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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전승리기념회상기]내가 목격한《8.15》전후의 일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9.16일 10:52
/한해동(韩海东, 길림성위당교 행정학원 퇴직 교수)



필자 한해동로인 지난해 울라지보스또크역앞에서. 20세기초 부모님들이 이곳을 거쳐 중국땅을 밟았다고 한다.

올해 중국항일전쟁승리 및 세계반파쑈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80고개를 넘은 나는 70여년전에 일본제국주의 노화교육을 받으면서 기시받고 학대받던 일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패망을 목격했던 광경들이 마치 영화필림마냥 새삼스럽게 머리속에 떠오른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흑룡강성의 북단인 흑하지구 애훈(《애훈불평등조약》을 체결한 곳)에서 약 30리 떨어진 시강즈(西岗子)에 거주하였다. 시강즈는 아주 작은 거리였으나 1932년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동북을 침점하면서부터 중국의 항일세력을 진압하고 쏘련군의 침범을 방비하기 위하여 관동군 612부대, 72부대 등이 주둔하였고 잇달아 헌병대, 륙군병원, 군관관사, 자제학교(재만학교)들이 세워졌다. 뿐만아니라 일본군국주의자들이 강박적으로 끌어온 조선부녀들을 야수처럼 유린하는 위안조도 세워졌다. 당지 중국백성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유린속에서 최저의 인권마저 빼앗기고 절망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시강즈에는 조선족주민이 많지 않아 조선학교가 없었다. 부모들은 자제의 교육을 위하여 부득불 일본인의 재만학교에 입학시키려고 교섭하였다. 놈들은 조선학생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시험을 거쳐 나혼자만을 접수하고 나의 누나를 비롯한 기타 어린이들은 거절한데서 모두 10여리 되는 조선부락인 흥화촌소학교에 도보로 통학하게 되었다. 나는 비록 재만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늘 일본인 교원과 학생들의 기시와 천대를 받았다.

어느날 오전 수학시간에 선생이 학생들에게 암산문제를 내주었는데 번마다 내가 먼저 손을 들고 답을 맞히자 선생의 낯색이 금시에 불그락푸르락하더니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하나하나씩 불러 개별담화를 하는데 나만은 빼놓았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여 나보다 기운이 약한 놈을 위협하면서 선생이 무슨 말을 하던가고 물었다. 그놈은 솔직히 선생이 《너희들은 야마도(大和)민족으로서 반도인(조선사람을 기시하는 칭호)에게 떨어지니 너무도 수치스럽다.》라고 꾸짖었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어린 마음에도 선생에 대한 혐오감이 솟구쳤다. 나는 오히려 그놈들보다 못지 않게 더욱 배움에 노력하리라고 다짐하였다.

또 한번은 사람 없는 길에서 나보다 한학년 우인 마쯔오까라는 놈이 나를 보더니 《한또야로(半岛野郎)》라고 희롱하기에 너무도 격분되여 나보다 체력이 못한 그놈을 당장 밭고랑에다 엎어놓고 주먹과 발로 기껏 때려주었다. 그놈이 《고오상! 고오상!(탄복한다는 뜻)》 하고 웨칠 때에야 놓아주었다. 나는 다소라도 분을 푼것이 통쾌하였다. 그놈은 아비를 통하여 일본 후꾸오까의 한고향에서 온 담임선생인 이소베도오이찌에게 고발하였다. 3일후 이소베는 수업시간에 터무니 없는 트집을 잡아 수업을 중지하고 학생들앞에서 주먹을 쥐고 나의 량볼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나는 입안이 터져 피가 흐르고 그 자리에 쓰러질 정도였다. 일본놈의 야만적인 폭행을 당한 나는 너무도 억울하여 이를 악물고 눈물만 흘렸다. 우리 부모가 20세기초 일본제국주의자가 조선을 침범하자 그놈들의 잔혹한 통치를 피하여 로씨야를 거쳐 중국땅을 밟게 되였는데 또다시 그놈들의 통치를 받으며 《망국노》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것이 원통하였다. 갈수록 일본제국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괴여올랐다.

