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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무려 다섯번이나 바뀐 단어 하나…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07.14일 09:57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13)

저명한 조선어학자 서영섭교수에게서 듣는 우리 말 60년



서영섭 프로필:

1957년에 연변대학교를 졸업.

1960년 중앙민족대학교에 전근. 저명한 조선언어학자.

은퇴할 때까지 중앙민족대학교의 조선어과 인솔자로 활약. 조선학연구소를 창립.

주요저서로 《朝鮮語自習讀本》, 《조선어실용문법》, 공저로 《조선어문법》, 《한조사전》 등이 있음.

중국조선어학회 부리사장,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소수민족어문 번역 출판 고급직함 평의위원, 국가 교육위원회 중학 조선어문 교과서 심사위원, 산동대학 객원교수, 한국 성균관대학교 초빙연구원, 중국사회과학원 아세아태평양연구소 고문 등을 력임.

현재 북경대학 한국학 연구중심 특약연구원 겸 한국학총서 부주필, 중앙인민방송국 고문 등을 맡고있음.

중국조선어학회 우수저작상, 북경시 대학교 철학사회과학 연구성과 우수상, 북경시 고등교육국 교수(敎學)우수상 등을 받음.

국무원 정부 특수수당금(津貼)향수,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 증서 받음.

《말과 글, 심지어 이름 석자까지 빼앗겼던 우리 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더불어 당과 정부의 혜택으로 자기 말과 글을 되찾았고 우리 말 우리 글의 보존과 발전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여서 그 덕으로 저는 공부하게 되였고 그 덕으로 빼앗겼던 말과 글을 되찾아서 배울수 있게 되였고 가르칠수 있게 되였으며 또 그것을 연구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어문 정책을 집행하는데 기여하게 되였습니다.》고 서영섭교수는 감개무량히 말한다.

―서영섭교수 취재노트에서

자기 이름 석자마저 빼앗겼던 우리가 오늘은 …

기자: 우리 말과 우리 글 다시 말하면 조선어의 보존과 발전은 중국조선족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오늘의 발전이 있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말과 우리 글이 없었더라면 중국조선족이 어떤 모습일가 상상할수도 없습니다. 중국조선어학계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분으로서 교수님께서 보시는 건국이후 조선어의 발전과정은 어떠하십니까?

서영섭: 말과 글, 심지어 이름 석자까지 빼앗겼던 우리 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더불어 당과 정부의 혜택으로 자기 말과 글을 되찾았고 우리 말, 우리 글의 보존과 발전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건국후 정부에서 민족어문을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와 권리를 보장시켜줬기에 우리 민족은 소학으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민족어문의 완벽한 체계를 세웠는데 이는 아마 중국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언어는 신문, 방송, 출판, 연극,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특히 교육면에서 전국적으로 천명당 14명 정도의 대학진학률에 비해 우리 조선족은 43명, 다시 말하면 3.1배에 달하는 진학률을 보장하고있습니다. 고중진학률로 볼 때 천명당 79명의 진학률에 비해 우리 민족은 229명으로서 2.6배에 해당합니다. 초중진학률로 볼 때 전국적으로 천명당 223명인 진학률에 비해 우리 민족은 337명으로서 1.4배에 해당합니다.

언어는 사회의 산물로서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건국 60년동안 우리 민족 언어도 미증유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어음이나 문법보다도 어휘에서 더 풍부한 구성을 이루게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인민넷 스튜디오에서 인터뷰생방송을 하고있는 서영섭교수와 김홍화기자.

다섯번 번복한 《공인》―《로동자》

기자: 지난 60년간은 또 조선어가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오기도 한 60년입니다. 조선어 연구와 교육의 일선에서 교수님께는 절실한 체험이 있을텐데요.

서영섭: 건국이후에도 정치기후의 변화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선어는 또 파란만장한 운명을 겪어왔습니다.

해방직후 1957년까지 자기 민족어문을 회복 발전시킴에 있어서 좋은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58년부터 63년까지 당시 반우파, 반우경투쟁,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등 좌적인 영향하에서, 특히 중국 제2차 소수민족어문과학토론회 이후 극좌적인 사조로 인해 조선어의 발전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63년부터 65년까지 말의 내적발달법칙에 의해 발전시키려 했지만 뒤이어 문화혁명으로 말미암아 또 위난의 시기를 맞았습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여러 원인으로 재래의 규범을 쓰는가 하면 또 한국의 규범을 가져다 쓰고 한 책에서까지 이런말 저런말을 쓰는 언어규범의 혼란을 빚어왔습니다.

