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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절 열병식과 조선족 작곡가 정률성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9.06일 09:44
작성자: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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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3일 중국의 수도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과 사상 최대 규모의 열병식이 개최되였다.

  중국의 간거했던 항일전쟁 승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첨단 무기를 통해 중국의 군사굴기를 과시하면서 주요 2개국(G-2)으로 올라선 중국의 “글로벌 파워”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자리에서, 블라지미르 푸틴 로씨야 대통령, 박근혜 한국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까자흐스탄 대통령, 최룡해 조선 로동당 비서 등 정상급 외빈 50여명과 각국 외교사절, 중국의 전,현직 지도부 등이 천안문 성루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족 음악가의 선률이 천안문광장의 상공에 울려퍼졌다.

  그 작곡자는 바로 중국의 군가 “태양따라 앞으로”의 작곡가 정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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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률성은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원명은 정부은(郑富恩), 음악도의 꿈을 키우면서 이름을 '선율을 이룬다'는 뜻을 따서 '율성'(律成)으로 바꾸었다.

  아버지 정해업(鄭海業)은 일본이 한일병탄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은거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정해업은 자식들에게 일본의 노예교육을 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모두 사립학교에 보냈다.

  정률성의 첫째, 둘째 형인 정효룡(鄭孝龍)과 정인제(鄭仁濟)는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큰 형 정효령은 국내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1934년 감옥에서 병사했다. 둘째 형 정인제는 윈난 강무학당을 졸업한뒤 국민혁명군 24군의 중교(中校) 참모로 근무하다 뇌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부형(父兄)의 영향을 받아 침략자 일본을 증오한 정율성은 어린 나이인 15살 때 전주 사립 신흥중학교를 다니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정률성의 매형 박건웅(朴健雄)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뒤 북벌전쟁에 참여한바 있다. 그는 1932년 조선 독립투쟁 단체인 의렬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교장으로 있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의 교육 주임으로 있었다.

  1933년, 정률성은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남경에 이르렀다.

  남경에서 “의렬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이곳에서 정율성은 의렬단 단장 김원봉의 지시로 난징과 상하이간의 일본인 전화를 도청하는 비밀공작을 했다. 김원봉은 정율성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주말에 상하이에 가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크리노와교수는 정율성의 음악천부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이탈리아의 저명한 음악가에 비하여 “동방의 카루소”라고 격찬하였다.

  1937년 정률성은 상해 부녀구국회 지도자이며 조선혁명가 김성숙의 안해인 두군혜의 도움으로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떠나게 된다.

  열아홉살의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연안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로신예술학원을 나왔고 “팔로군 행진곡”, “연수요”, “항전돌격운동가”등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팔로군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후에 설립 된 공산당의 주력부대로서 신사군과 함께 화북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다. 당시 팔로군과 손잡고 조선의용대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팔로군의 통일전선 파트너였던 조선의용대는 대일 전선에서 스파이와 배후교란 등 매우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맡고있었다.

  정률성은 연안에서 탁월한 작사자 두 명을 만나는데 “팔로군 행진곡”의 작사자인 공목(公木)과 “연안송(延安頌)”의 작사자인 녀전사 막야(莫耶)이다.

  1939년 정률성은 시인 공목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팔로군 행진곡”의 노래말을 써줄것을 부탁한다. 전선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았던 공목은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녹인 노랫말을 정률성에게 건네주었고 정률성은 같은해 8월에 곡을 완성한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 조국의 대지 위에 섰다/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의 힘 막을자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 두려움없이 굴함 없이 용감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밖으로 몰아내자/아,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1939년 겨울, “팔로군 행진곡”은 로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소책자로 책으로 엮어져 연안 전체와 전군, 전후방 할것 없이 배포되였다. 이듬해 정률성의 지휘 아래 “팔로군 행진곡”의 첫 공연이 연안에서 열렸다.

  “팔로군 행진곡”은 건조한 황토고원에서 불붙듯 삽시간에 퍼지면서 모든 항일전사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 새겨졌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팔로군 행진곡”은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재빨리 널리 류전되였다.

  그후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다. 1990년 9월 북경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 역시 정률성 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연안 시절 정률성은 그 후날 중국 최초의 여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열아홉 살 나는 사천의 처녀 정설송은 뛰여난 사업 능력과 미모로 연안에서 소문

  높은 인기 인물이였다. 그녀는 “연안송”의 작곡자인 정률성을 몹시 숭배하였다. 하지만 정률성의 외국인 신분에 걸려 둘의 사랑은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마침 팔로군 포병퇀 퇀장 조선인 무정장군이 마침 연안에 도착하여 정률성에 대해 담보하고 나섰다.

  무정은 정율성을 무척 좋아해 막내 동생으로 여겼다. 무정은 두 사람의 순탄치 않은 연예관계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난 정율성을 잘 안다. 뿐만 아니라 율성의 큰형과 둘째 형을 알고 있다. 정율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집안은 혁명가의 가정이다. 나와 율성의 둘째 형은 한 지부에서 조직생활을 한일도 있다."

  이국적 청춘남녀는 시련을 거쳐 드디여 1941년 말 혁명성지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듬해 딸 정소제(郑小提)가 태여났다.

  결혼후 정률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하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률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다.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고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도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 그리고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김일성 주석은 1948년 그 공로를 인정해 정률성 선생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조선인민군군가”는 지난 2006년과 2007년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과 로무현 대통령을 맞이해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하기도 했다.

  중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당하(唐河)는 “전 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동시에 작곡한것은 극히 드문 일일것”이라고 극찬했다. 이로서 정률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1952년 정률성은 중국에 돌아와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윈남, 따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모택동주석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률성은1976년 12월 7일 북경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사후 정률성은 “팔보산 혁명렬사릉”에 묻혔다. 비문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민은 영원하며, 률성동지의 노래도 영원하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1978년 북경 음악출판사에서 “정률성가곡선”이 출판되였고 2009년에는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3

  정률성의 일대기는 일찍 중국의 조선족 영화인들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여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2002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중국인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률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연안에서 뿐만 아니라 북경, 톈진, 창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 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였다.

  지난해7월 방한한 시진핑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률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률성의 위상은 높다.

  하지만 고향이 한국인 한국사회에서 정률성이라는 이름은 오래동안 금기시 되어왔다. 지난 세월 이념과 랭전(冷戰)의 장벽속에 갇혀서 정률성 선생의 실체는 한국인들에게는 오래동안 베일속에 가려 있었던것이였다.

  그러다 최근 정률성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중한 량국에서는 기념음악회, 일대기 영화화 등 관련 행사들이 잇달아 열리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률성에 대해 이념의 색안경을 건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이데올로기의 질곡이 여전히 한 천재음악가의 명성과 자유를 옥죄고 있다. 때문에 정률성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항일독립투쟁 포상은 물론 공적조차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의 살벌하고 등등한 치하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 애국투사들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들의 치렬한 반일의식에 대해서도 세상이 다 아는 일임에도 말이다.

  정률성선생이 한국 광주에서 태여나 중국에서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민족의 대음악가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진귀한 기록을 세워놓은 인물로서 선생은 일제치하 중국대륙을 무대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국가의 자존과 민족의 얼을 잊지않았고 몸과 혼을 불살랐다. 음악가로서나 혁명가로서나 그이는 온 민족의 추앙을 받을 만한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총 100분 가량 진행된 전승절 열병식 전 과정은 중국중앙 텔레비의 주요채널들을 통해 생중계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됐다. 그와함께 정률성이 남긴 장쾌한 선률은 온 누리에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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