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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49)—김구와 림시정부 요원 피난처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9.30일 16:01
1931년 《9.18》사변을 통해 일본침략자들은 중국 동북을 강점하였다. 부유한 동북대지는 일제가 더욱 큰 야망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지로 전락되였고 수천만 동북사람들이 일제의 압박과 략탈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은 수억 중국인민의 강렬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진보인사들은 일제와 싸울것을 호소하면서 일제와 타협하는 국민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국민정부는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두려워 계속 공개적인 항일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일제침략자들에게 일격을 가한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은후 중국 관민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힘을 알게 되였고 조선독립을 위한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반일투쟁을 동조하고 적극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김구와 부분적 림시정부 요원들이 중국 진보인사의 도움을 받아 가장 먼저 피난한 곳은 절강성 가흥시였다.

1932년 5월, 홍구공원 폭탄사건이후 김구와 안공근은 중국의 진보인사 저보성의 배치에 따라 엄항섭의 호송을 받으며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가흥으로 갔다. 저보성은 일찍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절강성 주석, 상해 항일구원회 회장, 상해법학원 원장을 력임했던 인물이였고 가흥의 부호였다. 저보성은 김구를 가흥 남호(南湖)기슭의 매만가(梅湾街)에 피신시켰다.

해염현에서의 답사를 마치고 간단한 점심식사를 한후 우리는 절강성 북부의 유명한 도시 가흥시로 향했다. 강남의 시골풍경을 만끽하면서 가흥시에 도착한것은 오후 3시였다.


가흥은 력사가 유구하고 물산이 풍부한 강남의 명소이다. 이곳은 산이 없었다. 가로세로 뻗은 수로가 평지의 무수한 하천과 호수를 이어주고있는 물의 고장이였다. 가흥은 또한 명인이 많이 나는 고장이기도 하다. 근대 위대한 애국주의자 심균유(沈钧儒), 현대문학거장 모순(茅盾), 저명한 시인 서지마(徐志摩)가 이곳 태생이고 오늘의 무협소설 대가 김용(金庸)도 이곳 사람이다.

가흥의 관광명소로는 남호(南湖)가 으뜸이다. 600여무의 면적을 가진 호수중심에는 작은 섬 하나가 있다. 섬에는 연우루(烟雨楼)를 비롯한 옛 원림식 건축물들이 있어 호수의 문화적인 정취를 보태주고있다. 중국 송(宋)나라 이후로 가흥의 남호는 항주의 서호(西湖), 소흥(绍兴)의 동호(东湖)와 더불어 절강의 3개 유명한 호수로 불리우고있다.


가흥시 남호풍경구에 위치한 매만가는 시중심의 상업구역과 이어져있었다. 륙지로는 가흥시남부와 옛 시구역으로 갈수 있었고 수로로는 남호를 거쳐 운하로 통했다. 이곳에는 중국민주동맹(民盟) 창시인인 심균유(沈钧儒) 선생의 옛집,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93학사 창시인인 저보성선생의 옛집 유적이 있고 근대 녀혁명가 추근(秋瑾)이 혁명활동을 위해 세웠던 남호학당(南湖学堂)이 있다.

매만가에 도착해 76번지를 찾아가니 물가에 지은 작은 2층 건물이 보였다. 검은 기와에 흰벽의 건물이였는데 건물정면은 널로 만든 겉벽에 싸여있었다. 뒤쪽으로 들어가니 작은 방 하나가 있었다. 창이 없는 검은색 널문이 굳게 닫혀있고 그곁에 한자로 《대한민국 김구선생 피난처》라고 밝혀있었다. 이곳이 바로 1932년부터 1936년사이 김구가 피신하여 기타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던 곳이다. 당시 가흥에 도착한 김구는 우선 호수가의 수륜사창(秀纶丝厂)이라는 비단공장에 몸을 숨겼다가 매만가 76번지인 이곳으로 옮겼던것이다.

절강성 가흥시 매만가의 김구선생 피난처.

김구선생 피난처의 남은 건물.


건물은 저보성의 양자인 진동생(陈桐生)의 집으로서 민국초기에 축조된 2층 3진(三进) 구조였다. 거실창가에 앉으면 남호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주동생은 부근의 농장을 운영하였는데 일이 끝나면 늘 이곳에 들려 김구와 한담을 하군 하였다 한다.

답사팀이 도착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옛 건물을 한창 보수하는 중이였다. 몇몇 로동자가 열심히 일하고있었다. 안내일군이 우리에게 건물의 구조를 자상히 설명해주었다.

안내일군은 이렇게 소개해주었다.

