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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전환기속 성내 조선족지역사회 탐방 --본계편

[기타] | 발행시간: 2015.11.30일 11:33
력사전환기속 성내 조선족지역사회 탐방-- 본계편

오녀산기슭에 울려퍼지는 아리랑 멜로디



환인지역은 료녕성내 어느지역보다 우리 민족이 가장 일찍 정착하고 오래 살아온 곳이다. “환인조선족 200년”(환인만족자치현조선민족사학연구회에서 지난 2010년에 발간한 내부간행물)에 의하면 지난 18세기말부터 일부 조선인이 생계를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월경하여 환인현경내에 잠입하였는데 그때부터 환인현에는 조선이주민이 살기 시작하였다. 가장 일찍 환인현에 들어와 산 사람은 계준범으로 기록, 그는 조선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환인현에 정착했고 그뒤 조선이주민이 해마다 늘어났다.

제6차전국인구조사에서 본계시는 조선족인구가 1만 3,599명으로 집계되여 지난 2000년 (제5차인구조사)때보다 다소 증가돼 성내에서 대련, 단동과 같이 조선족인구가 증가된 도시로 되였다.

본계시는 본계의 4개 구와 본계현, 환인현을 망라하는데 환인현에만 조선족인구가 현재 7천여명이다. 따라서 조선족민간단체도 시와 환인현이 별도의 독립법인으로 운영되고있다. 본계시에는 본계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그 산하에 로인협회, 기업가협회를 두고있다. 환인현에는 환인현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환인현조선족로인협회, 환인현조선민족사학연구회 등 민간단체가 있다. 환인현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는 지난 1994년에 설립되여 조선족민족간부문제, 조선말방송의 회복 등 조선족의 권익과 민생에 관련되는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지난 2006년 9월에 환인현에서 료녕성제3회조선족민속절을 성황리에 개최하기도 하였다.

1956년 7월에 설립되였다가 “문혁”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수차 중지, 회복을 거듭해온 조선말방송은 지난 2012년 3월에 방송을 재개, 올해 3월부터는 방송시간을 10분에서 30분으로 늘림과 동시에 “안녕 아리랑” 타이틀로 조선말과 중국말을 결부하여 방송되면서 조선족뿐만 아니라 기타 민족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환인현의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선을 이루고있다.



반일항쟁의 봉화가 활활

료녕성내 신빈(흥경)과 환인 지역은 독립지사들의 발길이 가장 일찍 닿은 곳이며 또한 반일항쟁의 봉화가 활활 타올랐던 곳이다. 환인현조선민족사학연구회 부회장 김명희씨는 “환인과 신빈지역은 독립군의 주요 활동근거지였다”며 “이 지역 조선족사회의 형성은 반일투쟁시기로부터 볼수 있다”고 했다.

20세기초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환인경내에서 반일투쟁을 벌였다. 류린석, 박장호, 윤희순 등 조기 애국지사들은 환인경내에서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기업을 꾸리고 학교를 꾸리고 반일을 선전하는 등 반일구국운동을 하였다. 그뒤 고이허, 박대호, 량세봉, 리상관, 장명도, 박윤걸 등 후기 애국지사들이 환인경내에서 무장단체-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일본침략자와 치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항일투쟁시기 리홍광, 한호, 한진, 리민환, 리명산 등 조선족공산당원들이 환인경내에서 일본침략자와 불요불굴의 투쟁을 하다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1936년에 리명산을 현위서기로 하는 중공환흥현위가 처음으로 환인과 흥경 일대에 설립되였다.

김명희씨는 해방전쟁시기 환인경내에 조선족을 위주로 하는 유격부대인 박재원의 “까치부대”가 있었는데 하얀 통바지에 하얀 조고리에 까만 조끼를 입은것이 까치와 흡사하다 하여 이들을 “까치부대”(喜鹊部队)라 불렀다고 소개했다.

