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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늦깎이 문학공부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3.30일 09:27
(흑룡강신문=서울지사) 주위에서는 나를 보고 늦깎이 대학생이라고 하지만 졸업식장에서 나는 나보다 연장자인 진짜 늦깎이 대학생들을 무수히 만났다. 자신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 나의 유일한 장끼 — 공부

  어릴 때 나의 집은 그 시절의 여느 가정들이 그러했 듯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아버지, 어머니에 고모와 삼촌도 함께 살았고 내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막내고모는 나보다 열한살 더 많았는데 내게는 언니같은 존재였다. 막내고모는 어린 조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좋아했는데 뭘 가르쳐도 나는 잘 따라했고 그 재미에 고모는 더 신명나서 내게 더욱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다.

  다섯살 무렵에 『심청전』을 앵무새처럼 줄줄 외우는 내가 기특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를 동네의 독보조에 데리고 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심청전』을 외우게 하곤 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구구단을 다 떼고 한글을 익혔다. 나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나는 공부가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특히 『조선어문』이 제일 좋았다. 책이 귀한 그 시절 나는 구들에 굴러다니는 책이 보이기만 하면 다 집어들고 읽었다. 개학 첫날 교과서를 타 오면 나는 책가위를 씌우며 『조선어문』 교과서 한 권을 다 읽어버려야 성이 찼다. 매일 외우기 숙제를 일등으로 마치고 선생님께 검사를 마친 후 첫 사람으로 집에 돌아가는 게 너무 즐거웠다. 학기마다 일등은 떼놓은 당상이었고 소학교부터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서까지 나는 줄곧 학습위원이었다.



▲ 1986년판 소학교 『조선어문』 교과서

  ◇ 옛말을 좋아했던 소녀

  나는 어릴 때 할머니 손 아래서 자랐다. 낮이면 할머니를 따라 돼지풀을 뜯으러 다니고 할머니가 돋보기를 쓰고 곡을 붙여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소리를 노래처럼 들었고 저녁이면 할머니의 팔베개를 베고 옛말을 들으며 꿈나라로 들어갔다. 그 순간이 나에게는 제일 행복한 시각이었다. 할머니의 옛말주머니는 하늘의 뭇별처럼 무궁무진하고 마를 줄 모르는 샘처럼 해도 해도 동 날 줄 몰랐다. 이야기를 하다가 소르르 잠이 든 할머니를 마구 흔들어 깨워 옛말을 마저 해달라고 졸라댔다. 할머니의 구수한 옛말을 나는 양분처럼 섭취했다.

  할머니의 옛말을 들으며 자란 나는 학교에 들어가고 보니 어느새 이야기꾼이 되어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은 내 책상 주위에 둥그렇게 빙 둘러앉아 내 옛말에 귀를 쫑긋 세우다가 수업종이 울리면 아쉬워하며 “다음 시간에 꼭 마저 들려 줘야 된다.” 하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이야기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소학교 2, 3학년 때부터 접하게 되는 작문숙제를 별 어려움없이 해냈고 어느때부터인가 작문 잘 쓰는 아이로 불렸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나 현성의 글짓기대회에서 상을 타왔고 중학교 때는 교내 신문의 매 호마다 빠짐없이 내 글이 실려있었다. 한번은 중국조선족중학생신문사에서 주최한 글짓기경연에서 수상을 해 연길에 상을 타러 가기도 했다. 그때 시상식에서 전설 같았던 정판룡교수님을 만나고 연길서시장도 구경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나의 작문은 늘 모범작문으로 뽑혀 여러 반급에 돌려가며 읽혔다. 자연스럽게 나는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 ‘낙방거사’

  마음이 어질어 누구를 원망하는 걸 잘 못하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한 사람을 그것도 이를 갈며 증오했던 적이 있다. 그 사람이, 그 인간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생각하며.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고등학교를 다른 현성에 있는 학교에 가서 다녔다. 흑룡강에서 꽤 이름있는 조선족 고등학교였다. 어린 나이에 3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면서 나는 오로지 좋은 대학에 붙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머리를 싸매고 공부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부는 나에게 있어 인생의 전부였고 나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진리처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노력 말고도 운이 따라줘야 했다. 우리 학교에는 7년인지 8년인지 죽치고 앉아 재수를 거듭한 학생 하나가 있었는데 선생님들도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어 멀리 피해 다니는 인물이었다. 대학입시 때 공교롭게도 그는 내 뒷좌석에 배치가 되었고, 선생님들은 공공연하게 나보고 그의 커닝을 도우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학교에서 내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린 나에게 그 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분하고 억울한 나는 시험장에 들어갔지만 도저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고 손이 다 부들부들 떨려 글씨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결국 그렇게 나는 대학입시를 망쳤다. 나는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고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전문대에 가게 되었다. 나는 운명의 신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던 삶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낙방거사”가 되었고 모든 것에 서리 맞은 가을 배춧잎처럼 시들해졌다.

