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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모주석께서 몸소 저에게 술 부어주셨다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12.10일 15:32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52)

한시대를 이름 날렸던 모범녀성 리옥금할머니 만나본다



리옥금 프로필:

1921년 7월 15일 지금의 흥안향 발전촌 빈고농가정 출생.

8살부터 머슴살이

14살부터 농사일에 참가

26살 중국공산당 조직에 가입

27살 초급농업사 세움, 농업사주임

29살부터 농업합작고급사 부주임

32살부터 60세까지 연길현 동성공사 영성대대 집체농장 부주임, 영성대대 부녀주임, 지부위원, 지부부서기, 생산대장 등 직 력임

주요영예

6차례나 모주석의 접견을 받음.

1948년 연길현 특등로력모범 황소를 상으로 받음

1949년 3월 동북대표로, 첫 조선족대표로 제1차 중국녀성대표대회 참가

1949년 12월 중국대표로, 첫 조선족대표로 아세아부녀대표대회 참가

1951년, 1953년 길림성 1등 로력모범으로 당선

1962년 3월 중국 첫패 《3.8》붉은기수로 당선

1978년 9월 제4차 전국녀성 대표대회 참가

1979년 3월 재차 전국 《3.8》붉은기수로 당선

1946년부터 연길현, 연변지구, 길림성, 국가 로동모범, 군렬속 모범, 《3.8》붉은기수 등 총 60여차 수상

조선족 혁명가정, 렬사가정의 가장 전형

리옥금할머니의 이웃집에 살고있는 조금순 (72세)로인의 안내로 리옥금할머니집을 방문하게 되였다. 건강하시다는 말을 들었지만도 그렇게 정정하실줄이야. 곱살하고 상냥한 맵시가 력력하고 몸놀림도 얼마나 가볍고 민첩하신지 89세 로인이라기엔 놀라웠다. 더구나 혼자서 살림을 하신다는 집안 어데라없이 정리가 깔끔하게 되여있었다. 이렇게 혼자 계신지가 이삼년 된다고 한다.

기자는 할머니와 함께 밥을 해먹으며 이 전설같은 조선족녀인의 감동을 자아내는 일생을 취재하였다.

리옥금은 두 딸을 둔 전남편 림지룡을 흑산전투에서 잃었다. 이어 두 시동생을 항미원조전쟁에서 잃었고 둘째시동생은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부상당했다.

후에 조직의 소개로 결혼한 후남편도 항일전쟁에서 부상당한 항일간부였다. 더 기적같은 일은 그 후남편과 살면서 태여난 세 아들이 데려온 며느리 셋이 다 항일렬군속집 딸이였던것은 우연속의 필연이 아닐수 없었다고 한다.

리옥금할머니는 그야말로 해방받은 중국의 로고대중의 일원대표이고 중국조선족혁명가정의 전형대표이며 해방사업과 조국건설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온 전형적조선족녀성의 대표라고 할수 있다.

당에 보답할 길: 《나라찾은 기쁨 , 일하다 죽어도 행복일것 같았소》

《이 아매때문에 우리도 일을 죽게 했소.》하며 조금순로인이 우스개말로 말머리를 떼자 《그래 그래》수긍하면서 리옥금할머니는 이내 기자의 손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대는것이였다. 흠칫 놀랐다. 우리가 말하는 뒤통수에 손두께만큼 움푹하게 꺼져들어간 자리가 량쪽으로 나있는데 《왜 이럽니까?》하는 놀란 물음에 두 로인은 이구동성으로 《일해서 남은거요.》고 한다…

어려서부터 물동이와 쌀함지같은것을 이고 자랐지만 생산로동에 참가하면서 그 머리로 거름, 흙모래, 돌덩이 할것없이 이고 하다보니 류수같은 세월속에 결국 그렇게 패이더란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실은 그 패인 자리가 뇌압박, 시신경압박후환을 남겨 시력도 못해졌고 뇌수축도 가속화하고 있었는데 《룡정시로간부건강보건지도중심의 오정묵박사의 지극한 정성으로 6년째 무료로 매달 10첩의 중약을 먹으니 이렇게 거짓말처럼 아직 펀펀하다니까.》하며 로인은 오늘날의 고마움이 크다고 말씀하신다.

너무나도 처참한 해방전의 아픔이 있었기에 해방과 새 조국이 그렇게 소중했고 당과 나라에 보답하려 몸과 마음 다 바쳐왔던 시절이 그래도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지주의 뭇매질에 세상을 뜬 아버지, 단돈 8원에 팔려간 언니, 지주집 개한테 뜯기워 몸져누운 어머니, 자기도 8살에 지주집머슴으로 들어가 갖은 고생 다 한 해방전의 생활을 리옥금할머니는 한마디로 《정말 우마같은 생활을 했지…》라고 한다. 그러다가 25살에 연길현 등 동북지역이 해방을 맞아 농회와 고빈농단에 가담하여 지주, 한간주구를 청산하고 투쟁하여 땅을 분배받아 일하느라니 마냥 힘이 솟구쳤다고 한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할머니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던 사정도 사정이였지…》한다. 당시 《일체는 전방, 전선을 위한다》는 구호가 바로 최고지시였을 때다. 고농출신의 남편이 해방을 맞기 바쁘게 당의 호소를 받들고 경비대를 무어 토비숙청하다 부대따라 흑산전투에 나가 희생, 시동생 셋도 이어서 전선으로 나가다 나니 25살의 리옥금이 가문의 주요로력으로 시부모와 시누이들과 딸 둘까지 아홉식구를 거느리게 되였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에 80여호에서 장정들이 다 전선지원에 나갔으니 부녀들이 주로력이고 로약자들만 남았다.