“환인조선족 200년”에 의하면 1945년 8월부터 1946년 10월 사이 환인현조선인 3600여가구, 1.8만명중 1,200여명이 참군하였는데 이들은 17~20세의 미혼청년들로 대부분 리홍광지대에 편입하였다. 1947년 6월부터 1948년말까지 1,300여명의 청년들이 입대, 많은 청년들이 리홍광지대(후에는 독립4사, 그후에는 중국인민해방군보병 제166사의 소속 3개 퇀)에 편입되였다. 리홍광지대에는 “환인중대”가 있었는데 모두 환인적의 조선족 지휘관과 전사들로 구성되였으며 동북이 해방될 때까지 존속되여왔다.

지금도 환인지대에는 조선애국지사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찾아볼수 있다. 그중 환인현성에서 20여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락보진 룡천촌에 세워진 “로학당유적지”이다. 이 비석은 2002년 환인만족자치현조선민족력사연구회와 보락보진정부에서 윤희순녀사의 항일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로학당건교 90주년을 계기로 특별히 세운것이라 한다.

비석 정면 가운데 세로 “로학당유지”(老学堂遗址) 다섯글자와 오른쪽과 왼쪽에 각기 “항일인재의 요람”과 “환인현동창학교분교” 글씨가 새겨져있었고 그 뒤면에 윤희순의 생애와 사적이 소개되여있었다. 윤희순은 조선13도의병총재 류린석의 며느리로 반일의병운동에 목숨바쳐 싸운 반일계몽운동의 녀성선구자이다. 학교는 1912년 류린석의 지도와 리회영, 우병렬, 도원훈, 채인산, 손홍령 등 지사들의 지지로 동창학교로학당분교로 설립, 설립되여서부터 1915년에 페교될 때까지 윤희순은 시종 교장으로 있으면서 김경도, 박종수, 리정헌, 마창덕 등 50여명의 항일애국명장들을 양성해냈다.

“지금도 가끔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와 로학당유적지를 돌아보고 가군 합디다.” “로학당유적지”를 돌아보고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한 조선족로인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을 건늰다. 올해 일흔다섯인 이 로인은 만년에 집 근처에 있는 이 “로학당유적지”를 돌보는것도 삶의 보람이라며 외지에 사는 자녀들이 오라 해도 가지 않고 안해와 함께 마을을 지키고있다고 했다.

또 북전자향 영영구촌에 가면 고려구(高丽沟)를 마주하고있는 한 조선족마을이 있다. 이 곳은 조선혁명군 부사령 박대호가 이끈 조선혁명군의 주요 활동무대였고 1938년 일제와의 싸움에서 희생된 조선혁명군사령부 련락관 김영옥과 조선혁명군 제1군 참모장 김윤걸도 이 마을 태생이였다고 전해지고있다.



동북지역서 수전개발이 최초로

환인만족자치현 고성진(古城镇) 와니전자촌(洼泥甸子村)에는 “동북수전제1촌(东北水稻第一村)”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소개에 의하면 이 비석은 중국조선민족사학회와 환인현정부가 수년간의 노력을 거쳐 지난 2002년 10월에 함께 세운것이다.

비석 뒤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청동치말년 환인현에는 이미 월변(越边) 조선족선민들이 벼재배를 시작, 3년간의 꾸준한 노력을 거쳐 광서원년(1875년을 말함-주)에 현재의 괴마자진 와니전자촌에서 벼재배에 성공하였다. 그때부터 이 지대에 수전개발붐이 일었고 동북 여러 지방으로 신속하게 펴졌다. 옹근 한세기동안 동북입쌀은 여러 민족인민들이 즐겨먹는 주식량으로 되였는바 이 업적을 기리기 위해 특히 이 비석을 세운다.” 사실 토질, 수질, 기후가 조선반도와 다른 이국땅에서 벼재배에 성공하였다는것은 당시로 보면 기적과 같은 일이였다. 다른 한면으로 수많은 실패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고도 간거한 력정이기도 하였다.

