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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19)—각지 청년회결성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17일 12:44
192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북벌전쟁은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두려움 모르는 북벌군장병들은 파죽지세로 호남, 강서전역을 휩쓸었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들이 일떠나 도와나섰다. 그리하여 이해 년말까지 북벌군은 수배나 더 많은 군벌부대를 전승하고 광서, 광동으로부터 호남, 호북, 강서지역을 통제하게 되였다.

중국혁명에 몸담고 싸웠던 조선혁명가들은 북벌전쟁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유망한 청년들을 더 많이 단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남아있던 의렬단단장 김원봉은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휘하에 집결시키기에 노력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하자 그는 기타 의렬단간부들과 함께 황포군교 무한분교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일찍부터 무한에 거주하고있던 조선교민들속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찾았으며 무한의 여러 혁명단체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때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당군내에 있던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모여왔다.

무한의 중남재경대학(中南财经大学) 원계성(袁继成) 교수는 당시 무한에서의 조선혁명가들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해 주었다.

(원계성 교수) 《황포군관학교가 가장 일찍 무한에 정치과를 설치하려 할 때 한편으로는 정치과 5기 학생들을 무한에 이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에서 전국을 상대로 학생들을 모집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무한에 조선혁명청년회가 있었는데 청년회를 주도로 각지에서 많은 우수한 한국청년들이 무한에 오게 되였습니다. 후에 무한군교, 무한분교, 중앙군사정치학교로 명칭을 바꾼 중앙군관학교 무한분교에는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무한에는 일찍부터 조선교민들이 중약과 인삼 장사를 하면서 살고있었다. 20년대부터 조선교민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혁명자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중국군인으로 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한구에 왔고 화북과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 있던 조선청년과 학생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혁명정부가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온후 진보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청년과 군인을 단합시켜 무한에서 류악혁명청년회(留鄂革命青年会)를 비롯한 진보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한의 조선혁명청년회에는 근 50명에 달하는 회원이 포함되였다. 이가운데서 백득림(白得林), 권준, 홍의표(洪义杓), 리검운(李检云), 오세진(吴世振), 리우각(李愚悫), 로세방(劳世芳)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거나 쏘련에서 국민혁명군내에 파견한 군관들이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军事政治学校) 무한분교 재학생들인 진공목(陈公木), 진갑수(陈甲秀), 사검인(史剑仁), 안동만(安东晚), 류광세(刘光世), 박우균(朴禹均) 등 24명이 있었다. 뿐만아니라 무창중산대학(武昌中山大学)과 남호학병단(南湖学兵团), 항공국(航空局)의 학생들 그리고 네명의 교민대표가 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류악혁명청년회는 민족독립혁명과 사회혁명에 종사하며 세계혁명대중과 련합하여 세계혁명완수에 기여한다는 기본강령을 제기하였다. 청년회는 상무집행위원으로 사무부에 권준, 재무부에 안동만, 선전부에 홍의표, 조직부에 진갑수, 조사부에 진공목을 선정하고 후보위원으로 사검인과 로세방을 선출하였다.

청년회가 조직되자 청년회 비서 권준은 1927년 류악혁명청년회의 설립을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통보하고 청년회 승인과 지원을 받아냈다.

1925년부터 26년까지 중국국공합작이 고조를 이루었고 북벌군의 거듭되는 승전은 사람들을 크게 고무시켜주었다. 특히 중국에 망명한 조선혁명자들과 수많은 조선청년들은 이에 감화되여 중국혁명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확정지어갔다.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의렬단은 이 시기 조직세를 확장시켰을뿐만아니라 비교적 성숙된 운동리념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관헌의 자료를 보면 의렬단은 대체로 1926년 20개조의 강령을 제정하여 단의 리념적 지표를 더욱 구체화, 명료화, 체계화시키면서 발전의 면모를 보였다.

의렬단의 강령을 보면 첫째, 조선민족 생존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근본적으로 타도하고 조선민족의 자유독립을 완성한다 하였고 둘째,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세력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국가를 건립함이라하였으며 셋째,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을 건립한다고 하였다.

의렬단의 이와 같은 주장은 20년대초의 투쟁강령이였던 《조선혁명선언》의 계승과 발전으로 판단할수 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것은 당시 모든 조선혁명가들의 공동한 리념이였다. 그리고 이 시기 의렬단은 공산주의의 영향하에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되였고 대중운동에 관여하게 되였음을 알수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각지에 공회조직과 농회조직을 설치함으로써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을 혁명에로 이끌고있었다. 하여 조선혁명자들은 이때에 와서 국민당과 북벌군이 승승장구로 전진할수 있은 가장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대중운동에 기반을 두었다는것을 보아냈기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와서 조선독립운동에서 간과할수 없는 유일당촉성운동이 각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여 일정한 성과를 보기도 하였다.

일찍 상해림시정부가 수립될 때 려운형과 리회영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이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으로서 당조직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수립이 급급했던 탓으로 이 문제가 중시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1923년 6월 독립운동의 분렬과 림시정부내 파벌투쟁이 심각한 상황에서 김규식, 신숙(申肃), 리청천(李青天) 등은 로씨야 극동의 리동휘, 한명세(韩明世)와 회합하여 《민족운동의 통일적 혁명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한국독립당조직안》을 작성하였다.

1924년 상해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대동단결론이 제기되였고 이들의 영향하에 1926년 10월 16일에 대독립당(大独立党)조직 북경촉성회(促成会)가 결성되였다. 북경촉성회는 조성환(曺成焕), 장건상, 강구우(姜九禹)를 비롯해 40여명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뒤 1927년 3월 21일에는 상해촉성회가 창립되고 150명회원을 확보하였다.

