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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의 마지막 사령 최윤구

[기타] | 발행시간: 2015.11.30일 11:00
조선혁명군의 마지막 사령 최윤구

- 외숙부 최윤구장군을 찾아 수십년


그녀는 올해 일흔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외숙부를 찾기 위해 오랜 세월을 허비하였다. 어머니가 생전에 자주 들려주었던 외숙부의 이야기들, 그리고 림종전에 "우리 집에 큰 장군이 있는데 항전하다 행방불명이다. 너무 불쌍하다.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느나? " 하며 꼭 외숙부의 행적을 찾으라고 간곡히 부탁한 어머니의 말씀이 계속 가슴 한구석에 메아리쳤다 한다.

"제가 외삼촌을 직접 찾아 나선것은 2008년 8월 23일부터입니다. 이 날은 후에 알고보니 저의 외숙부인 최윤구장군의 생신날이였어요. 어머니가 지난 1990년에 세상을 떠난후 한국에 가서 불법체류로 일하다 8년만에 중국으로 돌아와서지요. 그전엔 외숙부를 찾고싶어도 수중에 돈이 없어 아예 엄두도 못냈는데 한국가서 돈을 좀 벌어오니 만사를 제쳐놓고 외삼촌을 수소문하기 시작한것이지요." 최윤구장군의 외조카딸 강학영(1943년생)이 오랜 세월 가슴에 쌓여왔던 통한의 말을 터놓았다. 그녀는 현재 심양시 황고구 향산북로 6호 심조1중 부근에 살고있다.



최윤구는 누구?

중공료녕성위당사연구실 력사해명전문가팀에서는 "최윤구는 18년남짓 항전을 견지해온 사람으로 위대한 애국자이며 불굴의 항일지사이다."라고 평가하고있다. "세기와 더불어"(김일성회고록)에서는 간고하고 가렬처절했던 항일투쟁시기를 회고하며 최윤구장군의 사적에 대해 서술하고 그를 "독립군의 마지막 사령"이라고 하였다. 현재 조선의 평양에 위치한 대성산혁명렬사릉에 가면 최윤구의 흉상과 함께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최윤구동지"라고 새긴 비석을 볼수 있다.

최윤구(崔允龜)는 1903년 8월 23일 조선 평안북도 초산군 선천면의 한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원명은 최승팔이고 최윤구라는 이름은 그가 독립운동을 하면서부터 부른 이름이라 한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는 아버지 최순경과 함께 큰아버지 최선경(강학영의 외조부)의 집에서 생활하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애국심이 강한 최윤구는 당시 나이 17, 18세때부터 의병과 독립군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일제의 통치와 등살에 더는 살길이 없자 그들 일가는 1923년에 압록강을 건너 관전으로 왔다가 이듬해 신빈의 라줄(砬嘴)이라는 곳에 정착하고 조선에서 하던 야장간일과 지주의 땅을 부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세기 20년대초 최윤구는 벌써 량세봉의 조선혁명독립군을 따라 동북의 료동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는데 그는 이미 량세봉 수하의 중요한 군사지휘관의 한사람이 되였다. 그는 19살에 한 농민의 딸과 결혼하였지만 처가집으로 보내고 계속 항일운동에 나섰다.

"외숙부가 집을 나선지 3,4년동안 소식이 없다가 불쑥 집에 나타났대요." 이해가 1932년, 갑자기 집에 나타난 그는 100여명 전사들이 뒤산골짜기에 숨어있는데 먹을것을 준비해달라고 하였다. 집에서는 부랴부랴 감자와 강냉이 등 음식을 장만해주었는데 그번의 상봉이 친인들과의 마지막 상봉일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다.

환인, 신빈 이 일대에서의 중조련합군은 일제침략자를 호되게 타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손실도 매우 컸다. 1933년 1월 량세봉은 왕청문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주요 지도부회의를 열고 조선혁명군 명칭을 회복하고(료녕민중자위군과 련합하면서 조선특무대로 불렀음) 대오를 개편하였다. 이때 최윤구는 제2방면군사령으로 임명되였다.