  ◇ ‘상하이드림’

  그때 암흑한 내 마음에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꿈이 혜성처럼 다시 떠올랐다. 상하이, 어릴 적부터 동경만 해왔던 상하이로 가자! 나는 난생 처음 스스로 내 인생의 선택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마지못해 다니고 있던 대학을 중퇴하고 상하이로 왔다. 먼저 상하이에 와있던 사촌동생이 있어 나는 그와 함께 지냈다.

  당신의 손녀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기대했던 할머니는 대학을 중퇴하고 돈을 벌러 간다는 나의 말에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상심해 했다. “공부 마저 해야지, 돈은 해서 뭐하냐? 외지에 가서 무슨 고생을 하려고……” “할머니, 돈 벌고 나중에 공부하면 돼요.” 나는 짐짓 씩씩하게 할머니를 위로했다.

  하지만 나는 꿈을 버린 건 아니었다. 돈 있는 친구들은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는데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국제도시 상하이, 나에게는 새로운 열망, 새로운 기회였다. 어릴 적에 열광하며 봤던 주윤발 주연의 드라마 “상하이탄(上海滩)”이 나의 ‘상하이드림’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별 볼일 없는 대학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돈이라도 벌어 가정의 생활난도 해결하고 돈이 있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부푼 꿈을 안고 지치는 줄도 모르고 상하이로 내처 달려왔다. 하지만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었다. 화려한 상하이는 스무살을 갓 넘긴 시골처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나와 동생은 상하이란 거대한 도시의 어느 자그마한 방에서 존재감없이 살아가야 했다.

  우리의 생활에는 햇볕이 들지 않았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거대한 삶의 무게가 나의 여린 어깨를 짓눌렀다.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구직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고 상하이의 비싼 물가로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들고 온 나의 비상금은 거덜나게 되었다.

  그 힘들었던 시절 내 가슴에 한으로 남은 일이 있었으니 1998년 중국을 휩쓸었던 영화 “타이타닉”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영화광이었던 나는 동생과 함께 변두리지역의 영화관까지 찾아갔지만 영화표 한장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벗어난 15원이었다. 나와 동생은 결국 포스터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절의 우리에게는 15원을 주고 영화를 보는 것이 사치한 문화생활이었다. 그로부터 십여년이 지난 뒤 “타이타닉”이 3D판으로 재개봉 됐고 나는 만사 제쳐놓고 영화관에 달려가 영화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 ‘화이트칼라’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나의 생활에도 햇볕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처절한 비바람의 세례를 받은 나의 몸과 마음은 봄과 가을이 십 여 번 바뀌는 동안 굳은살이 단단히 박혔고 나는 농사꾼이 농사를 짓듯이 열심히 삶의 터전을 일궜다. 고만고만한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집을 사고 하면서 안정이 되어갔고 친구도 사귀며 나만의 교제의 망을 구축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빌딩이 미친 듯이 일어서는 이 도시에서의 삶에 나는 점차 익숙해졌다. 고향은 점점 내 마음 속에서 잊혀져가고 상하이는 엄연히 나의 두번째 고향이 되었다. 네온사인이 영롱한 상하의 야경처럼 나 또한 촌티를 벗고 소위 ‘화이트칼라’라고 자칭할 수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늘 허무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콩나물시루 속같이 붐비는 지하철에서 부대끼며 출근길에 오를 때면, 회사에서 스트레스 잔뜩 받으며 일하고 지친 몸뚱아리를 이끌며 한밤중에야 귀가하는 날이면, 지친 심신으로 잠자리에 들 때면 벌레처럼 스멀스멀 스며오르는 삶의 불안은 늘 나를 위태롭게 했다. 그러다가도 낮이면 나는 또 다시 화려한 가면을 쓰고 숨가쁘게 이 도시의 리듬에 몸을 실어야 했다.

  하지만 고향에 계신 할머니는 이루지 못한 손녀의 꿈을 한시도 잊으신 적이 없었다. 어쩌다 설에 고향에라도 한 번 가게 되면 할머니는 내 손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리신다. “니가 공부를 다 못 한 게 왜 이리도 가슴에 걸리는지……”

  할머니의 말에 나는 휘청했다. 매일 잠자리에 들 때면 나를 불안하게 하던 정체불명의 그것이 무엇인지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배우지 못한 설움이 한이 되었던 할머니는 그 기대를 손녀인 나에게 걸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늘 잊혀져만 가는 내 꿈을 늘 상기시켜주었다. “괜찮아요.” 하고 밝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울컥울컥 치솟았다.



▲ 다시 할머니(2003년)

  ◇ 다시 찾은 꿈

  “할머니, 난 이제 작가가 될 거야.”

  “작가가 뭐냐?”

  할머니는 정신을 반쯤 저세상에 둔 것 같다.

  “글 쓰는 사람, 책 쓰는 사람.”

  “그래? 작가가 뭔지 모르지만 우리 손녀가 하고 싶은 거면 할미는 무조건 좋아.”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셨다.