《뒤의 이 집이 김구 선생이 살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이쪽을 헐고 한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잘 보수하려합니다. 건물은 현대적인 서양식 건물인데 집 밑으로 물이 흐릅니다. 김구 어머니와 아들은 김구 선생이 이곳에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김구 선생은 거의 모든 일을 중지하고 있었습니다. 주애보라는 녀성과 함께 선상생활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괜찮은 건물입니다. 이곳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밖을 내다보는 구멍입니다.》


건물에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비밀계단이 있었다. 강남은 대부분 숨겨놓은 벽 궤가 있었지만 이 집은 궤가 아니라 비밀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2층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김구는 이곳으로부터 밖의 상황을 살폈다고 한다. 상황이 위급하면 비밀 통로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직접 강으로 피신할 수 있다고 한다.

김구는 1936년 2월까지 이곳에 있다가 남경으로 갔다. 그사이 김구는 해염으로 피신하여 반년간 있었고 또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흥의 주애보(朱爱宝)라는 배사공녀성과 함께 선상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홀몸으로 다니면 더욱 위험하다는 저보성의 아들 저봉장(褚凤章)의 권유를 받아들여 주애보와 함께 있기로 했던것이다. 그리하여 김구는 주애보와 함께 늘 운하와 호수에 배를 띄워 몸을 피하군 하였다.

60여년이 지난 뒤 <가흥일보(嘉兴日报)>의 기자이며 절강성 녀류소설가인 하연생(夏輦生)이 김구와 주애보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소설 <선월(船月)>를 발표하였다. 소설은 후에 한국문판으로 출판되여 한국 정부상까지 받았다. 하연생은 또 장편소설 <호보류망(虎步流亡)>과 <회귀천당(回归天堂)> 두 작품을 출판하였다. 한류삼부곡(韩流三部曲)으로 불리우는 이 세 작품은 김구와 윤봉길의 문학적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용한 가흥에 피신한 김구는 이 시기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전면적으로 회고하고 깊이 있게 반성함으로써 미래 투쟁방향을 확정하였다. 그는 오직 전민족의 통합만이 일제를 전승하고 민족독립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였다. 아울러 중국과 한국 두 민족의 통일전선을 이룩해야 하고 수중에 잘 훈련된 군대가 있어야 함을 인식하게 되였다.


안내원의 해설이다.


《이쪽은 김구선생이 손님을 만나고 식사하던 곳입니다. 아래층입니다. 이 집은 밖에서 보면 작아보이지만 안은 이렇게 큽니다. 물론 밖에서는 층집인줄 모릅니다. 이것이 문인데 김구선생이 와서 이 문에 칠을 했습니다. 이쪽에 보이는것이 운하입니다.》


매만가 76번지의 김구선생 피난처는 한창 보수중이였다. 가흥시 정부에서는 이곳 옛 건물을 잘 보수하고 집 주변을 잘 정돈하여 강남의 관광명소로 개발하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매만가 76번지의 김구선생 피난처에서 200m정도 떨어진 곳에는 리동녕(李东宁)을 비롯한 한국림시정부 요원들이 피신하였던 유적지가 있다. 주소는 가흥시 남문(南门) 일휘교(日晖桥) 17번지이다.


도보로 몇분간 걸으면 앞에 높은 담에 둘러싸인 커다란 2층 건물이 나타난다. 청나라 말기에 축조된 건물앞에는 정원과 높은 담이 있었다. 담에는 검은 널문이 있었다. 녹 쓴 쇠고리가 달린 문에는 일휘교 17번지라는 작은 주소표가 붙어있었고 문곁에는 《한국림시정부요원주처(韩国临时政府要员住处)》라는 기념석판이 있었다. 가흥시정부에서 2001년에 만든 기념석판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운데 좁은 공지를 둘러싸고 3면에 빼곡이 들어앉은 2층 낡은 건물들이 보였다. 한창 보수중이여서 건물의 원 모습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대가족이 오붓하게 모여 살수 있을만큼 방도 많았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절강성 가흥시 매만가의 림정요원 거처 기념관.

가흥시 남호기슭 매만가의 일경.


림시정부 요원거처의 해설원은 이렇게 소개했다.

《이곳은 한국림시정부 요원들의 피난지입니다. 림시정부요원에는 김구선생의 어머니와 아들이 포함됩니다. 이들도 이곳에서 2년남짓이 있었습니다. 후에 이곳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였습니다. 1999년부터 이곳 원 주민들을 철수시켜 원 건물모습을 회복하고있습니다. 이곳에 한국독립기념관에서 보내준 사진전시를 하는데 지금은 보수작업을 하기때문에 잠시 전시를 하지 않고있습니다. 아마 2004년에 가야 전부 보수하여 개방할것 같습니다. 아래층은 림시정부 요원들이 식사하고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고 위층은 휴식하던 곳입니다. 당시 상해에 있던 림시정부는 각지로 흩어졌는데 일부가 이곳에 오고 많은 사람들은 항주에 갔습니다. 김구 선생은 안전을 위해 이곳에 거주하지 않고 부근의 매만가에 거주했습니다.》


우리는 설명을 들으며 건물을 살펴보았다.

