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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20)—반제운동과 반혁명 폭란속에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19일 13:05
북벌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1927년에 중국력사에는 수많은 사변들이 나타났다.

1927년초의 중국 남방대지는 전란이 계속되였고 호남, 호북에서는 농민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무한과 구강에서는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고 상해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무장봉기가 일어나 북벌군의 공격을 적극 도와나섰다. 전반 중국대지가 혁명의 열조에 휩싸였고 국벌정부의 억압과 제국주의의 수탈에 허리를 펴지 못하던 억만 중국인민이 다투어 혁명에 나섰다.


북벌군이 북벌을 시작해 불과 1년도 안되는사이에 혁명력량은 주강류역으로부터 장강류역으로 신속히 발전하였다. 수십만 무한인민은 거리에 떨쳐나와 북벌군을 환영하였다.

왕정위를 주석으로 한 국민혁명정부는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왔고 따라서 무한은 혁명중심으로 되였다. 황포군관학교도 이때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무려 8000여명 청년들이 학습할수 있는 규모로 확대되였다. 광주에서 황포군교에 입학하였던 조선청년들도 무창에 왔고 전국각지에서 모여온 조선청년들과 혁명자들도 선후하여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창수비사령을 맡은 엽정부대에는 엽정을 따라 북벌전쟁을 해온 조선인부대가 있었다.

무한국민정부 옛터.

무한의 프랑스조계지 설명도.


무한에 모인 조선혁명자들과 조선청년들은 의렬단을 중심으로 류악혁명청년회를 조직해 혁명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1월, 무한인민들은 국민정부의 천도(迁都)와 북벌승리를 경축하는 성대한 집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반제반봉건선전을 진행하였고 강연회를 가졌다. 1월 3일,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 선전대가 강한관(江汉关)부근에서 수만명의 군중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가졌다. 이때 부근에 주둔했던 영국해병이 간섭해나섰다.


그들은 16정의 기관총을 걸어놓고 하늘에 총을 쏘면서 군중들을 위협하였다. 집회에 모인 로동자와 학생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병사들은 총창을 들고 무고한 군중들에게 덮쳐들었다. 충돌에서 중국로동자 한명이 숨지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이에 격분한 더욱 많은 군중들이 영국 조계지로 돌진하였다.

사건이 발생한후 국민당정부는 영국당국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고 영국 해병대의 철수와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한편 격분한 무한인민들은 항의시위를 전개함과 동시에 전면적인 파업을 시작하였다.

무한의 사학자 원계성교수.


무한 중남재경대학의 원계성교수는 당시 무한의 조선인들도 동방피압박민족 인민들과 함께 이번 투쟁에 참가했다고 증언하였다.


(원계성 교수): 《한구주민들이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는 운동이 고조되고있을 때 영국과 일본, 프랑스 조계지의 인디아 고용인들이 윁남과 조선인을 련합하여 무한에서 동방피압박민족조직을 만들어 무한인민들을 지원하여 영국 조계지 회수를 도와주었고 시위도 하였습니다. 그 영향이 컸습니다.》


1월 6일 구강에서도 영국 해병이 무고한 인민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각지 수십만 군중들은 계속 제국주의자들의 폭행에 항의하였고 국민정부는 적극적인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2월과 3월 선후하여 한구와 구강의 영국조계지 회수에 관련한 협의가 체결되였다. 이로써 제국주의자들은 아편전쟁이후 단합된 중국인민앞에 처음으로 머리를 숙이고 조계지에서 철수하게 되였던것이다.

무한의 반제반봉건투쟁의 승리는 전국인민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각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와 농민들이 일떠나 대지주, 자산계급과 투쟁하였고 군벌통치와 제국주의를 반대해 싸웠다. 이러한 투쟁물결속에 조선혁명자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남경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자들은 1927년 2월에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를 조직하였다. 일찍부터 이곳에서 활동하던 의렬단원 류자명(柳子明)을 중심으로 신공제(莘公济), 김규식 그리고 무한혁명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안동만(安东晚)을 비롯해 중국인, 윁남인, 인디아인들을 모아 련합회를 조직하였다. 김규식이 회장으로 추대되고 안동만이 한국부 상무(常务)로 활동하였다. 련합회는 또 기관지 《동방민족(东方民族)》을 조선문, 중문, 영문으로 출간함으로써 민족독립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호소하였다.

1927년 3월, 장개석이 직계부대를 동원해 남경, 상해지역으로 진격해왔다. 중국의 최대도시인 상해는 당시 여러 제국주의 세력이 웅거해있는 국제도시였고 공상업중심지였다. 장개석은 상해를 차지함으로써 중국의 경제명맥을 쥐고 제국주의세력에 의지해 자기의 지반을 굳히려 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일찍부터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수십만 로동자들을 단합시키고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파업을 조직하고있었다.

마관조약(马关条约)이 체결된후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의 여러 중심도시에 공장을 세우고 중국 로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특히 일본은 상해에 가장 많은 공장을 세웠고 로동자들에 대해서도 가장 가혹하였다. 1925년 2월, 상해 일본인 방직공장 로동자들이 공장측에서 로동자들을 구타하고 공장에서 쫓아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분개한 로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하였고 일본공장주는 일본군경들을 시켜 공장 로동자대표이고 공산당원인 고정홍(顾正红)을 살해하였다. 일본인이 고정홍을 살해한 소식이 전해지자 더욱 많은 로동자와 학생들이 항의해나섰다. 그리하여 5월 30일에 중외를 진감한 《5.30》참안이 빚어지게 되였던것이다. 상해에서의 이번 중국인 반일반제국주의 투쟁에 조선인 열혈청년들도 참가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서재현(徐载贤)이다.


