.

림표와 라영환은 포병부대건설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1945년 11월, 연안포병학교의 1000여명 학원들이 동북에 오자 동북국에서는 이들을 중심으로 포병부대건설을 추진하였다. 포병은 일정한 문화수준이 있어야만 했기때문에 동북전역에서 문화수준이 높은 학원들을 대량 모집해 포병학교를 꾸렸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았던 조선족청년들이 대량 포병학교에 가게 되였고 후에는 동북민주련군 포병부대의 주력으로 성장했다.

이와 동시에 동북민주련군은 공병과 기병부대 건설도 틀어쥐였고 또 호로대 사령부를 두고 철도와 주요 도로를 보호하는 특수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항공학교를 설립해 비행사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은 동북민주련군의 특종병부대 편성에 훌륭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문화수준이 높은 대량의 조선족청년들이 이때 포병학교, 비행학교, 공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아 동북민주련군의 중요한 군사기술력량으로 성장했다.

동북의 조선족인민은 참군열조를 일으켜 동북민주련군에 적극 참가하였을뿐만 아니라 생산을 발전시키고 입쌀을 많이 바치는것으로 전선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특히 외유내강의 고유한 성격을 지닌 우리 민족 녀성들은 자식과 남편을 군에 보냈고 고된 농사일을 녀성의 손으로 해내면서 좋은 쌀을 정부에 바쳐 전선을 지원하여 싸웠다.

동만의 연길현 복흥구청구촌의 리영숙 녀성은 전선에서 남편이 희생된후 비통을 힘으로 바꾸어 전선지원 사업을 더욱 힘있게 추진하였다. 그는 부지런히 일해 좋은 쌀을 남들보다 더 많이 바쳐 전국 로력모범으로 당선되였고 또 1등공을 기입받았다. 그리고 연길현 흥안촌의 리옥금(李玉今) 녀성은 남편 림지룡의 참군을 지지하였으며 미구에는 또 세 시동생까지 동원해 참군 시켰다. 그는 자기가 모든 집안팍의 일을 도맡아했을뿐만아니라 기타 군인가정과 호조조를 묶어 농사일을 했다.

룡정시에 살고있는 로력모범 리옥금로인의 증언이다.

《남편이 전선에 나간후 나는 밤낮 없이 일했습니다. 농사를 잘 지어 전선에 나가있는 남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지요. 낮에는 녀성들을 동원하여 남편들을 참군시키도록 동원하였고 밤에 주로 일했습니다. 그때는 밤잠을 별로 자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전선에서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시부모님이 비통해 할가봐 마음대로 울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일하는것으로 비통을 삭이였지요.

공구량도 나는 밤시간을 리용하여 바치였는데 가장 좋은 벼로 바치였지요. 향에서도 내가 공구량을 바치러 가면 량식을 수구하는 부문에 통지하여 한밤중이라도 내가 바치는 공구량을 받게 했습니다. 공산당이 있기에 자기의 땅이 있고 마음껏 농사를 짓는데 그 행복을 국민당이 빼앗으려 한다니 나는 시동생들도 모두 전선에 보냈습니다.》

최선을 다해 전선을 지원한 렬군속 로력모범 리옥금로인.

리옥금 호조조에서 전선지원 량곡을 보내는 정경.

연변은 당시 동만근거지의 대후방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도문, 훈춘 등지에 세운 제혁공장, 신공장, 방직공장, 염색공장, 옷공장 등 군수품공장에서는 군수물자를 끊임없이 생산하여 전선에 보냈다. 광범한 녀성들은 천 짜기와 헝겊신 만들기 운동을 벌여 전선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1946년 6월,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훈춘에 병기공장을 세우게 되였다. 당시 동북군사공업부에서는 훈춘에 무기와 폭탄을 생산하는 제7공장, 8공장, 9공장을 세웠는데 제7공장에서 완성품이 나왔다. 훈춘병기공장은 바로 동북군사공업부에서 세운 제7공장을 말한다. 초기 공장의 조건은 아주 간고하였지만 대부분 조선족으로 구성된 공장 로동자들은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해 전선에서 수요되는 무기를 만들어냈다. 1946년 8월부터 12월까지 훈춘병기공장에서는 81미리, 82미리 박격포탄 2만 6,000여발을 생산해냈고 탄알 110여만발, 수류탄 16만 8,000여개를 제조해 전선에 보냈다.