1932년 5월중순 한국림시정부 요원인 리동녕, 김의한(金毅汉), 박찬익과 그 일가가 저보성의 배치에 따라 상해를 떠나 가흥에 오게 되였다. 그들은 이 집을 세내여 거처로 정했다. 며칠후 엄항섭이 김구와 안공근을 호송해 상해로부터 가흥에 도착하였다. 엄항섭과 안공근도 이 집에 거주하면서 비밀리에 김구와 련락하였다. 그후 조선국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한 김구의 모친 곽락원(郭樂园) 녀사가 두 손자 김인(金仁)과 김신(金信)을 데리고 찾아와 역시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이들은 남녀로소 한곳에 모여 살았기에 방대한 대가족을 련상시켰다. 현지인들은 줄곧 이들을 광동에서 온 대가정으로 생각하였다. 알아듣기 어렵지만 말투가 부드러운 광동방언이 우리 말과 비슷했기때문일것이다.

김구가 가흥에 도착한후 이곳은 림정의 비밀거점으로도 사용되였다. 몇몇 림시정부 요원들만이 김구가 부근에 피신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김구도 역시 이들을 통해 기타 독립운동가들과의 련계를 확보할수 있었다.

김구가 가흥으로 피신할 때 상해에 있던 대부분 림시정부일군들은 사처로 흩어졌고 일부는 절강성 항주로 이동하였다. 항주에도 림시정부유적지가 여러 곳이 있다지만 그곳까지 답사할 여유가 없어 다소 유감이였다.

1933년 5월 김구와 안공근, 엄항섭은 가흥으로부터 남경에 가 장개석을 만나 재정면의 지원을 허락받았다. 중국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김구는 다음 보조로 림시정부조직체계를 강화하고 미래 반일투쟁방향을 확정함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항주에 모인 림시정부 주요인사들과의 분쟁이 나타나 여러가지 애로를 겪게 되였다. 크게 실망한 김구와 리동녕은 항주에 머물지 않고 계속 가흥에서 생활하면서 비밀리에 림시정부 내부통합을 주도하였다.

장개석을 만난후 김구는 중국측의 제의를 받아들여 중국 중앙륙군군관학교(中央陆军军官学校) 락양분교(洛阳分校)에 설치한 한인특별반(韩人特别班)을 운영하였다.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규합하기 위해 그는 동북에서 활동하던 리청천(李青天)과 손잡고 중국 동북과 조선 국내로부터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1934년 2월 락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이 정식 개교하였는데 당시 92명 청년들이 모였다. 김구가 고문자격으로 전반운영을 책임지고 리청천이 총교관(总教官)을 맡았으며 리범석(李范奭)이 학생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오광선(吴光鲜), 조경한(赵擎韩), 윤경천(尹敬天), 한헌(韩宪)이 교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특별반운영에서 김구와 리청천이 서로 학생들을 자기쪽으로 규합시키려 했기때문에 갈등이 생기게 되였다. 심화되는 모순을 해결할수 없게 되자 김구는 자기쪽 25명 입교생을 남경으로 소환하기도 하였다. 락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은 일년 뒤 62명을 졸업시켰지만 이를 탐지한 일본측이 중국측에 강경한 외교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페쇄되고 말았다.

가흥에 피신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은 이 시기 또한 림시정부 재정비에 성공하였다. 1935년 11월 림시정부 의정원 비상회의가 드디여 가흥의 남호에서 소집되였다. 리동녕, 조완구, 김구, 조성환, 리시영, 송병조, 차리석을 비롯한 16명 의정원이 모인 자리에서 김구와 리동녕, 조완구가 국무위원으로 보충 선거되고 제13기 림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가흥시 남호의 유람선(중국공산당 1차 대표대회 마지막회의 소집지),

김구를 주석으로 한 한국림시정부 비상회의 소집지.


가흥의 매만가의 김구선생 피난처와 림시정부 요원거처 유적지를 답사하고 가흥의 명소 남호에 도착했을 때는 늦여름의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있을 때였다. 수려한 남호의 동남안에는 복구해 만든 유람선 한척이 조용히 떠있었다. 길이가 16메터이고 너비가 3메터인 유람선중앙에는 탁상과 다기들이 놓여있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에 참가했던 대표들은 바로 이 유람선에서 마지막 회의를 소집했던것이다.

가흥에서의 답사를 마치면서 1935년 한국림시정부 비상회의 역시 가흥 남호의 한 유람선에서 소집되였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 대회에서 김구는 사실상 한국림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여 민족주의 진영의 수반으로 부상하였던것이다.

/ 김성룡 사진 조향란, 조선옥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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