내가 일본인교원에게 폭행당한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몹시 격분해하면서 그놈들에게 학대받으면서 무엇을 배우겠는가고 하며 그 학교에서 퇴학시키고 10여리 떨어진 조선마을 흥화촌소학교에 통학하게 하였다. 조선학교였으나 역시 일본교과서를 가지고 글을 배웠다. 그러나 선생들은 조선사람으로서 모두 민족사상이 깊은분들이였다. 철이 들기 시작한 학생들은 공개적으로 흑판에다 《조선독립만세!》라고 써도 선생들은 못본척하면서 오히려 동정하는 기색이였다. 특히 조청죽선생이 선택한 교가의 곡은 해방후에 알고보니 《적기가》의 곡이였다.

1945년 5월 내가 일본제국자의 동맹국인 독일파쑈가 무조건 투항한 소식을 실은 신문을 조선생에게 전하니 조선생은 일본제국주의도 멀지 않아 멸망될것이라면서 아주 흥분해하였다. 그는 일본의 항복을 앞두고 학교에서 사직하고 고향 연변으로 돌아갔다.

일본제국주의자에 대한 증오심이 깊어감과 동시에 그놈들은 꼭 멸망할것이라고 믿은 나는 조선사람으로서 조선글을 배워야 한다는 자각성이 높아졌다. 나보다 3년이상인 정일광씨에게서 조선국문을 배우면서 자습하였다. 이것은 내가 해방후 새로운 배움에 쉽게 적응할수 있는 기초가 되였다.

1945년 8월 7일, 둘째형의 결혼을 앞두고 친척들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흑하시로 갔다. 친척집에서 하루밤 자고 이튿날(쏘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당일) 아침에 흑룡강기슭에 가서 발을 씻는데 강건너 맞은켠 쏘련땅에서 비행기 넉대가 흑하시에 날아와 얼마 멀지 않은 한 목표물에다 사격하고 다시 쏘련땅으로 넘어갔다. 이윽고 쏘련비행기가 또 날아오는것이 보였다. 나는 놀라서 인차 친적집으로 뛰여들어갔다. 집주인이 《일쏘전쟁》이 폭발되여 이곳이 전쟁터이니 속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였다. 어머니는 지체할세라 나를 데리고 역으로 달려갔으나 역은 이미 피난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기차를 탈수 없는지라 발을 돌려 시내에서 6리 떨어진 조선인촌 얼궁베(二宫北)에 거주하는 아버지 옛친구 황씨댁으로 찾아갔다. 얼마 안되여 시내에서 일하던 고향청년 김룡석, 김견환을 만나게 되였다. 어머니는 그들과 기차를 탈 희망이 없으니 이튿날 아침 일찍 도보로 흥화촌으로 향하자고 약속했다. 밤이 되자 흑하시는 불바다가 되여 밤늦도록 쏘일쌍방의 기관총, 대포소리와 함께 오가는 불덩어리가 하늘을 덮었다. 나는 전쟁의 공포속에서도 파쑈 《3국동맹》중 이딸리아와 독일이 멸망되였으니 이번에는 일본제국주의자의 차례라고 생각하니 무섭기보다도 활기가 났다.

이튿날 새벽, 총소리가 뜸해지자 우리 일행은 길을 떠났다. 120리 되는 목적지를 향하여 비를 맞으면서 험한 흙탕길을 이틀동안이나 걸어야 했다. 나는 어린 몸에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멀지 않아 멸망할것이라고만 생각하니 용기가 나서 어른들 못지 않게 앞장에서 걸어갔다. 해가 지기전에 누님네가 거주하는 흥화촌이 나타났다. 나는 기쁨에 넘쳐 먼저 뛰여서 누님네 집에 들어섰다. 아버지를 비롯한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누님네 집에 모여있었다. 비록 우리는 놀랐지만 서로 반겨맞았다.

전쟁이 폭발하자 누님은 생사를 무릅쓰고 마차를 몰고 시강즈의 우리 집에 가서 간단한 생활용품을 싣고 아버지와 둘째형 내외를 농촌 누님네 집으로 피난오게 한것이였다. 흑하로 떠나간 어머니와 나의 생사를 몰라 막심한 걱정을 하면서 우리가 편안히 돌아오라고 하늘에다 빌었다고 누님은 말하였다.

우리가 돌아온 저녁부터 쏘련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대포소리, 땅크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동네사람들은 전쟁의 공포속에 잠겼다. 그러나 모두 쏘련군이 하루빨리 일본놈들을 소멸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11일 아침, 처음으로 보는 수십명 쏘련군 선봉대가 승리의 기세로 우리 마을을 거쳐 시강즈 방향으로 전진해갔다. 매우 장엄하였다.