당시 김성숙, 오성륜, 장지락(张之樂--김산)을 비롯해 광주에 약 300명에 달하는 조선혁명자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창립하고 회원 170여명을 받아들였다. 광동에서는 류월동지회 회원과 의렬단 단원들이 주도하였기때문에 보다 많은 회원을 가질수 있었다. 그리고 의렬단의 외곽단체였던 류악조선혁명청년회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로 7월 10일에는 150명 회원을 가진 무한촉성회가 성립되였다. 여기에서는 의렬단원 박건웅(朴建雄)이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뒤 30명 회원을 가진 남경촉성회도 창립되였다. 여기에 의렬단원 권준이 참여하였다.

박건웅과 김성숙가족(오른쪽 첫 사람이 박건웅).

이처럼 1926년 10월부터 1927년 9월까지 근 1년사이 중국의 5대 도시에 유일당촉성회가 결성되였고 11월에는 5개 촉성회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 련합회를 결성하였다.

각지 촉성회 회원들을 보면 대부분이 청년들이였다. 그리하여 12월 4일, 조선청년회 련합체인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国本部韩人青年同盟)이 창립되였다. 오성륜과 장지락도 동맹의 23명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유일당촉성회와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은 이시기 로농대중의 력량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경제투쟁으로부터 정치투쟁단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창공격전이 승리한후 국민혁명군 총사령인 장개석은 남창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수하 군인을 동원해 국민당중앙을 호령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광주의 국민당 중앙위원들을 남창에 초청하였고 당중앙과 혁명정부는 혁명군 총사령부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국민당정부는 해외에서 귀국한 왕정위(汪精卫)가 장악하고있었다. 왕정위는 장개석이 조작한 중산함사건과 당무정리안에 련루되여 한때 권력을 잃고 해외로 망명해있었다.

북벌전쟁이 승리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국민당내 좌우분렬이 더욱 우심해졌고 당, 정, 군 최고실력을 장악하려는 장개석의 야심이 더욱 적라라하게 나타났다. 이 기회를 빌어 왕정위는 귀국하여 장개석을 반대하는 좌파들의 힘에 의해 다시 당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였던것이다.

왕정위와 국민당좌파의 중앙위원들은 장개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연히 무한으로 떠났다. 쏘련의 대표인 보로딘도 결연히 장개석을 비판하면서 무한으로 떠나갔다. 중국혁명은 줄곧 쏘련의 막강한 후원과 지도를 받아왔기때문에 보로딘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리하여 대부분 중앙위원들은 무한에 가서 중앙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는 장개석은 한면으로는 직계부대를 동원하여 연해지역으로 진출하게 하고 다른 한면으로는 부분적인 국민당중앙위원들을 남창에 눌러두고 남창정부를 수립하여 무한정부와 대립하고있었다.

11월 9일 장개석은 광동과 복건린접지에 웅거해있던 직계부대에 북벌명령을 내렸다. 하응흠(何应钦)은 1군 제3사단과 제7사단을 이끌고 산두(汕头)로부터 출병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였다. 강서에서 손전방의 주력이 이미 소멸된 상황이기에 복건경내의 손전방부대는 크게 저항하지 않고 급급히 퇴각하였다. 그리하여 하응흠은 별로 치렬한 전투를 거치지 않고 쉽게 복건을 장악하게 되였던것이다.

당내 권력다툼을 진행하는 한편 장개석은 드디여 자기의 직계부대 주력을 동원하였다. 그는 국제도시인 상해를 차지함으로써 강소와 절강의 대재벌의 지지와 제국주의의 지지를 받아 세력기반을 다지려했던것이다.

1927년부터 북벌군은 세갈래로 나뉘여 절강, 안휘, 강소 등지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3월하순에 이르러 북벌군은 항주, 상해, 남경, 안경(安庆) 등지를 공략함으로써 전반 장강이남 지역을 장악하였다.

국민혁명군 제2군과 제6군이 장개석의 직계부대인 1군 각 부대와 함께 남북으로 상해를 협공하였다. 제2군과 6군의 많은 조선인 장병들도 계속해서 북벌군과 함께 남경 공격전에 참가하였다. 2군 기관총대에는 련장으로 있었던 조선인 장교 리동화(李东华1893--1944)가 있었다. 신악(申岳)이라는 이름으로 일찍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 5기(한국독립기념관에서는 4기로)를 졸업한 리동화는 2군기관총대 장교로 부임했으며 북벌전쟁에서 맹활약을 보였다. 그는 2군을 따라 호남, 호북전선에서 싸웠고 북벌군의 의창(宜昌)공격전과 남경공격전에서 선봉으로 맹활약을 보였다.

조선평안남도 평원(平原)사람인 리동화는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했고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후 북벌전쟁에 참가했던것이다. 그후 리동화는 조선의용대 성립에 참가하고 김원봉과 함께 광복군 제1지대에서 반일투쟁을 진행하기도하였다.

북벌군의 승리적인 진군과 함께 북방에서는 혁명사상을 접수한 풍옥상이 서북군을 끌어모아 북벌군에 호응하였다. 풍옥상은 1926년 9월 17일 수원(绥远)에서 선서하고 수하부대를 혁명군으로 편성하였다. 9월하순 풍옥상의 주력부대는 동으로 진격해 섬서에서 작전했으며 11월에 섬서 전부를 점령하였다. 그뒤 풍옥상부대는 두번째단계의 북벌에 나선 혁명군과 함께 화북대지에서 오패부와 손전방의 잔여세력을 제거하고 장작림군벌부대를 동북으로 축출해내였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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