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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2)—남만에서의 투쟁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0.19일 16:21
1946년 6월, 장개석집단은 드디어 전국적인 군사적 포치를 완수하고 미국제무기로 장비된 수십만 대군을 몰아 화북, 화동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발동했다. 이로써 항일전쟁승리후 평화를 바라던 전국인민의 의지와는 달리 전쟁의 불길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내와는 달리 동북의 국민당군은 의연히 새로운 공세를 발동하지 못하고있었다.

동북의 국민당군은 휴전기가 지났지만 의연히 공격을 발동할 여력이 없었던것이다. 동북국민당군 총사령인 두률명은 반년간 기다렸지만 장개석은 약속했던 정예군을 더 파견하지 못했다. 이 반년시간을 리용해 송화강이북으로 철수한 동북민주련군은 광범한 인민을 동원해 토비를 숙청하고 토지개혁을 진행함으로써 더욱 확고한 근거지를 다져나갔을뿐만 아니라 병력도 크게 보강했다.

공산당과 동북민주련군의 힘이 점점 커지는것을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수 없게 된 두률명은 대량의 민부들을 강제로 군에 보충함과 동시에 기존의 병력을 가지고 국부적인 공격을 개시하려 계획하였다. 그는 먼저 남만의 동북민주련군을 제거한후 병력을 집중해 송화강이북으로 공격할 전략을 구상했다. 이른바 《선남후북(先南后北)》전략이였다.

당시 남만근거지의 상황은 동만이나 북만과 달리 극히 어려운 형편이였다. 국민당군이 주요한 교통선과 대중도시를 강점하고있었기 때문에 남만농촌에 흩어진 근거지의 생산과 생활은 아주 어려웠고 또한 수시로 국민당군의 위협을 받고있었다.

1945년 9월, 일본이 패망한후로 동북에 진출한 공산당은 남만근거지를 창설하기 시작했고 어려운 환경에서 투쟁을 견지하였다.

남만의 광범한 조선족은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영향으로 조선인민주련맹을 따라 혁명에 나섰다. 우수한 청장년들은 다투어 동북민주련군에 참가했고 마을에 남은 농민들은 민주련맹의 지도하에 정권건설과 감조감식투쟁을 진행하면서 전선을 지원했다.

86세 고령인 리홍광지대의 로간부 최강선생은 당시 동북조선인민주련맹의 사업을 이렇게 소개했다.

《해방전쟁시기 우리 군대가 군사적으로 큰 공헌을 세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홀시할수 없는 또 하나는 우리 조선족으로 조직된 동북조선인민주련맹입니다. 동북조선인민주련맹은 성립당시 주임은 방호산, 우리 사단의 정치위원인 방호산이 겸하고 그다음에 상무 부주임이 있었는데 그는 리강이라는분이였습니다.

이분은 역시 공산주의자였는데 류하현 조선공산당 조직부장직을 맡고있었던 로동지입니다. 일상 민주련맹공작은 이분이 책임지고했습니다. 민주련맹은 통화폭동후에 새로 설립된것인데 전시라는 특점에 따라 인민해방전쟁을 돕기 위해서 조선족군중들을 발동하고 조직하고 해서 군대에 많은 조선족자녀들을 보내주었을뿐만 아니라 담가대, 운수대 이런걸 조직해 전선을 지원했습니다.

또 한시기는 당중앙의 결정에 따라 동북에서 토지개혁을 했는데 토지개혁공작대에 참가해 조선족농민들에게 수전을 벼농사를 짓도록 땅을 분배해주기도 했으며 우리 조선족 소학교, 중학교 이런걸 조직해서 민족문화소질을 제고했으며 교장까지 임명권을 가지고 행사했습니다.》 

리홍광지대 1퇀 정치처 주임이였던 최강(86세) 로인.

당시 료녕성 민주련맹은 매하구에 있었는데 항일간부 리강(李刚)이 상임부주임을 맡고있었다. 그리고 조선족간부 차정현이 해룡현(매하구) 현장과 현민주련맹 주임을 맡았고 변철호(边哲昊)가 민주련맹의 선전위원을 맡고있었다. 1905년 조선경기도 인천시에서 태여난 리강은 중학시절부터 혁명활동에 참가하였고 1923년에 조선을 떠나 중국에 와서 항일운동을 진행하면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 남만지하조직의 간부로 사업한 그는 류하현 각지에 많은 당지부를 설립하고 당원을 발전시켰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리강은 류하현의 100여명 조선족청년을 모집해 리홍광지대에 보냈고 군중속에서 공산당의 정책을 적극 선전하였다. 10월에 태항산의 조선의용군이 도착한후 리강은 조선독립동맹에 가입하고 동맹의 주임으로 있었다. 후에 조선독립동맹은 동북조선인민주동맹으로 개명하였다.