항일대오는 개편된뒤 사기가 올라 1933년과 1934년에 승승장구로 승리를 거두었다. 1934년 5월 최윤구는 항일군과 련합작전으로 통화에 있는 위보갑의 자위단, 파출소를 습격하여 총기와 권총 등 5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또 왕봉각부대와 련합하여 통화현의 일본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적군으로 하여금 8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1934년 9월, 량세봉이 변절자의 밀고로 암살된후 최윤구는 그의 추도식에 참가하여 사령을 위해 꼭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1935년 9월 20일, 조선혁명군 제1방면군사령 한검추, 제2방면군사령 최윤구 등은 왕봉각부대와 회의를 소집하고 "중한항일동맹회"를 결성, 동맹선언을 발표하였다. 중한항일동맹회는 왕봉각을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고이허를 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한검추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조선혁명군은 량세봉사령의 유지를 계승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기로 하였다.

1937년 봄 조선혁명군 부사령 박대호, 제2방면군사령 최윤구 등은 동북항일련군 양정우사령을 만나 련합하여 항일할것을 서명하고 양정우사령의 배치하에 동북항일련군 교도퇀에 편입되였다. 이때 최윤구는 교도퇀참모장에 임명, 양정우를 도와 항일 최전선에서 적들과 싸웠다. 최윤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7년 12월 일본관동군 특무기관과 신빈현위만경찰들은 최윤구를 체포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댔다. 그들은 최윤구의 사촌형 최승복과 사촌동생 최승률을 신빈현감옥에 가둬두고 온갖 형벌을 가하였다. 최승률은 감옥에서 반년동안 갖은 매와 형벌을 당하여 귀가 멍이 들었고 몇달동안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적들은 최승복을 엄동설한에 장백산의 깊은 산속으로 끌고 다니면서 최윤구의 이름을 부르며 귀순하라고 소리질렀다. 최승복은 매를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였고 손과 발은 모두 얼음덩이가 되였다. 그들은 한달간 산속에서 돌다가 나무껍질에 “나를 잡으려거든 죽은 시체를 찾으라”고 씌여진 최윤구의 글을 보고서야 최승복을 풀어주었다. 최승복은 집에 돌아와 몇달동안 집에서 병치료를 받아야 했다.

1938년 12월 27일 양정우사령이 인솔하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경위려와 소년철혈대가 화전현 소류수하자에서 야밤에 위정안군을 섬멸하는 전투를 벌였는데 그 전투에서 최윤구는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1990년 5월 1일, 길림성 화전시에서는 이 지대에 "동북항일련군 소류수하자전적지"기념비를 세웠다.



화전시에 사비로 비석을 세웠지만

강학영일가가 최윤구장군의 행적을 수소문하기 시작한것은 일제가 패망한뒤 광복되여서부터다.

"최윤구가 떠난간후 마을에서는 최윤구가 독립군의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김일성장군을 찾아 무송으로 갔다고 했지요." 강학영은 당시 들은 말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1945년 심양에서 온 사람들이 최장군이 김일성장군과 같이 심양에 있다고 해서 외숙부 최승복과 최승덕이 즉시 심양까지 좇아갔습니다. 그때 이미 렬차가 조선으로 떠난뒤였습니다. 이때로부터 우리 일가에서는 반세기남짓 무정장군을 최윤구로 잘못 알고 자나깨나 만날 날을 학수고대해왔습니다..."