전형적인 실례를 든다면 우리는 해방직후에 《로동자》라고 써왔는데 좌적인 영향으로 《공인》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다가 63년도에 다시 《로동자》로 바꾸었는데 문화혁명으로 또다시 《공인》으로 바꾸고 개혁개방후 다시 《로동자》로 되돌아오는 곡절적인 과정을 겪었습니다.

《밥 먹다가 돌 씹은듯 하다》 는 농민의 사연

기자: 현재 조선어 사용상 문제점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현재 조선어사용에서 어떤 문제들이 나타나고있습니까 ?

서영섭: 현재 조선어사용에서 존재하는 문제들을 보면

하나- 우리 말에 있는데도 쩍하면 한어로부터 그대로 받아들여 쓰는 현상. 이를테면 우리 말에 있는 《유년》을 《동년》으로 쓰고 이를 사전에 올리며 《과학자》를 《과학가》로 쓰는 현상 등.

둘- 한어에도 없고 조선어에도 없는것을 억지로 만들어서 쓰는 페단.

셋- 적중하지 못한 표현을 쓰는데 이를테면 한 신문에서는 《연변고기개 생산예비 발굴》 즉 《고기개를 생산한다》고 말하고있습니다. 사실 《개는 생산》하는것이 아니라 《사육 혹은 사양》을 씁니다.

넷- 외래어를 필요이상 람용입니다. 연변의 한 농민은 신문을 읽다가 외래어를 보면 밥을 먹다가 돌을 씹은듯 하다고까지 합니다.《머리맵시》를 《헤어스타일》로 등.

다섯- 사투리 사용입니다. 례컨대 《왜》가 표준어임에도 불구하고 《왜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섯- 품사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 《하다》를 마음대로 붙여서 《바탕으로》를 《바탕하고》 등 덜된 말들.

더 엄중한 문제는 이런 결함을 결함으로 알고있지 못하고 결함을 모르는 결함이 가장 큰 결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듣고 보기 쉽게》가 목적

기자: 조선어의 정확한 사용과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조언을 하신다면 …

서영섭: 우리가 언어를 쓰는 목적은 자기 유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 특히 인민대중이 알기 쉽게 자기 말을 리해하도록 하는것이 유식함의 표현인데 군중들이 알든말든 쩍하면 한어거나 외래어에서 받아들여 쓰거나 하는 등 당전 조선어사용상 엄중한 문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우리 자체가 자기 허물을 알고 이미 정한 규범에 좇아 말을 하고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조선족 언론사나 잡지들에서 독자와 청중을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말과 글의 목적은 상대가 알아듣기 쉽게 알아보기 쉽게 하는것이 말과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인정하는 쉬운 글자를 갖고서도 한어식을 그대로 옮겨 쓰는데 규범에 의해 받아들인것은 쓰고 개인적으로는 마음대로 창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말, 자기가 쓰는 글이지만 인민대중을 위해서 썼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어문자 사용에서 결함을 모르는것이 가장 큰 결함이다》라고 말하고싶습니다.

세계글자의 순위에서도 조선글은 단연 1위

기자: 조선어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특히 컴퓨터를 주요수단으로 하는 정보화에서 세계 그 어느 언어보다도 뛰여난 과학성과 선진성이 있다고 하는데 … 우리 말 우리 글의 우세는 진정 무엇입니까?

서영섭: 우리 말과 글은 민족유산가운데 아주 전형적인 우수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글자에 관해 독일 가벨린치(佳別林奇)교수는 《조선문은 다른 어떤 문자보다 쉽게 빨리 배울수 있어 몇분안에 익힐수 있으며 한 민족이 소유하고있는 문자가운데서 이처럼 과학적이고 간단한 문자는 처음 본다》고 했고 미국 라이 샤워(萊夏沃)교수는 《조선문자는 아마도 그 어떤 나라에서 쓰는 문자보다 가장 과학적인 문자체계일것이다》라고 감탄했습니다.

몇년전 열린 프랑스언어학자회의에서 국제음성기호로 세계언어를 적기에 불편하므로 아예 조선문자로 국제음성기호를 대체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댔습니다. 세계글자의 순위에서도 조선글은 단연 1위로 정해졌고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는 우리 문자의 과학성과 합당성, 독창성을 고려해 역시 세계문자의 1위로 내놓았습니다.