조선반도보다 기온이 퍽 낮은 동북지역에서 벼재배의 성공은 살길을 찾아 만주로 건너온 조선이주민들에게는 더없는 희소식으로 되였고 더욱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땅에 정착하면서 황무지를 옥답으로 만들어 허허 벌판을 누런 물결이 출렁이는 황금벌로 탈바꿈시키도록 고무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환인현에 수전면적이 5천여무에 달했고 1923년에는 2만여무로, 1929년에 이르러 3만여무로 발전하였다. 해방전까지 환인현의 수전농사는 거의 조선족이 지었는데 무릇 강하류역의 평탄한 곳에서는 모두 조선족의 발자욱이 남겨져있었다.

200여년이 되는 환인조선족력사를 볼 때 초기 살길을 찾아 편벽한 환인 산골에서 시작한 화전농 생활로부터 벼재배에 성공하면서 조선이주민들의 수도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력사기재에 의하면 1907년 환인경내 조선인은 2,005명, 1909년에는 7,635명이였는데 1935년에는 1.1만명, 1943년에는 1.4만명으로, 광복직전에는 3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해방후 환인지역 조선족인구도 굴곡적인 변화를 나타냈는데1953년에 1.7만명, 1982년에 7572명, 2005년에 7천명 미만이였다가 2010년에는 다시 7천명을 넘어섰다.

1982년까지만 해도 환인지역 조선족농촌인구가 6,000여명으로 모두 수전농사를 하였다. 그러나 수전농사가 수지에 맞지 않자 인삼재배나 약재경영 등 다종경영을 시작하였으며 90년대부터 해외방문의 물꼬가 틔이자 점차 해외로무의 길에 오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한 통계에 의하면 2005년 에 전 현조선족농촌인구의 32%가 되는 1,530명이 출국로무의 길에 올랐다.

따라서 환인현조선족인구분포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 환인조선족은 처음엔 산곡에서, 후에는 평원으로, 초기는 대집중 소분산되였다가 후기에는 대분산 소집거되였다. 현재 전현 147개 촌중 조선족이 77개 촌에 살고있는데 비교적 집중된 촌은 15개뿐이다. 지금은 농촌보다 현성에 집중되고있는데 2009년에 환인현조선족학교 주변, 현성에 살고있는 조선족인구는 2,600여명에 달하였다.

“동북수전제1촌”이라고는 하는 와니전자촌도 수전면적은 고작 300무 정도, 조선족세대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180여가구로 마을이 번창하였댔지만 현재는 대부분 도시나 해외로 돈벌이하러 나가고 마을에는 마을을 지키는 몇몇 로인들뿐이란다.

1985년만 해도 환인현에는 괴마자, 보락보, 오리전자, 아하, 륙하, 북전자 등 6개 만족조선족향이 있었지만 2002년에 민족향이 선후 취소되고 현재는 아하조선족향만 남아있다. 아하조선족향에도 조선족인구가 많았을 때는 1,271명에 달했는데 현재는 몇백명에 불과한것으로 알려졌다.



4대째 전해내려오는 걸립무

김명환(1948년)은 증조부 김력청, 조부 김흥진, 부친 김성룡을 이어 4대째 걸립무의 대를 이어오고있는데 걸립무는 지난 2006년 조선족유산으로 연변의 상모춤과 함께 제1진으로 국가급 무형문화재에 등재되였다.

걸립무는 춤판이 벌어지면 그야말로 가관이다. 과거에는 수백명이 추는 대형 춤이였는데 현재는 인원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40명이 돼야 걸립무의 맥을 제대로 이을수 있다고 한다.

걸립무의 유래에 대해 그는 이렇게 소개했다. 조선 평안북도 벽동군은 편벽하고 자연재해가 심한 곳이였는데 벽동군사람들은 벽동군의 모양이 쭈그러진 배와 같아 흉년이 많다고 어느해부터인가 이를 바로세우자며 큰 제사를 지내고 바줄당기기시합을 벌였다. 벽동군의 청장년들이 다 참가할수 있게 하기 위해 일반 바줄이 아니라 칡기를 캐서 단단한 바줄을 만들고 동서로 나누어 시합을 하였는데 그때면 100메터 늘어진 바줄을500~600명의 사람들이 잡아당기고 구경군들중 아이를 어깨에 올려놓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어 응원군들의 함성과 구경군들의 어깨춤이 그야말로 가관을 이뤘다.

