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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주석께 두루마기를 올린 그는 누구인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03.06일 13:22
—연변가무단 초대단장 김동구선생의 곡절 많은 인생려정



1950년 10월 3일,국경 1돐 기념 헌례공연장에서 모주석께 두루마기를 올리며 연변인민들의 마음을 전하는 김동구선생(오른쪽).

음력설을 며칠 앞둔 그날도 매서운 추위는 누그러들지 않았건만 올해 86세나는 로촬영가 황범송선생은 기어이 연변주정협 문사자료위원회《중국조선족백년실록》 편찬실을 찾아갔다. 그는 《살아생전에 꼭 〈수립〉해야 할 인물이 있어 그를 추천하러 왔다.》고 하면서 품속에서 흑백사진 한장 꺼내놓았다.

영원한 순간을 담은 한장의 력사사진을 찾아서

1950년 10월 5일자 《인민일보》에 실린 이 사진은 그해 10월 3일 저녁 7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한 전국 42개 소수민족대표단이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주석과 중앙지도자들에게 선물을 올리는 헌례식에서 조선족두루마기를 걸치고있는 풍채가 름름한 모택동주석과 선물을 올리고있는 조선족대표의 옆모습이 담긴 사진이였다. 이 사진을 황범송선생은 근 40년을 간직해왔다고 한다.

당시 《동북조선인민보》사(연변일보의 전신) 촬영기자로 사업하던 황범송선생은 인민일보에 실린 《위대한 민족의 열애!》라는 기사에 배합된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촬영가로서의 직감으로 그 의미를 한눈에 읽어냈다.전국 소수민족을 대표하여 조선족 관련 사진이 인민일보에 실렸다는 그 자체는 너무도 큰 의의를 시사하고있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사진작가에 대한 정보며 원본사진을 얻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72년 연변박물관 촬영기자로 전근하게 된 황선생은 연변항일투쟁사와 관련된 사진자료들을 수집하면서 북경에 있는 왕일지동지(주보중장군 부인)를 통하여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런 와중에 북경에서 원 중공중앙위원이며 중국촬영가협회 초대주석, 신화사 사장으로 지내는 석수화동지를 만나게 되였고 또 그로부터 그 사진을 촬영한 신화사의 정경강(郑景康)기자를 소개받게 된다.



1946년 봄, 제16병퇀 작전참모시절 한차례 토비숙청에서 대승을 거두고 범까지 잡은 마당에 통신원과 함께 로투구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김동구참모(오른쪽) .

정경강기자(1904년)는 광동성 향산현(지금의 중산시) 사람으로서 일찍 상해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상해과학대학 촬영기자로, 연안 팔로군 총정치부 선전부 촬영기자로, 신화사기자로 활약하고있었다. 그는 일찍 1944년에 모택동주석의 첫 표준상을 촬영하였으며 천안문성루의 모주석초상(1964년)도 촬영하였던것이다.

황선생은 정경강기자에 대한 흠모의 정을 안고 북경 신화사문헌보관관, 중앙선전부 신문처 등 곳을 찾아다니며 원본사진을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정기자한테 부탁해봐도 《건판은 없고 사진 한장은 있었는데 찾을수가 없으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러던 1978년경 정경강기자가 심장병으로 치료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모처럼 자택으로 병문안을 갔다. 그 자리에서 정기자는 《그러찮아도 황선생을 만나려던참이였다.》고 하면서 《 모주석께서 조선족두루마기를 입고계시는 이 사진을 연변에 가져다 잘 보관하라.》며 깊이 두었던 그 사진을 꺼내주셨다. 그리고 이듬해에 세상을 뜨셨다.

황선생은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해두고있다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에 즈음하여 1982년경에야 여러 간행물들에 공개를 하였다. 그러면서도 모주석께 선물을 드리고있는 그 조선족대표의 이름은 밝힐수가 없어 퍽 안타까왔다고 한다.

그것은 그 대표가 력사적으로 《우파분자》였기때문이라고 한다.

파도 세찬 세월의 강을 넘어

당시 그 대표는 연변문공단(연변가무단) 초대단장 김동구(金东久)선생이였다. 그는 《우파》이기 앞서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영용한 조선의용군전사였다.

김동구선생은 1924년 8월 한국 충청남도 론산군 사절리에서 태여났다. 고향에서 중학을 나온 뒤 일본 오사까전의대학(大板电医大学)에서 고학하던중 1943년 9월 학도병으로 끌려 중국 화북지구로 왔다.

2개월간 혹독한 군사훈련을 하는 도중 9명의 조선인 학도병들은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대신하여 침략자로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일본군병영을 탈출할 계획을 주밀하게 짰다. 큰산 두개만 넘으면 신사군이 있다는 정보까지 입수한 그들은 단지동맹을 맺고 《절대로 변절하지 않으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혈서까지 썼다.

