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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1)─관내에서의 조선민족 반일투쟁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02일 15:03

2003년 3월 20일,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조선족인민의 훌륭한 아들인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문정일동지의 추도식이 북경시 팔보산혁명렬사릉원 고별청에서 열렸다. 추도식장에는 당과 국가의 주요 지도자들과 국가 해당 부문에서 보낸 화환이 놓여져있었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주임을 비롯한 지도자들, 문정일동지의 유가족과 친우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조객들이 비통한 심정을 안고 문정일동지와 영결하였다.


로혁명가 문정일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포화가 울부짖는 태항산항일근거지와 적후를 넘나들면서 피어린 항쟁을 해온 로혁명가 문정일동지를 영결하는 우리들의 머리속에는 가렬처절했던 전쟁년대의 수많은 렬사들이 떠올랐다.

신해혁명, 북벌전쟁, 광주봉기, 정강산투쟁, 2만 5천리 장정 그리고 삼엄한 적후에서의 지하투쟁, 태항산항일투쟁을 비롯한 중국력사의 중요한 사변에는 모두 우리 민족 렬사들의 피어린 자국이 남아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 그 어디에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진리를 위해 싸운 조선족선렬들의 력력한 발자욱이 남아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미 백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계는 새로운 21세기에 들어섰으며 기계문명을 넘어서 정보문명사회로 본격 발전하고있다.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발전, 화해의 분위기가 주된다. 그러나 세계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국가와 민족과 종교로 인한 국부적인 분쟁과 쟁탈이 의연히 존재하고있고 국부적인 전쟁까지도 가셔지지 않고있다. 랭전시기의 사유가 의연히 존속되면서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점에서 《격정의 세월》, 우리민족 항쟁의 력사를 다시 돌이켜보고 불멸의 발자취를 답사하는것은 자못 중요한 의미가 있다.    

력사는 거울이다. 력사를 거울로 삶고 그속에서 경험을 총화하고 미래를 개척해나가는것은 인류의 지혜이고 인류발전의 소중한 재부이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 아직까지 민족의 숨결, 선렬들의 발자취가 남아있어 우리를 부르고있다. 똑같은 자유와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안고 싸워왔지만 그 결과는 무엇때문에 그다지도 판이하게 달랐던가? 우리는 구경 무엇을 바라고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미래는 구경 어디에 있는것일가? 날로 새로워지고 발전하고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평화와 발전, 대화와 민족화해라는 새로운 시점으로 우리의 력사를 재조명하고 그 진실을 밝히며 진리를 위해 항쟁해온 선렬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으로 민족자강의 의지를 고양시키는것이 답사를 시작하는 우리의 바램이였다. 


관내에서의 조선족반일투쟁사는 또한 그 자체의 특수성을 안고있다. 원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우리 민족의 관내지구에서의 혁명투쟁은 뚜렷한 특점이 있다. 우선, 민간의 대중적인 혁명운동보다는 주로 직업혁명가들의 혁명투쟁이였고 직업혁명가들로 이루어진 혁명단체들의 혁명투쟁이였다. 이를테면 양림동지, 중국공산당 하북성당위원회 서기 리철부동지, 북경시 당위원회 조직부장 김산, 당산시 공작위원회 서기 주문빈, 김약연 선생 등 혁명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혁명단체들로는 조선민족혁명당, 청년전위동맹 등이 있었다.

두번째는 모두가 직업혁명가였기 때문에 그들의 자질은 매우 높았다. 20세기 40년대 중국항일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던 마이선생은, 조선혁명가들은 모두가 탁월한 군사지휘원이며 모범적인 정치가들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믿음직한 자료에 의하면 관내에서 싸운 조선의용대 성원의 90%는 황포군관학교나 기타 군정대학의 출신들이였다. 그리고 이들중에는 중산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도 있었다.

세번째 특점은 관내 조선혁명가들은 중국혁명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관내지구에서 싸웠기에 그 영향력이 컸다. 남만, 동만 유격대, 료하유격대를 비롯한 일곱갈래의 반일유격대는 동북에서 자체의 지위와 의의를 갖고있다. 관내지구에서의 우리 혁명가들이 참가한 혁명투쟁 이를테면 북벌전쟁, 남창봉기, 광주봉기, 2만 5천리 장정… 이러한 사건들은 전국의 혁명투쟁에 직접 영향을 준 보다 차원이 높은 사건인만큼 그 영향력도 아주 컸다. 이런 자랑찬 력사는 우리 민족 해방사에서, 전반 중화민족의 해방사에서 모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제국주의 렬강들은 중국에 대한 침략과 략탈, 식민지화의 발걸음을 재우쳤고 부패한 만청정부는 거듭 제국주의자들에게 굴욕적인 타협을 진행하면서 령토와 국권을 팔아먹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도 근대화한 군국주의 강국의 길을 걷게 되였으며 드디어 제국주의행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서방제국주의와 신형의 일본군국주의는 저들의 침략야욕을 전반 아세아에 돌렸다.