김명환일가는 지난 1938~1939년에 중국으로 건너왔는데 그는 6,7살 때 환인의 횡도천에서 아버지가 어깨에 아이를 올려놓고 이층춤을 추는것을 본적 있었다. 1967년 개원현조선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륙도하자향 륙도하자조선족소학교에 배치받아 교편을 잡으면서도 그는 걸립무에 대한 짙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직접 공연을 조직하는 등 걸립무와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걸립무는 1989년 료녕성제1회문화예술축제에서 상을 받기 시작해 1991년 심양국제양걸축제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며 1994년에는 건국45주년 기념으로 천안문에 가서 공연하였고 2013년 심양전국운동대회 개막식 축하공연에서 선을 보이기도 하였다. 선후 크고 작은 공연이 20여회, 수차 우수상, 금상을 받았으며 올해만 성, 시, 현급 공연이 4회라 한다.

“즉흥춤이라는 춤의 원바탕을 제대로 살리면서도 부채춤(집체무), 접시춤, 이층춤, 북춤 등 조선족민간무용의 특색을 다 갖추었고 거기에 꾕과리, 징, 대북, 소고, 장고 등 민족악기까지 포함시켰다.”는 김명환씨는 “공연시간이 너무 길면 지루할가봐 처음의 17분에서 11분, 현재는 6분 55초로 단축시켜 공연효과를 극대화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걸립무를 출 사람이 자꾸 없어져 큰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했다. 40년을 해오며 많은 사람을 배양했지만 한국 나가고 도시로 나가면서 사람이 자꾸 바뀌는데 특히 35~36세의 조선족녀성이 거의 없다. 다행히 조선족학교에서 많이 지지하고있으며 걸립무공연팀에 남자교원이 2~3명 들어있다. 인젠 공연자가 순 조선족이 아니라 한족이 1/3 차지한다.

또 다른 어려움은 경비난이다. 몇년전에 성에서 20만원 경비를 한번 지원한적있다. 해마다 공연자들의 보조비에 공연비까지 합하면 1년에 4~5만원 들어야 하기에 경비가 없으면 걸립무를 계속 유지해나가기 힘들다.

김명환씨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걸립무의 바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할것이라며 5대 전승인으로 조카와 딸에게 가르치고있다고 소개했다.



두 조선족학교의 희망과 곤혹

본계시에는 현재 조선족학교로 본계시조선족중학교와 환인만족자치현조선족학교 두개가 있다. 성내 조선족인구가 약 만명 되는 영구나 반금 지역과 비하면 학교가 하나 더 있고 학생수도 많아 희망이 부푸나 나름대로 곤혹도 있다.

“조선족학교는 본계시의 최대 민족단위이며 조선족사회의 미래의 희망이다.” 지난 2011년에 본계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강성일회장을 비롯한 회장단과 기업가들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교사절위문행사에 참가하고 특히 학교운영에서 부딪친 문제는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주고있다.

본계시조선족중학교 청사는 “문혁”시기 지은 건물로 시설이 낡았고 건축질이 차하여 본계시의 위험건축에 속하였는데 강성일회장이 수차 교육국 관계자를 찾아가 상황을 반영한데서 올해 자금 200만원을 조달받아 대보수공사를 하였다.

박희복교장은 “위험건축은 이번 대보수공사로 한고비 넘겼지만 건축면적이 작아 정상수업을 겨우 보장하는 교실외 열람실, 음악실, 무용실 등 부대시설은 아예 없어 학교가 진일보 발전하는 장애로 되고있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는 또 “교사대오가 부족하여 어떤 때는 서기나 교장도 수업을 하고있으며 교사들이 학과를 뛰여넘거나 학년급을 뛰여넘어 수업하는 현상도 보편화되고있다”며 그러나 학과당의 수업효과를 높이고 학생들의 과외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교사들이 열심히 노력하고있다고 소개했다.