강학영 일가가 자기들이 그렇게 찾던 사람이 무정장군이 아니란것을 알게 된것은 2008년 강학영의 딸이 인터넷에서 우연하게 무정장군의 이름이 김무정이라는것을 안후부터였다. 그뒤 강학영일가는 다시 최윤구라는 이름으로 최장군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강학영은 2008년 12월에 신빈현에 량세봉장군의 흉상을 세우는데 로심초사했다는 정석숭선생을 만났다. 정석숭은 강학영이 사회주의교육운동 당시 한 공작조에서 같이 사업한 사람이였다. 정석숭은 1999년에 최윤구의 손자라고 하는 사람이 할아버지를 찾는다며 화전에 같이 간적 있는데 그때 화전시에 세워진 기념비에 최윤구가 아닌 최춘국이란 이름을 발견하고 한국에 가서 돈을 장만해 잘못된 비석을 바로잡겠다고 했다는 사실과 화전현당사연구실의 장수해라는 사람이 처음엔 최웅국으로 적었다가 후에 최춘국으로 고쳤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사실을 안 강학영은 이듬해 7월에 정석숭을 모시고 화전에 갔다. 가서 보니 말그대로 비석 앞면에는 "동북항일련군 소류수하자전적지"라고 쓰고 뒤면에는 최윤구가 아니라 최춘국으로 씌여져있었다. 그때는 장수해가 고인이 된뒤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심양으로 돌아온 그는 신빈현당사연구실의 조문기가 조선혁명군연구전문가라는 소개를 받고 조문기를 찾아갔다. 조문기는 자기가 쓴 "불타는 적개심(同仇敵愾)"이라는 책자에 도장까지 박아서 강학영에게 주며 잘 읽어보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온 강학영은 책속에서 최윤구가 량세봉을 따라 항일투쟁을 한 대단한 혁명가라는것을 새삼스레 느끼고 꼭 최윤구의 비석을 세우기로 작심하였다.

그전에 길거리에서 료녕성당사관련 책 한권을 산적 있는데 거기에도 최윤구의 사적이 적혀있었다.

여기서 외숙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으로 감개무량한 강학영은 2010년 5월에 료녕성위 당사연구실의 문을 노크했다. "5월 11일, 신빈현의 강학영녀사가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당사부문에서 외숙부 최윤구동지(조선독립군)의 료동지역에서의 항일력사를 밝혀달라고 했다. 성위당사연구실에서는 령도의 동의를 거쳐 '중공료녕성위 당사연구실 력사해명전문가팀'을 구성하고 최윤구동지의 력사문제를 밝혀내기로 하였다."고 성위당사연구실 관계부문에서는 적고있다. 관계부문에서는 관련 책자와 서류, 조문기 등 전문가와 공동연구를 통해 최윤구는 "위대한 애국자이며 불굴의 반일지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흥분한 강학영은 화전을 다녀와서부터 선후 네번 화전을 드나들며 비석을 세울 문제를 본격적으로 토의하였다. 그리하여 정석숭 등과 그리고 료녕성과 길림성 당사연구실의 협조하에 2010년 5월 21일에 원래 비석이 세워진 곳에서 20메터 떨어진 곳에 당시 최윤구가 어느 한 전투에서 희생되였다고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 이번에 세운 비석은 강학영이 화전시 홍석립자진민정국의 동의하에 완전히 사비로 세운 비석이다.

강학영은 비석을 세우는 과정에 또 최춘국이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누군가 그에게 "세기와 더불어"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귀뜸해주어 여러권으로 된 책자를 사서 보니 거기에는 과연 최윤구의 사적과 함께 최춘국의 사적도 소개되여있었다. 비록 두사람이 함께 항일운동에 투신한적 있지만 최춘국은 작고한 시간은 1950년이여서 비석의 주인공은 최춘국이라 아니라 최윤구가 분명하였다.