부패한 만청정부의 타협과 굴욕으로 하여 중국은 흑룡강이북의 수많은 령토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향항, 오문을 내주고 많은 주요 도시들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제국주의자들은 함포를 내세우고 피비린 탄압과 수탈을 감행하였고 곳곳에 조계지를 세우고 수억명의 중국인민을 수탈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일로전쟁을 통해 로씨야를 물리치고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식민지통치를 가심화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세아 각국은 의연히 봉건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부패한 봉건제도로 하여 각국 국내에는 여러가지 모순으로 가득하였고 부패한 통치자들은 국내로는 인민들에게 가혹한 착취와 피비린 탄압을 계속하고 대외로는 제국주의자들에게 타협하면서 국권을 상실하고 하루하루의 안일만 영위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이중의 압박하에 허덕이던 전반 아세아인민들은 반제반봉건이라는 공동의 력사적과제에 직면하게 되였다.


1911년, 중국에서는 손중산이 령도하는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무창봉기의 승리는 수천년 존속해오던 부패한 봉건제도를 뒤엎고 자산계급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손중산이 령도한 자산계급혁명은 부패한 만청정부를 뒤엎고 자산계급혁명의 승리를 선호하였지만 그 혁명은 철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만청정부가 무너지면서 각지 군권을 잡은 봉건관료들이 거듭되는 복벽을 시도하였고 드디어 각지 봉건할거세력의 혼전국면이 나타났다. 억만 중국인민은 의연히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이중 수탈에 허덕이고있었다.

아세아 동방에 자리잡은 조선도 역시 국내외로 수많은 모순을 안고있었다. 일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조선에 대한 병탄부터 시작했다.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반도에 발을 붙이기 시작한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 《을사5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와 군권을 완전히 박탈하였으며 조선을 호시탐탐 노려보는 로씨야를 물리치고 1910년 《합방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드디여 조선을 완전 독점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인민의 항쟁의지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수 없었다. 조선에서의 항쟁은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3.1운동,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조선내 각종 비밀결사 투쟁과 로농대중 그리고 학생투쟁이 계속되였고 중국과 조선의 국경지대와 중국 동북, 로씨야의 씨베리야에서 폭넓은 무장투쟁이 전개되였으며 중국 관내를 본거지로 의렬투쟁과 군사,정당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였다. 그리고 아메리카지역을 중심으로 외교활동과 독립군 지원활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조선인이 살고있는 그 어느 곳에서나 항쟁의 불길은 꺼질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권립):우리 민족 선각자들은 관내지역을 우리 민족 해방투쟁의 싸움터로, 활무대로 간주해왔다. 일찍 1910년 4월에 우리 민족 해방투쟁의 거두들인 신채호, 안창호, 조승환 등은 산동성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동북 모지역에 반일기지를 건립할데 대하여 의논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해온 수많은 조선지사들이 중국혁명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는 투쟁전략을 확정하게 된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조선이 일제의 완전식민지로 전락되여 모든 국권을 상실한 반면 중국은 자산계급혁명이 활발히 진행되고있는 상황이였다. 다음은 중국과 조선이 모두 반제반봉건의 공동된 력사적과업을 짊어지고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것은 일본이 로씨야와의 쟁탈전쟁을 드넓은 중국 만주땅에서 진행함으로써 중국에서의 로씨야의 기득권을 회수했다. 그러므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야심이 로골화된 상황에서 일본제국주의는 또한 중국과 조선의 공동의 적이였다.


태항산에서의 조선의용군

이때로부터 중국 관내에서의 조선민족의 반일투쟁사가 본격 시작된다. 손중산을 따라 신해혁명에 참가한 신정, 북벌전쟁에 참가한 양림, 김준섭,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주봉기와 남창봉기에 참가한 수많은 조선족투사들, 2만 5천리 장정을 진행한 양림, 무정, 지하전선에서 투쟁한 리철부와 김산, 조선의용군의 태항산 항일투쟁… 수많은 렬사들이 독립과 자유를 위해, 진리를 위해 싸웠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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