시강즈 남산(소흥안령줄기)에는 일본관동군의 진지가 있었다. 그놈들은 동북을 침입강점한 때로부터 동북을 영원히 독점하고 쏘련군의 침범을 방비하기 위하여 땅굴을 파고 진지를 수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일쏘전쟁이 폭발하기전까지 진지수축을 중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산굴에는 온갖 설비가 구비되여 《지하거리》라고 할수 있을 정도였다. 대외적으로는 《비밀공사》라 하였다. 이 공사에 강제로 잡혀온 부지기수의 중국로동자들은 눈을 가리우고 끌려왔다가 일을 마친후에는 놈들에게 모두 참살당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피난온 흥화촌에서는 남산을 멀리 볼수 있었다. 8월 11일부터 때로는 10여대의 쏘련군 비행기가 남산 일본군 진지를 둘러싸고 폭격, 사격하는 장면과 일본군이 기관총으로 반항하는 불꽃을 여러번 목격할수 있었다. 며칠동안 계속되던 대포소리와 총소리가 8월 15일 아침부터 그치고 남산에 아주 큰 흰 고무풍선이 공중에 떠올랐다. 마을 어른들은 모두 바깥에 나와서 아마 일본놈들이 패전한것이라고 의론하고있었다. 마침 10여명의 쏘련병사들이 마차를 몰고 마을로 들어왔다. 이 마을에 모인 아버지, 김예천 등 몇몇 로인들은 옛 로씨야에서 중국으로 이주한분들이여서 로어로 쏘련병사들과 대화할수 있었다. 쏘련병사들을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자가 무조건 투항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손벽을 치면서 승리의 만세를 불렀다. 나도 너무 기뻐서 어른들을 따라 소리치며 만세를 불렀다.

일본침략자들이 투항한 며칠후부터 마을 어른들은 마차를 몰고 남산에 가서 일본군이 저장한 량식, 군복, 담요 등 쓸만한 물건들을 많이 싣고 돌아오군 하였다. 그분들은 산길에서 썩어가고있는 일본군의 시체를 많이 보았는데 한곳에는 10여명이 가지런히 쓰러지고 그앞에 한놈이 쓰러졌는데 집체자살을 한것이라 하였다. 당시 이런 수치스런 끝장은 비일비재였다.

이듬해 봄철 우리 집과 몇몇집은 나의 큰형이 계시는 수화로 이사하게 되였다. 마침 쏘련군이 남겨준 화물차동차를 가지고온 운전수들의 덕분으로 자동차를 타고 험한 길로 남쪽방향으로 떠나 도중에 손오(孙吴)에서 하루 휴식하게 되였다. 마침 팔로군이 쏘련측에서 이송받은 귀국시키는 일본포로군들을 령솔하여 손오에서 휴식하고있었다. 늘 자기들은 강하고 문명한,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고 떨벌이던 포로된 일본군들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은 의복도 떨어지고 세수도 못한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본포로 한놈이 거리에서 무슨 물건을 가지고 중국사람과 큰 두부 한모를 바꾸어 당장에서 정신없이 먹었다. 때마침 그놈의 상급모양인 한놈이 그놈을 소리쳐 불러 앞에 세우고 일본민족의 수치라고 하면서 주먹으로 량쪽뺨을 치는데 그놈은 반항도 못하고 《하이! 하이!》 하고 대답하는것이 너무도 가소로왔다. 나는 포로무리속에서 수업시간에 나를 사정없이 구타하던 이소베란 선생을 발견하였다. 나는 격분되여 치가 떨렸다. 그러나 그때 감히 달려들어 보복하지 못했다. 그때 보복못한것이 지금까지도 후회된다.

이튿날, 흑하시에서 이미 300리 길을 걸어온 포로군들은 기진맥진하여 계속 도보로 북안쪽으로 걸어갔다. 그중 병자들은 마차에 겹으로 실렸는데 아프다고 애처로운 소리를 질렀다. 침략자들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가 우리 나라를 잔인박행한 14년간 전례없는 재난을 들씌웠다. 사상자만 하여도 근 3500여만명에 달하고 감당한 직접적 및 간접적인 손실이 6500억딸라에 달한다. 우리의 가슴속에 사무치는 일본제국주의자에 대한 한의 력사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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