현재 본계시조선족중학교는 교직공이 46명, 학생수가 193명(그중 학전반이 30명, 한족학생이 40여명)이며 대학입시진학률은 성내 조선족학교중 제3위를 차지한다.

본계지역의 다른 조선족학교 환인만족자치현조선족학교는 25개 반급에 학생수가 453명(그중 한족학생이 120명), 교직원이 97명인데 10년동안 학생수는 줄어들지 않고 현상태를 유지해오고있다 한다. 80~90년대 학생수가 가장 많을 때는 780여명에 달했다.

환인현조선족학교는 1957년에 설립, 1986년에 환인만족자치현조선족중학교로 개칭하였다. 1999년 9월 소수민족교육분포조정에 근거하여 현내 12개 조선족소학교가 현조선족중학교에 통합되여 성내 두번째로 되는 조선족기숙제완전학교로 되였으며 2002년에 교명을 환인만족자치현조선족학교로 개칭하였다.

“2002년에 박영학생이 대학입시에서 료녕성문과수석으로 북경대학에 진학했고 2013년에는 김려나학생이 료녕성조선족대학입시생중 리공과수석으로 북경사범대학에 진학했으며 올해 리문용학생이 환인지역문과수석으로 절강대학에 진학했다. 중점학교인 환인만족자치현학교에선 아직까지 북경대학 대학생이 하나도 나오지 못했는데 조선족학교에서 이런 좋은 성적을 따내자 많은 한족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와 공부하고있다.” 박태근서기가 자랑스레 학교상황을 소개했다.

우리는 취재에서 본계지역 두 조선족학교에 한족학생이 적지 않지만 한족학생들이 조선족학생과 한교실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말로 수업을 받고있다는데 대해 저으기 놀랐다.

여기에 조선족학생가 줄어드는 현시점에서 여하히 학생수를 늘여 민족학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꾀하는 남다른 대안이 있는것 같았다.

본계지역 민족간부상황

본계시에도 조선족간부들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성내 다른 도시에 비해 그렇게 비관할 정도로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본계시는 다른 시보다 조선족간부들이 쟁쟁하고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이고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현재 본계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강성일회장은 원 본계시공안국 상무부국장이였는데 퇴직한후 회장직을 맡고 본계시조선족사회의 구심점을 구축하기 위해 조선족간부들과 함께 열심히 노력하고있다. 현직 처급이상 간부들로 본계시과학기술협회 주석 박문국, 시방산국 국장 김명철, 시외사판공실 부주임 박성실, 시정협판공실 부주임 최홍안, 시애국위생위원회 부주임 조홍련, 시교육국 인사처처장 김춘옥 등이 있는가 하면 특히 시공안계통에는 강성일씨를 시작으로 조선족간부들이 여러명으로 대를 잇고있다고 했다.

강성일씨는 본계시에는 공무원시험을 거쳐 발탁된 조선족간부들이 다른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많은데 이들은 다수가 조선족학교를 다니지 않아 한어표현력이 강하고 인맥도 넓다고 소개했다. 조선족학교의 높아진 중점대학진학률에 반해 졸업한후 주류사회에 적응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방면에서 조선족교육의 부족점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본계지역에는 전 료녕성과학협회 부주석 김태원처럼 외지에서 활약하는 환인출신들이 많았는가 하면 김춘명처럼 외지에서 본계로 와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도 있다. 강성일회장은 “김춘명은 본계조선족의 자랑일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의 자랑이다”고 했다. 김춘명은 고아로 흑룡강성 상지태생인데 참군하여 본계시소방지대에 배치받은후 가냘픈 몸매로 평소 자신을 억척스레 련마하고 천여차 멸화, 인명구조, 재산보호, 재해지원 등 전투에 뛰여들었고 수차례 아슬아슬한 구조현장에서도 자기의 안위를 추호도 돌보지 않고 인명과 재산을 구해낸 영웅적행동으로 하여 2006년 중앙군위와 국무원으로부터 “뢰봉식소방전사”라는 최고의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산 사람으로 유일하게 이 영예를 받았다.