동북조선인민주련맹 상임부주임 리강.

1946년부터 리강은 통화지구민주련맹의 부주임으로 있으면서 리홍광지대에서 파견한 20여명 간부들을 거느리고 장백, 무송, 정우, 휘남, 해룡, 반석, 동풍, 철령, 집안, 림강, 통화, 류하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들은 리홍광지대의 조선신문 《단결일보》를 각지에 전했고 농회와 청년단, 녀성련합회를 조직하였으며 량식을 모아 전선에 보냈다. 그리고 남만 조선족농촌의 토지개혁사업을 하였다.

현지 정부와 당조직의 령도하에 그들은 감조감식 투쟁을 전개하고 악패지주를 진압하였다. 그리고 국민당군이 공격해오자 통화지구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통화조선족유격대 대대장은 박재정이였고 정위는 현국진이였다. 이 유격대는 통화지구의 적 거점을 습격하고 군사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지주무장과 토비들을 소멸하고 량식과 물품을 전선에 수송하였다. 남만조선족의 투쟁을 령도하면서 림강보위전의 가장 어려운 시련을 이겨낸 리강은 병환으로 앓게 되였고 1948년 8월, 조선 신의주에서 끝내 병으로 서거했다.

민주련맹의 령도하에 남만 각지 우수한 조선청년간부들은 정부를 도와 토지공작대에 참가했다. 그들은 전쟁의 초연속에서도 지주를 타도하고 남만농촌의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장춘의 로간부 변철호선생은 당시 토지공작대에 참가했던분이였다.

《리강이라는분이 남만조선인민주련의 상임 부회장이였습니다. 회장은 방호산이였습니다. 리강 이분은 후에 안 일이지만 장춘조선족으로 항일전쟁시기 리홍광과 함께 싸웠던분입니다. 당시 매하구는 지금의 향진과 비슷했습니다. 료녕성 당위원회나 정부가 다 있었지만 일 보는데는 간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문사가 있었는데 조직에서는 나더러 마반산공작대로 가라했습니다. 그때 해룡현 토개공작대는 남만토지공작의 시점이였습니다. 남만의 토지개혁사업은 진운이 리론지도를 했습니다. 당시 토지개혁을 하는데 나는 마반산에 얼마 있지 못하고 매하구에 왔습니다.

해룡현에서 나는 13명으로 구성된 공작대원들을 거느리고 지방에 나갔습니다. 어찌보면 나의 인생관은 토지개혁에서 형성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때 나는 진정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였습니다. 당시 농민들을 이끌고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나누었으며 생산도구도 나누어주었습니다. 》

장춘의 변철호선생 80세, 당시 조선인민주련맹 간부.

변철호선생이 지방공작을 할 때의 모습.

동북의 주요 도로, 교통중심지의 하나인 매하구, 매하구에는 일찍부터 조선족이 많이 모여살고있었다. 일찍 해방전쟁시기 리홍광지대에 참가해 혁명했던분들이 지금도 매하구로간부국에 모여 즐거운 만년을 보내고있다. 매하구에서 만난 원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대원이였던 김명녀로인은 당시 남만지역의 어려운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1945년 11월에 여길(매하구)에 왔지요. 이사를 왔는데 그때는 해방이 되고 좀 사는것 같았습니다. 료녕성 민주련맹이 여기 있었습니다. 지난번 변혜옥과 같이 심양에 갔던 리정옥의 아버지(리강)가 민주련맹의 주임이였습니다. 그리고 차정현이라구 그분이 매하구 현장이였는데 현민주련맹 주임을 맡았고 장춘의 변철호가 민주련맹 선전위원이고 또 산성진 민주련맹 주임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있을 때인데 1946년 4월 20 며칠인가 국민당군이 들어왔습니다.》

매하구의 김명녀로인 76세, 원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대원.

국민당군은 도처에서 살인, 방화, 략탈을 감행하여 남만 각지 인민은 다시 도탄속에 허덕이게 되였다.