11월초 비내리는 캄캄한 밤, 9명의 조선인학도병들은 약속시간에 맞춰 변소로 빠져 몰래 병영을 탈출하였고 기고 뛰고 하면서 신사군쪽으로 움직여갔다. 낮에는 깊숙한 산골짜기에 숨어있다가 밤이면 가시덤불을 헤치며 산을 넘었다. 드디여 신사군병영에 당도한 그들은 흰적삼을 벗어 백기로 삼고 신사군에 《투항》하였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조선인학도병들이라는것이 확인되자 다시 태항산항일근거지의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교장에 무정장군, 정률성이 교무장임) 로 넘어가게 되였다. 거기서 학습과 훈련을 거쳐 의젓한 조선의용군전사로 된 그들은 일제와 싸우는 전장터로 나갔다.



1947년 여름, 김동구작전참모(왼쪽)는 통화전역을 마치고 통신원과 마부 오기일과 함께.

그뒤 조선의용군대오의 연안 진출과 함께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학습하게 된 그는 벽보활동에 앞장서면서 문필재능을 펼쳤고 선전고동사업에서 큰 역할을 발휘하였다. 1945년 3월, 그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연안에서 항일전쟁승리의 그날을 맞이한후 주덕동지의 6호명령에 따라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출하였다. 김동구선생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 작전참모로 활약하면서 동만근거지 정권건설과 토비숙청, 해방전쟁의 진두에 섰다. 1948년 장춘해방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방에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얼마간 건강이 회복된후 그는 할빈에 있는 동북조선민족사무위원회 당총지서기로 사업하다가 1949년 4월부터 연길에 있는 동북조선인민보사(지금의 연변일보사)의 총편집으로 사업하였으며 1950년 5월 연변문학예술 공작단 (지금의 연변가무단) 단장으로 전근하였다. 그뒤로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처(주문화국 1952년) 처장으로 사업하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계련합회 주석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그 시기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1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된 동북구조선족대표단의 일원으로 림민호단장(당시 연변대학 부교장) 의 인솔하에 연변문공단 40명 연예일군들을 지휘하여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주석과 중앙지도자들앞에 헌례공연을 올렸다. 헌례식에서 조선족대표단은 금기와 서명부, 조선족 저고리와 조끼, 바지 한벌, 옥벼루, 비단 꽃방석 등을 선물하였다.

연변문공단 김동구단장이 회색두루마기를 모주석께 입혀드렸는데 두루마기의 길이와 품이 모주석의 웅장한 체구에 보기 좋게 어울렸다. 모주석께서는 아래우를 훑어보시며 매우 기뻐하시더니 손 저어 사이를 표하였다. 그러자 대청에서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반룡해, 김창호의 《국경 첫돌에 드린 겨레의 선물》에서 참조)

그날, 문예공연에서는 김동구 작사 박우(朴祐) 작곡으로 된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났다》는 노래가 우렁찬 합창으로 회인당이 떠나갈듯 울려퍼졌고 모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은 일제히 일어나 힘찬 박수를 보냈다. 이 합창곡은 나중에 한어로 번역되여 레코트에도 올랐다.(1951년 《동북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가곡집 제1집에서 참조)

연변문단에 다시 오른 그 이름

김동구선생은 1957년말까지 주문화처 처장으로 사업하는 한편 직업작가로 소설, 산문, 수필, 가사들을 창작하였다. 그리고 외국문도서(장편소설)도 번역하였다. 그의 번역작품으로는 《살리만》,《간첩 소롯의 마지막》,《괴멸》,《지원군의 하루》등이 있다.

1957년 그는 단편소설 《개고기》를 창작하여 《아리랑》잡지 7호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빌미로 되여 반우파투쟁이라는 정치운동속에서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우파분자》라는 터무니없는 정치감투를 쓰게 된다. 당시 연변문단의 김학철, 최정연, 고철, 채택룡 등 우수한 작가들도 우파분자로 몰려 온갓 고역을 치렀다.

김동구선생의 부인 리정숙은 이에 련루되여 연길시2중 교단에서 쫓겨났고 큰딸 봉란이도 《반동새끼》로 몰리여 밖에 나서기만 하면 돌총을 맞군 하면서 학비 3원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당시 리정숙은 살길을 찾아 다섯 아이를 데리고 돈화현 한 편벽한 시골 친척집곁으로 갔으나 그곳에서도 《우파분자》가족이란 감투때문에 온갖 천대를 받았다.