강학영은 또 최윤구의 행적을 수소문하던도중 1986년 조선 “로동신문”에 최윤구의 딸 사진이 실렸다는 소식을 듣고 2010년 11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사연구실에 직접 편지를 썼고 2011년 2월 11일에는 료녕신문에 최윤구의 딸을 찾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며칠뒤 주심양조선총령사관의 백령사가 최윤구의 딸 이름이 최효정이며 이미 작고했고 아들 최성범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최성범을 만나면 함께 최윤구의 묘비에 가서 절을 하고 술을 붓고싶습니다." 강학영의 감개무량한 말이다.



최윤구의 독립유공자 자손 모두 가짜

강학영은 최윤구의 행적을 찾는 과정에 한국보훈처에서 그의 독립유공자 자손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모두 가짜임을 알고 망연자실했다.

하나는 최윤구의 손자로 둔갑한 최희봉이다. 할아버지 최현구가 독립운동할 때 이름을 최윤구라 고쳤다며 최윤구의 사적으로 이미 한국 보훈처에서 건국훈장 "애족장"과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그는 화전에 와서 최윤구의 묘비가 최춘국으로 잘못된것을 보고 한국에 가 돈을 장만하여 다시 비석을 세우겠노라 하였지만 후에 들통이 나서 결국 독립유공자 자손이 아님이 밝혀졌다.

강학영은 이렇게 소개했다. 최현구는 나이가 조선의 수령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선생과 비슷했지만 최윤구는 1903년생이며 또 최현구는 경상북도 청도사람인데 반해 최윤구는 평안북도 초산군이기에 여러방면으로 봐도 맞지 않아서 이러한 내용을 보훈처에 신고하였다. 최희봉이 이미 독립유공자 후손자격을 박탈당한것으로 알고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한사람은 현재 미국에 살고있는 최인빈이다. 강학영에 의하면 그는 2014년 4월 12일 한국 족보로 신청하여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부친 최윤곽, 맏아버지가 바로 최윤구라는것이다.

"2009년 그때 화전에 갔을 때 화전현당사판공실로부터 일본에서 최인빈이라는 사람이 와서 비석을 끌어안고 통곡했다는 말을 듣고 최윤구의 동생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찾기로 맘먹었습니다. 처음엔 주심양일본총령사관에 가서 이런 사람이 있는가고 묻기도 했습니다."

후에 강학영이 한국보훈처에 가서 알려준 주소대로 사연을 적은 편지를 보냈는데 보름만에 편지가 되돌아왔다. 다시 그 주소가 진짜임을 확인하고 마침 정석숭의 손자가 미국에 있어 그 편지를 들고 주소대로 찾아갔다. 후에 강학영과 통화했는데 최윤구의 가족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있었다는것이다.

최승팔을 아는가 물으니 모른다며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해서 강학영은 최인빈이 최윤구의 동생의 아들도 아닌 생 남이라는것을 알아냈다. 화전에 가서 비석을 찾은 최인빈이가 귀국해서 곧장 "독립장"을 신청한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부터 고향인 신빈은 수십번, 화전도 넷댓번, 그리고 한국도 한해에 한번씩 다녀오다싶이 하면서 외숙부 최윤구의 행적을 찾아왔다는 강학영은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지만 다행히 외숙부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낼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소원이 있다고 했다. 길림성에서 통일적으로 화전시에 항일렬사기념비를 세운다하니 거기에 최윤구 이름 석자를 꼭 새겨넣어달라, 최춘국으로 잘못 세워진 비석을 최윤구로 고쳐주든지 아니면 자신이 사비로 세운 비석을 정부에서 인정해달라는것이였다.

현재 강학영은 료녕성동북항일련군사및항일전쟁사연구실과 료동항일영렬연구실의 협조하에 고향인 신빈 백기촌의 조상묘지에 최윤구장군의 기념비를 세우는 작업도 추진하고있다.

강학영은 얼마전 한국 보훈처에서 발간하는 "한민"잡지를 받았다며 한국정부에서 비로소 자신을 최윤구장군의 후손으로 인정해준다고 생각되니 만감이 교차된다고 전했다.

전정혁, 오지훈 기자

출처: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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