(김명녀) 《차정현현장을 따라 회의에 갔다오는데 여기 남산에 도착하니 저녁 11시 반이였습니다. 차현장이 우리를 모아놓고 회의를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활동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잘 포치했습니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다보니 불이 반짝이는데 이젠 국민당의 세상이구나 팔로군은 다 철퇴했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막 났습니다.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는데 동네에서 국민당군은 거기서 누구누구 강간하고 그저께는 어디서 불을 질렀다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당군이 줄을 서서 들어오는것을 나도 여러번 봤지요. 그때 우리 언니가 애를 낳았는데 열하루만이였습니다. 국민당 병사들이 집집을 겁탈하는데 우리 집에 와서는 언니가 솜이불을 덮고있는것을 보고 그걸 빼앗았습니다. 온집에 하나밖에 없는 이불이라 언니는 안 주겠다고 이불자락을 잡고 줄줄 끌려가는데 놈들이 발로 차고 총박죽으로 때리고 그랬습니다. 밖에 나가 보니 이불이 기운 자리가 많고 그러니 반장놈이 에익 별거 아닌거 가지고 그랬구나 하면서 그 이불을 뜨물독에 콱 처넣고 가버렸습니다. 참 이런 일이 집집마다 매일매일 있었습니다.》

땅크와 대포를 앞세운 국민당정예군은 남만의 주요 교통선을 차지하고 대중도시를 공점했으며 해방구에 들어와 살인과 략탈을 감행하였다.

우세한 적과 억지로 싸울수 없게 되자 남만의 동북민주련군은 조직적으로 철수하면서 우세한 병력을 집중해 유리한 기회를 노려 고립된 적을 타격하였다.

남만에서 활약하던 동북민주련군 주력인 제3종대와 제4종대는 기동령활하게 적을 타격하면서 줄곧 대량의 적 병력을 견제하고있었다. 그리고 송화강이북으로 공격하려는 국민당군을 견제하기 위해 제3종대 주력은 1946년 10월 2일밤부터 서풍(西丰)현성을 급습했다.

남만주력부대인 제3종대에 입대한 장춘의 권상준로인은 포병부대의 일원으로서 서풍공격전에 참가했다.

《해룡현에서 입대하여 현대대에 있다가 리홍광지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다시 우리 한개 중개가 전부 주력부대인 민주련군 제3종대에 뽑혀갔습니다. 3종대에 온후 겪은 첫 전투가 바로 서풍전투였습니다. 우리는 포를 끌고 적의 화구를 하나하나 까부시면서 부대의 공격을 도왔습니다.》

제3종대 9사 26퇀의 반장이였던 금주의 고영걸로인도 입대한후의 첫 전투가 서풍공격전이였다고 한다.

《입대해 처음 참가한 전투가 바로 서풍공격전이였습니다. 처음이다보니 전투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비가 내렸는데 우리 련은 공격할 때 련계가 끊어져 방향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대부대를 찾았을 때는 서풍이 해방된 뒤였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였습니다. 우리는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작전경험이 풍부한 관내에서 온 한족부대에 갈것을 요구했습니다. 서풍전투가 있은후 적의 주력을 유인하여 적을 견제하면서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개 도시나 지역의 득실을 따지지 말고 적의 유생력량을 집중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림강보위전을 앞두고 우리 조선족련은 각 부대에 분산편입되였는데 1패가 1영에 가고 2패가 2영에 갔으며 3패가 3영에 갔습니다. 나는 1영에 배속되였습니다. 그러니깐 한개 반에 두세명 조선족전사가 있게 되였습니다.》

장춘의 권상준로인, 원 동북민주련군 3종대 9사 산포영 .

금주의 고영걸로인, 원 동북민주련군 3종대 9사 전사.

아군은 2박 1일의 격전을 거쳐 서풍의 수비군 207사 공병퇀을 전부 소멸했다. 그리고 10월 30일에는 제4종대와 기타 지방부대와 함께 국민당의 52군 25사를 신개령(新开岭)의 협곡에 유인해 포위섬멸하였다.

신개령전투에서 아군은 적사장 리정의(李正谊)를 생포하고 8,000여명을 소멸해 동북민주련군이 처음으로 미국제무기로 무장한 적 한개 사단을 전부 소멸하는 전과를 이룩했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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