훈춘병기공장 로력모범 전경송.

병기공장에서 생산한 다양한 포탄.

훈춘병기공장에서 일했던 최성철로인은 1947년 10월에 참군했다가 동북군공부 제7공장에 가게 되였다. 최성철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공장은 원래 일본 륙군병원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동북군공부 제7공장에 가게 되였는데 공장자리는 이전의 일본륙군병원자리였습니다. 거기에 공장을 세웠는데 당시 1구로부터 4구까지 있었습니다. 설비도 크게 없었습니다. 전사는 모두 공인으로 일하는데 대부분 공정사는 일본사람이였습니다. 생산하는데도 아주 간고했습니다. 전방은 포탄을 요구하고 돈은 없고 일본아들이 연구한게 종이를 가지고 뢰관을 생산해 그걸로 전방에 보냈습니다. 효과가 좋았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일본기술원이고 로동자들은 군공전사라고 했습니다.

나는 1구에서 일했는데 폭탄에 약을 넣는걸 했습니다. 씻어내서 곱게 만들어 거기에 약을 넣는 일을 했습니다. 2구에서는 화약을 만들어 안에 넣고 뢰관을 넣으며 3구는 인신에 약을 넣는것이고 4구는 폭탄에 약을 넣습니다. 3구에서 성품을 만들어 전방에 보냅니다. 그때 자동차는 기름을 쓰지 못하고 석탄을 썼는데 두대밖에 없었습니다. 화약이 오는건 길림쪽에 국민당이 있기때문에 흑룡강, 목단강, 치치할, 북안 이쪽으로부터 화약이 들어왔습니다.

제8공장은 약을 주입해서 다시 가공해 7공장에 보냅니다. 그다음 7공장에서 성품을 만들어 전선에 보냈습니다. 길림을 해방한 다음 자료오는 거리가 멀기때문에 이사하게 되였습니다. 길림은 못가고 심양해방후 그다음 흩어져 할빈, 돈화, 심양으로 갔습니다.》

전선에서는 목숨을 내걸고 적과 싸우고 후방에서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기생산에 달라붙어야했다. 포탄, 폭탄, 탄약을 만들기 때문에 기술적인 요구와 조심성에 대한 요구가 특히 높았다. 하지만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일에 달라붙다보니 사고도 피할수는 없었다.

최성철로인이 소개한데 의하면 로동자들은 여덟시간 일하고도 또 보초를 서야 했다. 지친 몸으로 일하다니 때론 사고도 났다. 조선족녀성이 폭발사고로 하여 눈이 멀고 손을 다 잃었다는것이다. 그리고 화약을 자주 만지다보니 피부색이 누렇게 되고 심각하면 페병에 걸려 사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장로동자들은 두려움 없이 계속 일에 달라붙었으며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방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우리 전사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두렵지 않다는 정신으로 상급에서 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냈던것이다.

1947년 여름부터 동북민주련군 야전군 각 부대가 전략적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무기에 대한 요구가 더욱 많았다. 군사공업부의 지시에 따라 훈춘병기공장에서는 자체로 82미리 박격포를 100여문을 제조해냈다. 그리고 1946년 8월부터 1947년 7월까지, 1년동안에 81미리 박격포. 82미리 박격포 포탄 55,000여발, 탄알 220여만발, 수류탄 635,000여개, 뢰관 287,000여개를 생산해 전선에 보내였다. 훈춘병기공장은 건립이래의 3년동안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큰 공헌을 하였다.

이와 같이 동북해방구의 군민이 합심해 적과 싸웠기때문에 동북민주련군은 국민당군을 더욱 힘있게 타격할수 있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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