서재현(1906.11.15--)은 황해도 장연(长渊)사람으로서 1924년 2월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산하의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学校)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교내 소년회(少年会)를 책임지고 《나라를 찾는데는 돈이냐 피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5년 동제대학(同济大学)에서 공부하던 서재현은 상해대학 학생련합회의 호소에 따라 일제를 반대하는 동맹휴교,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상해 동제대학과 호강대학(沪江大学)에 조선인 학생이 가장 많았다. 그는 두 대학의 25명 조선학생을 데리고 중국학생들의 성세호대한 반제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재현은 조선인 최병락(崔炳洛), 김규선(金圭善) 등과 함께 5월 30일 11시경부터 상해역전에서 중국인 학생들과 회합하였다. 시위대오는 절강로(浙江路) 남쪽을 향해 전진하면서 조계지를 회수하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쳤다.

오후 2시, 시위대오가 남경로(南京路)에 이르렀을 때 조계지 영국경찰이 학생들을 향해 사격하여 수십명의 사상이 빚어졌다. 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은 더욱 큰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6월 1일부터 5일까지 많은 학생들이 가두연설을 하고 전단배포하면서 제국주의자들의 죄악을 널리 알리였다. 한편 더욱 큰 희생을 피면하기 위해 공산당에서는 조직적으로 로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조직하게 되였고 국민당정부와 북경의 군벌정부는 제국주의자들과 담판했지만 큰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후 서재현은 30년대까지 계속 상해에서 활동하였고 1944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으로 사업하기도 하였다.


《5.30》참안이 있은후 전국 각지에서도 선후하여 로동자파업과 학생시위가 진행되여 반제반봉건투쟁을 한껏 고조시켰다. 중국공산당은 창건된 그날부터 로동운동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특히 당의 본거지인 상해에서의 로동자조직은 공산당의 령도하에 전례없이 단합되였다.

1927년 북벌군이 상해로 진격해오자 공산당은 상해 로동자들을 령도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조건이 성숙되지 못한데다가 조직이 잘되지 못했고 또한 사전에 봉기소식이 루설되는 등 원인으로 두차례 무장봉기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27년 3월, 공산당은 상해 로동자들을 이끌고 세번째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상해에 있던 공산당중앙의 주요성원들이 모두 봉기령도에 참가하였고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인 주은래가 직접 해군부대의 장병훈련과 로동자 무장을 조직하였다. 3월 21일, 상해의 로동자들이 전부 파업에 들어갔고 로동자 규찰대가 무장하였다. 로동자 규찰대와 군부대의 혁명군인들은 무기를 들고 경찰서와 병영, 군부대 주둔지를 공격하였다.

제3차 상해로동자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여 하루사이에 시구역 전부를 점령하였고 시교의 반동군벌부대는 접전하기전에 북벌군 정규군이 공격해오자 모두 철수해버렸다. 그리하여 상해는 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규찰대에 의해 통제되였다. 한편 장개석의 1군 주력사단이 상해근교에 주둔하였고 남경은 2군과 6군이 점령하고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장개석은 상해의 매판자산계급과 제국주의자와 타협하면서 상해의 경제명맥을 틀어쥐였고 계속 무한정부와 대항하려 시도하였다. 당, 정, 군 실권을 한몸에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은 장개석은 상해를 확실히 장악하여야 했고 왕정위와의 권력쟁탈을 계속하려면 더욱 막강한 제국주의세력의 지원이 있어야 하였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드디여 손중산의 반제반봉건투쟁리념을 뒤엎고 철저히 혁명을 배반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당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권립 교수) 《북벌전쟁이 승리에로 나가고 북양군벌의 암흑한 통치가 무너지고있을 때 장개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은 국공합작을 배반하고 총칼을 중국공산당에 돌렸으며 로동자 규찰대에게 돌렸습니다. 북벌전쟁승리의 성과는 이렇게 장개석에게 빼앗겼습니다. 4월 18일에는 광주에서도 대학살이 시작되였습니다.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련루되여 체포되고 살해되였습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상해 깡패들을 사촉하여 로동자 규찰대와 충돌하게 하였으며 소란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정규군을 풀어 로동자들의 무기를 압수하였다. 13일에 상해총공회는 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20만 로동자와 학생들이 대 시위를 진행하였다. 시위대오가 보산로(宝山路)에 도착했을 때 장개석 군대는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보산로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널렸고 붉은피가 짙게 물들었다. 그리고 보로딘, 진독수, 담평산, 오옥장, 모택동을 비롯한 197명 공산당요인에 대한 수배령이 내렸다.

《4.12》반혁명폭란.


광주의 리제심(李济深)도 4월 15일에 공산당을 탄압할데 관한 명령을 내렸다.

《4.12》반혁명정변이 일어난후 각지의 중국공산당은 지하투쟁으로 들어갔으며 일부는 무한에 집결하였다. 각지의 진보적인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공산당의 중앙지도자들은 계속 국민당내 좌파에 희망을 품고 국민당과 타협했기때문에 혁명성과를 잃어버렸다. 주은래를 비롯한 부분적인 공산당중앙위원들은 무력항쟁을 주장했지만 당시 공산당의 중앙서기인 진독수는 국민당좌파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전국대지는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였고 먹장구름이 하늘을 가리웠다. 새롭게 나타난 장개석 반혁명군벌정권에 대해 사람들은 분개하면서도 적당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있었다. 조선혁명자들도 큰 실망을 안고 방황하였고 새로운 혁명의 길을 찾아 무한으로 떠났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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