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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민족사업에 충직한 로간부 문정일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5.14일 08:12
대형계렬기획보도-《중국조선족 백년백인》(16)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우수한 민족사업 지도자 문정일은 1914년 음력 3월 20일에 조선 함경도 회령군에서 태여났다. 문정일의 원명은 리운룡이다.

문정일은 일찍 1940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선후로 조선의용군 제2지대 분대장, 중공연길현위 부서기, 현장, 연변전원공서 부전원, 전원, 길림군구 정치부 부비서장 등 직무를 담임했다. 1950년 조선전쟁이 일어난 후 중국인민지원군 후근부 운수처 처장, 지원군 정치부 보위부 부부장으로 있었으며 1953년 조선전쟁이 끝난 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재정사 부사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고문 등 직무를 력임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후 1920년 7살나던 해에 문정일은 부모를 따라 중국 연변의 훈춘으로 이주해왔다. 1929년 소학교를 졸업한 문정일은 훈춘현립중학교에 들어갔으며 당시 애국주의, 민주주의 진보적사상을 갖고있던 교장으로부터 신문화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난 후 연변에서 민중의 반일정서가 높아졌다. 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문정일도 어릴적부터 일제놈들을 뼈에 사무치게 저주해왔던터라 반일민중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삐라를 뿌리고 담벽에 일제를 규탄하는 구호를 썼다.

1934년 가을, 문정일은 공부를 계속할 생각으로 동창생들을 찾아 훈춘에서 상해로 출발, 상해에 도착해서 다시 기선을 갈아타고 남경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이미 남경에 와있는 고향의 동창생 김학무 등 세사람과 함께 중앙대학교옆에 세집을 구하고 곧바로 중앙대학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

남경에 있는 기간 문정일은 중문으로 된 맑스-레닌주의저서와 《정치경제학기초》등 진보서적들을 빌려다 읽었다. 학습을 통해 그는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였으며 차츰 진보적인 청년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1937년 일본침략자들이 로구교 《7.7》사변을 발동한 후 진보적청년들은 모두 군사를 배워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인식, 문정일도 조선청년들과 함께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들어갔다. 당시 훈련반의 대장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신악이였다. 훈련반 각 대의 대장과 교관은 모두 조선사람들로 구성되였으며 학교에서는 군사학을 강의하는 교관들을 보내 강의를 해줬다. 10개월후인 1938년 6월, 문정일은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6기 보병과를 졸업했다.

1938년 10월, 한구에서 조선의용대가 정식으로 창립됐다. 의용대 총대장은 김약산이였으며 문정일은 제2지대 2분대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 지부서기로 있었다. 1939년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서는 중국공산당 지하당지부를 창립, 이듬해인 1940년 1월 문정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부터 그는 당조직의 활동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조직에서 맡겨준 임무를 어김없이 완수했다.

1941년 9월, 팔로군 부총사령원 팽덕회는 락양판사처에 전보를 보내 문정일을 태항산항일근거지 팔로군전방사령부 참모부에 보낼것을 지시했다. 팽덕회사령원의 지시에 따라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도착한 후 문정일은 1941년 12월의 호가장전투와 1942년 5월의 일본침략자를 족치는 전투에 참가했다. 1943년부터 문정일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120사 정치부 적공부에서 사업하는 한편 진수근거지정부의 참의원과 진서북조선독립동맹 분맹 주임직무를 맡았다. 그후 1945년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간부심사사업을 책임졌다. 1938년 10월-1941년 9월, 팽덕회의 지시로 락양을 떠나기까지 문정일은 락양에서 조선의용대와 중국공산당 지하투쟁 일인이역을 담당했다. 그래서 《락양련락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문정일은 30여명의 간부를 거느리고 연변으로 진출, 연변개척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연길현 및 전반 지역의 당정군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군중을 발동하여 토지개혁을 하였으며 일본관동군 잔여세력과 국민당토비들을 숙청하고 조선족청년들을 조직, 동원하여 해방전쟁에 참가시켰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문정일은 동북인민정부 농림부 비서처 처장으로 전근되였다.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한 후 문정일은 중국인민지원군 후근부 운수처 처장, 지원군 정치부 보위부 부부장으로 있으면서 맡은바 임무를 완수했다. 1952년 문정일은 중조 두 나라 군대간의 협동작전에서 세운 공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유독립 2급훈장을 수여받았다.

1953년 조선전쟁이 끝난 후 문정일은 귀국하여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재정사 부사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후 그는 사업터를 떠나는 날까지 30년 남짓한 동안 줄곧 나라의 민족사업에 종사하면서 민족발전과 민족단결을 위한 사업에 일신을 공헌했다.

문정일은 늘 소수민족지역 더우기는 제일 편벽하고 가난한 산촌과 목축구에 내려가서 상황을 료해하고 재정면에서 부딪친 당지 소수민족인민들의 곤난들을 적극 해결해주었다. 1960년대초 그가 조사팀을 거느리고 복건성 녕덕현의 한 편벽한 써족마을에 내려갔을 때 그는 당지의 강에 다리가 없어 생산과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있는것을 직접 보았다. 그는 이 상황을 복건성 지도일군들에게 반영함과 동시에 소수민족인민들을 위해 다리를 건설할것을 건의했다. 다리가 놓여진 후 당지의 써족인민들은 이 다리를 《민족단결교》라고 친절히 불렀다.

《문화대혁명》이후 얼마 안돼 문정일은 또 조사조를 거느리고 해남 리족묘족자치주에 내려갔다. 그는 당지 소수민족인민군중들이 《문화대혁명》에서 억울하게 루명을 쓰고 박해를 받아 세상을 뜬 리족주장 황국흥을 몹시 그리는것을 알게 되였다. 황국흥은 항일전쟁시기 이 지구 유격대의 책임자로 있었던 항일간부였다. 문정일이 직접 그의 묘지를 찾아갔더니 묘앞에는 나무비석도 없었다. 복경에 돌아온 후 문정일은 이 상황을 즉시 지도부에 회보하고 5만원을 보내 이 소수민족간부의 묘지를 수선하도록 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문정일도 허다한 혁명로간부들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았다. 《4인무리》가 제거되고 당중앙 11기 3차 전원회의가 열린 후에야 루명을 벗은 문정일은 1979년에 중공중앙 규률검사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이듬해에는 제6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되였으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당조성원, 규률검사위원회 당조 조장직을 겸임하고 후에는 고문으로 있었다.

문정일은 혁명사업에 참가한 50여년동안 새 중국의 창립과 당과 나라를 위해, 소수민족지역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해 수많은 사업들을 하였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1989년 문정일에게 《53년동안 민족단결진보사업에 몸바친 문정일동지에게 특별히 이 영예증서를 수여한다》라고 씌여진 영예증서를 발급, 문정일동지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2003년 3월 14일, 문정일은 북경에서 90세를 일기로 병환으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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