그는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 심무신구조선족소학교의 과외보도원을 맡았댔고 현재는 본계춘명소학교의 명예교장외 본계뢰봉소학교 등 5개 소학교의 과외보도원을 맡고있으며 그의 이름으로 명명한 김춘명조학기금회는 현재까지 도합 230여명의 학생들에게 조학금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현재 김춘명은 료녕소방총대 본계지대 명산구대대 정치교도원으로, 료녕성제12기인대대표로 활약하고있다. 2012년부터 료녕소방총대에서는 매년 소방계통에서 “김춘명식선진개인”평선활동을 해오고있다. 2014년에 김춘명은 또 공안부소방국우수공산당원으로 선정되였다.

본계시의 적지 않은 간부들중 환인출신의 간부들이 많았다. 이들은 일찍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항미원조 등 중요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것으로 하여 해방초기 현장이나 현위의 요직을 맡은 조선족간부들이 많았던것이다. 60~70년대만 해도 “7대 박, 8대 김”(七大朴,八大金)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현에 국급이상 조선족간부들이 많았고 기관에도 조선족이 많았다. 그러나 개혁개방이 심화되고 해외로무붐이 일면서 조선족인재의 류실이 심각해져 환인현에도 현급 이상 간부가 1~2명 일뿐이다. 현재 성내 두개 남아있는 조선족향중의 하나인 아하조선족향에도 조선족향장이 없는 실정이다.

2011년 1월 환인현정부의 한차례 “현급이상리직간부 음력설맞이 좌담회”에서 김석관(전 현정협상무주석), 박대욱(전 현인대 상무부주임), 강호삼(전 현인대 부주임), 정명현(전 현위무장부 부장) 등 4명 로간부는 현정부에 조선족간부대오건설문제를 집중 제의하였다. 이들이 첨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현급간부는 3명, 과급간부는 20명이고 촌간부가 5명 있었으나 2010년에는 현급간부가 2명, 과급간부는 9명으로 줄었으며 현내 104개 행정촌에 조선족간부가 한명도 없다. 민위에도 과거에는 주임, 부주임이 있었댔으나 현재는 조선족간부가 없다.

김명희씨는 “과거에는 생산대를 기초로 해서 조선족끼리 집중되고 단합되였지만 생산대가 해체되면서 조선족이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의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고있다”며 많은 조선족이 한국에 가서 돈벌이를 하고있는데 벌어온 돈을 흥청망청 쓰지 말고 한국의 음식문화와 같은 선진문화를 중국에 전파하거나 창업을 하는 등 유용하게 쓰면서 다같이 잘살수 있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기자 오지훈 김창영

출처: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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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 '김호중'이 최근 교통사고를 내고 달아낸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그의 소속사 대표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매니저에 김호중을 대신해 경찰에 출석하라고 지시한 이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김호중은 지난 9일

"유튜브 해킹 당해" 뉴진스님 윤성호, 결국 '오열' 한 이유

"유튜브 해킹 당해" 뉴진스님 윤성호, 결국 '오열' 한 이유

'뉴진스님' 캐릭터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개그맨 윤성호가 힘들었던 지난해를 되돌아보다 결국 오열했다. 지난 15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에서는 '선샤인' 특집으로 꾸며진 가운데, 개그맨 윤성호가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날 유재석은 윤성호에게

'범죄도시 4' 1천만명 돌파…한국영화 시리즈 첫 '트리플 천만'

'범죄도시 4' 1천만명 돌파…한국영화 시리즈 첫 '트리플 천만'

배우 마동석 주연의 액션 영화 '범죄도시 4'가 15일 천만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4편까지 나온 '범죄도시' 시리즈는 한국 영화 시리즈 최초로 '트리플 천만'을 달성했다. 배급사 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범죄도시 4'는 이날 오전 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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