  내게 아낌없는 사랑만 주었던 할머니, 늘 주기만 하고 아무 것도 받으려 하지 않았던 할머니, 할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었다. 그것이 나와 할머니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내 꿈이 뭔지를 찾게 된 후로, 나는 생활 패턴을 바꾸었다. 오랫동안 책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나는 책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출장을 갔다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가방 샀다. 한동안 나는 매일 책을 읽었다. 책을 읽지 않으면 하루가 헛되고 사는 게 허무했다. 할머니는 늘 내 꿈에 나타나 나를 응원해 주셨다.

  하지만 정작 글을 쓰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 공부를 하는 거야. 글쓰기 공부를. 그때부터 공부하고 싶다는 얘기를 노래처럼 달고 다녔다. 나의 속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고향 친구가 동분서주하며 학교를 알아봐 주었다. 그 친구의 노력과 여러 사람들이 수소문해 준 덕분에 나는 사이버대학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대학공부라는 게 매력적이었다.

  30대 후반의 아줌마가 공부를 하겠다고, 그것도 소설 쓰는 공부를 하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비웃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아줌마가 애나 키우고 살림이나 할 것이지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한다고!”,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던 꿈을 찾은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 새로운 세상

  회사 다니랴, 애 돌보랴, 공부하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공부를 뒤늦게나마 다시 할 수 있게 된 나는 공부의 재미에 푹 빠져서 지치는 줄 몰랐다. 저녁을 지어 먹고 딸애를 얼려서 재워 놓고 나면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훌쩍 넘긴다. 그때부터 내가 공부하는 시간이다.

  나는 또 다시 학창 시절의 모범생으로 돌아간 듯 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메모를 하고, 퀴즈를 풀고 과제를 제출하고, 자유게시판에 올라가서 교수님이랑 다른 학우들과 토론을 하고 질문을 하고 …… 배움 앞에서 내 마음은 소학생처럼 순수해지고 겸손해졌다.

  막연히 소설가를 꿈꾸던 나에게 방송문예창작학과의 과목은 우주처럼 넓은, 열린 공간이었다. ‘문장의 이해’로부터 ‘드라마 작법’, ‘시나리오 쓰기’, ‘소설작법’, ‘시 작법’, ‘한국문학사’, ‘방송드라마작가로 사는 법’ ……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공부의 바다에 빠져 자유롭게 헤엄쳤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소설을 교수님을 통해 새롭게 그 의미를 알게 되고, 영화와 드라마를 감상하고 분석하고 ……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 숭실사이버대 졸업식에서(2015년 2월)

  ◇ 늦깎이 졸업생

  내 나이 마흔, 4년의 공부를 마치고 나는 드디어 졸업하게 되었다. 올해 2월 28일, 그토록 써보고 싶었던 학사모를 쓰고 대학강당에서 졸업식에 참석하던 날, 졸업생들이 일제히 기립자세를 취하고,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만 보던 익숙한 은사님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나의 머릿속엔 그 동안의 시간이 드라마의 장면처럼 하나하나 떠올랐다.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마주앉아 강의를 듣다 앉아서 잠이 들었던 시간들, 같이 놀아달라고 투정부리는 딸애를 억지로 떼어놓고 시험에 임하던 순간들, 인터넷이 원활치 않아 한 시간 반짜리 수업을 세 시간씩 들어야 했던 안타까움, 친구들의 술자리 모임에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던 시간들, 오프라인 동아리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쉬움 ……

  힘들었던 모든 시간들이 그 순간 모두 아름다운 그림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그림의 한가운데에는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서 계셨다. 나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무엇보다도 내가 원해서 한 공부였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주위에서는 나를 보고 늦깎이 대학생이라고 하지만 졸업식장에서 나는 나보다 연장자인 진짜 늦깎이 대학생들을 무수히 만났다. 중년의 딸의 축하를 받는 노년의 어머니, 장성한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 졸업생 …… 이제는 평생교육의 시대라는 것을 또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자신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 다시 길 위에 서서

  사이버대학 마지막 학기인 작년 9월, 나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을 쓰기 시작했다. 10월 초에 탈고를 해서 12월 13일 나의 첫 작품 “서른아홉, 다시 봄”이 세상에 나왔다. 서울의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출판사인회를 하던 날, 할머니는 어김없이 내 꿈속에 나타나셨다.

  “할머니, 저 드디어 작가가 되었어요.”

  “아이구, 기특한 내 손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할머니의 손길을 느꼈다.

  내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할머니는 나의 불빛이었다. 할머니는 세월을 잘못 만나 배우지 못한 한을 줄곧 품고 살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배움의 꿈을 버려야만 했던 나를 한없이 안타까워했다. 할머니의 그 한과 안타까움이 나의 등을 떠밀어 스스로 막혀있다고 생각했던 터널을 빠져나오도록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막혀 있는 길이란 없다. 길은 천만 갈래이다. 어느 길이든 끝까지 걷다 보면 꿈꾸던 곳에 이르게 된다. 주저앉지만 말아라. 할머니가 나에게 준 가르침이었다.

  나는 다시 길에 오른다. 어찌 보면 꿈꿔 왔던 곳에 이르지 못해도 좋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본 풍경만으로도, 그 풍경이 주는 즐거움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발걸음 가볍게 나아갈 수 있다. /곽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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