1962년 김동구선생은 5년간 로동개조를 마치고 연변인민출판사 편집으로 배치받았다. 연변 문학예술계의 권위자의 일원이였던 그가 편집일군으로 나떨어진것은 둘째치고 각종 활동이나 행사에도 참여할수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온역처럼 피해다녔다. 또다른 《감옥살이》를 하게 된 김동구선생은 그만 강을 건너 타국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먼 후날 연안시기 로전우였던 고철선생이 아버지를 찾아와 우파루명을 벗었다는 정부문건서류를 내놓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것이 이제 무슨 소용 있냐〉며 당장에서 와락와락 찢어버리는것이였습니다. 》 김동구선생의 큰딸 김봉란씨는 당시 졍경을 회고하면서 평생을 손에서 필을 놓지 못하고 계시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신상을 눈물로 하소연하였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시가전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큰딸에게 물었다. 영문을 몰라 빤히 아버지 얼굴만 쳐다보는데 아버지는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드디여 입을 여시였다.

《시가전에서 적들의 기관총이 불을 토하며 전진하는 전사들을 마구 쓰러눕힐 때 맞불질하여 전사들의 앞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총을 받칠만한 턱이 없다. 손에 닿는대로 무져쌓고 총을 쏘게 된다. 전쟁을 치르고난 뒤면 총을 받치고있는것은 다름 아닌 전우들의 시체라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시체들은 하나같이 두눈을 부릅뜨고있었다. 아버지는 눈만 감으면 전우들의 그 부릅뜬 눈이 눈앞에 선하여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아버지는 희생된 전우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했다.

《아버지, 〈개고기〉인지 뭔지 그때문에 온 집안을 개판 만들어놓고도 성차지 않아 또 글을 쓴다구요?!》 온집식구들은 아버지께서 필을 잡을세라 극력 반대해나섰다. 그런중에도 아버지께서는 언제 썼는지 모르게 《추억속의 사람들》이란 전투실화를 써냈다. 그리고 그것을 큰딸에게 맡기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하였다. 큰딸 봉란이는 《장춘전역》이며 《방락권》이며 하는 단어들을 대충 읽는둥마는둥 하다가 아버지 몰래 어딘가에 처박아버렸다.

그러던 1985년의 하루, 아버지께서는 두어깨를 축 떨어뜨리고 창밖을 응시하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혁명에 참가하는 날도 비가 내리더니 혁명에서 물러서는 날도 비가 오는구나!》 그날은 아버지께서 정년퇴직을 하는 날이였다.

1999년 8월 심근경색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김동구선생은 75세를 일기로 한생을 마쳤다. 그는 세상을 하직하면서 《곡절》이라는 단편소설 한편을 유작으로 남겨놓았다. 봉란이는 차마 아버지의 그 유작마저 버릴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한차례 차사고에서 갈비 여섯대가 부러지면서 운신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에 병석에 누운채로 한자두자 이 글을 써냈던것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 글을 쓰시느라 생명을 더 연장한것 같아요. 》

봉란이는 세상뜬 아버지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 달리 없었다. 아버지께서 필생의 정력으로 써낸 《추억속의 사람들》이란 전투실화를 자기 손으로 없앤것만으로도 가슴치며 통탄할 일이였다. 그는 아버지께서 필사적으로 써낸 그 소설을 꼭 발표해드리고싶었다. 하여 그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여 연변대학 김관웅박사한테 원고심열을 부탁하였다.

김박사는 2013년 《연변문학》 제6기 《세계문학의 거울에 비춰본 우리 문학》이라는 정기코너에 《 〈개고기〉 에 비낀 〈뚱뚱보와 말라꽹이〉의 그림자》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개고기》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통하여 《〈개고기〉는 해방초기 엄혹한 정치풍토에서 너무 일찍 피였다가 꽃샘의 찬바람속에 속절없이 스러진 한송이 아름다운 문학의 꽃이였다.》 고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후 2014년 《연변문학》 제7기에 특별기획으로 김동구선생의 유작 《곡절》이 소개되였고 따라서 《곡절적인 인생의 그림자가 비낀 소설-김동구선생의 단편소설 〈곡절〉을 읽고서》라는 김박사의 평론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김박사는 《반우파투쟁으로 인한 인간비극은 결코 연변문단에서 김동구선생 한분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다. 억울하게 20여년동안 사회적으로 〈금고형〉을 당했던 김학철, 최정연 등은 모두 중화민족의 해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위해 항일전쟁 또는 해방전쟁에서 용감하게 피 흘려 싸웠던 혁명선각자들이며 혁명투사들이였다.》고 명백히 밝혔다.

황범송선생은 이 모든 문헌자료들을 스크랩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정치협상회 문사자료위원회에 바쳤다.

/ 김원범 김청수 (사진 황범송 제공)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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