세계교육과학조직기구에서는 1997년 10월 1일에 우리 문자를 기록유산으로 제정했고 세계언어학에 대해 공로가 있는 자에게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상을 줍니다. 그런가 하면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우리 문자로 자기 말을 적도록 시험하고있고 카나다에서는 장애인들에게 우리 글자로 글을 배워주니 효률이 아주 높다는것입니다.

이런 우수한 글에 의해 우리 민족은 중국 56개 민족중 소수민족대학, 농민대학도 제일 먼저 세우고 9년제의무교육을 제일 먼저 완성했습니다. 이는 첫째로 중국정부의 덕이고 둘째는 우리 민족이 애쓴 보람이며 셋째는 우리 말과 글의 우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석자도 잃었던 그가 저명한 조선어학자가 되기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여서 그 덕으로 저는 공부하게 되였고 그 덕으로 빼앗겼던 말과 글을 되찾아서 배울수 있게 되였고 가르칠수 있게 되였으며 또 그것을 연구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어문 정책을 집행하는데 기여하게 되였습니다.》고 서영섭교수는 감개무량히 말한다.

1949년도는 서영섭교수가 중학교 2학년때이다. 중학교에도 가기 어려운 처지에서 아버지 몰래 시험을 쳐서 중학교에 붙었으며 졸업후 학교 교장님이 연변사범학교에 추천해 국가비용으로 공부를 하게 되였다. 졸업후 소학교 교원으로 가야 했지만 또 대학에 추천을 받아 대학 4년간 무료로 공부할수가 있었다. 졸업후 학교에 남아 교원사업을 하다가 후에 중앙민족대학에 전근해왔다.

《조선어학자는 사실 저는 자원해서 전공한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조직의 수요로 된것입니다》고 서교수는 회고한다.

소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집에서 《가, 갸》를 다 배웠고 천자문을 배웠기에 배울것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월반을 시켜 2학년에 올라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제국주의의 민족어 말살정책에 의해 학교가 페교되고 일본어학교에서 다시 1학년부터 공부하게 되였다. 학생이 학교에서 만약 조선어를 사용하면 벌로 목에 패쪽을 걸고 변소청소까지 시켰다. 이런 인격적인 모욕으로 자기 민족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어를 쓰도록 강요당했고 자기 목에 걸었던 패쪽을 빼려고 학생지간에도 서로 감시하고 신고하는 노화교육을 뼈저리게 받았다.

해방후 다시 우리 말과 글을 찾아 교육을 받게 되고 나중에 대학에 남아 교육사업을 하게 되였는데 학교에서 언어학 교수임무를 맡기는 바람에 결국 언어학을 선택하게 되였고 연구하는 과정에 우리 말의 우수성도 알게 되고 우리 말과 글이 좋다는것도 알게 되였다고 서교수는 말한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대학 교단에 서서 현대조선어를 가르치다가 사업의 수요로 중앙민족대학에 전근했는데 와보니 조선어전공은 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모를 문제가 있어도 물을 곳이 없었고 할수없이 편지로 은사님들이거나 혹은 국외에 문의를 보냈지만 언제 대답을 받을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남이 쉴 때도 열심히 책을 볼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의하자니 교과서가 필요되여 교과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주다나니 그 글자수가 백여만자나 되였다. 또한 짬짬이 시간을 리용해 연변에 온 한족하향청년들의 수요에 의해 《조선어자습독본》을 썼는데 7만명에 달하는 한족하향청년들에게 좋은 교과서로 되였다.

문화혁명후에는 대학용 교과서 겸 중학교 조선어문교원들의 참고 교재로 《조선어문법》을 썼다. 개혁개방후 조선어사용상 이러저러한 문제가 생겨 편집들이 실용적인 문법을 써줄것을 요구해 7, 8년동안 수집한 자료에 의해 《조선어실용문법》을 썼다.

서교수는 중국 고등교육사업에 뛰여난 기여를 해 국무원 정부 특별수당금을 향수하고있다.

한편 조선어의 학술적발전과 국제적보급,민족학술의 선양에 큰 기여를 한 공로로 한국 동숭학술상을 수여받았고 《한글의 진흥과 발전에 공적이 인정》되여 한국 문화훈장과 대통령상을 수여받는 등 국내외로 조선어 교육과 연구에서의 그의 공로가 인정되였다.

/ 인민넷 김홍화기자 본사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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