리옥금은 부녀회회장, 민병련장, 촌장직을 맡아 호리를 대는 방법부터 배우느라 호리를 3개나 꺽어먹었다고 한다. 네번째호리로 끝내 배워내고 또 다른 녀성들한테도 배워주어 결국 그 마을의 밭을 녀성 7명이 호리질을 해냈다고 한다. 밭갈이, 논다비질, 후치질뿐만 아니라 김매기, 탈곡 철마다 거의 집집마다가 일손이 문제가 되자 리옥금은 계절에 따라 호조조를 무어 해결해 촌민들이 엄지를 내둘렀다. 이 호조조경험이 연변지구에, 또 길림성 부녀조직을 통하여 선전, 보급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증산효과를 내느라 집집이 어린애들 오좀 한방울 버릴세라 모으게 하였다. 자기집 단지를 촌민들에게 나누어주고도 모자라 사서 나누어 주고, 시내에까지 들어가 같은 방법으로 분변을 거둬들여 비료를 만들어 생산을 발전시켜 전선지원에 앞장섰다. 두 손으로 거둔 량곡을 국가량식창고에 공량으로 바칠 때 그처럼 뿌듯할수가 없었다며 그래서였던지 쌀마대를 씽씽 메고 높다란 량식뒤주에 올린 그녀는 린근에 《꼬리없는 황소》라 소문높았다고 한다. 1946년, 연길현 군가족모범으로, 이듬해엔 렬사유가족모범으로, 1948년엔 연길현 특등로력모범으로 당선되여 황소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사실 그해 2월 2일 그녀는 비밀리(당시 당원신분은 비밀이였다)에 이미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고 한다.

그때를 회상하며 《나한테는 달이 해였소.》하는 리옥금할머니, 낮에는 지주, 한간, 토비 청산, 투쟁활동에 시, 구 회의정신 전달, 전선형세 전달 등 회의가 많아 일을 못하면 달빛이 있을 때 밤에 일을 하였다고 한다. 날이 밝는 새벽에 호리를 벗기는 일은 례사고, 시계가 없던 세월이라 쪽잠을 자다 휘영청 밝은 달을 보고 날이 밝았는가 해서 일하는 종을 치고 일밭으로 달려간적도 한두번이 아니란다. 《발펴고 옷을 벗고 잠을 잔 기억이 별로 없고 신벗고 앉아 밥먹은적 없이》 일해온 그녀였다.

《부모자식간에도 일이 사랑이라는데 당의 령도아래 해방받은 몸으로 자기 땅의 주인으로 일하다 죽어도 행복일것 같았소. 하물며 지주, 토비를 청산하고 투쟁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며 후방에서도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지시가 있는데야.》리옥금할머니의 예이제없는 무조건적인 혁명각오였다.



당년 천안문광장에서의 리옥금

모주석께서 부어주신 술잔을 받던 날

치마저고리를 한벌 챙기고 우리말밖에 모르는 그녀를 위하여 전문 번역원까지 배치해서 동북구 부녀간부와 함께 3명이 8일간 북평(북경 당시의 이름 )역에 내렸는데 그 한길에서 철도 연선의 백성들의 꽃다발 든 환송을 받던 감격이 잊어지지 않는단다. 《특히는 모주석을 만나던 날의 정경을 눈감을 때까지 잊을수 없다》고 리옥금할머니는 말한다.

대회는 1949년 3월 24일 북경 회인당에서 열렸는데 리옥금은 유일한 조선족대표일뿐만 아니라 주석대성원으로 당선되기까지 하였다. 대회 3일만에 주석대성원들을 실은 차가 한창 어딘가에 가서 멈춰서기에 내리고보니 바로 북경의 군용비행장이였다. 그때 리옥금은 조직의 배치대로 쪽지머리, 치마저고리에 코신차림을 하였는데 그제서야 그날 북경으로 입성하는 모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을 환영하러 온줄 알았다고 한다. 모주석을 만날 순간을 생각하니 그 무엇이 목을 꽉 메운것 같았고 북경으로 온다할 때 자기를 환송하던 고향사람들이 《모주석을 만나고 와서 잘 말해달라》던 부탁이 다시 귀에 쟁쟁하였다.

모주석은 주석단성원들과 일일이 악수하였는데 어떻게 줄을 서다나니 리옥금이한테 가장 먼저와서 악수하게 되였다고 한다. 《영광입니다. 동북으로부터 소수민족대표가 온것은 전국녀성들의 영광이며 우리의 승리입니다. 정말로 영광스럽습니다.》라며 모주석은 리옥금의 손을 뜨겁게 잡고 어깨도 다독였다.

리옥금의 통역원이 모주석에게 그녀의 군렬사가정에 대하여 소개하자 모주석은 《남편의 뒤를 이어 혁명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하며 다시 한번 리옥금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고 한다.

행운스러운것은 대회기간 그녀는 모주석을 거듭 만날수 있었던것. 주석단에 모주석, 주은래, 주덕 등 지도자들이 모셔졌는가하면 회의기간 모주석은 전국 각지서 온 일곱 녀성대표들과 좌담하였는데 그 때 바로 리옥금의 앞걸상에 앉아 몇식솔인가, 로동력은 몇이고 학교는 다녔는가, 생활은 어떤가, 남편이 전선에서 희생된걸 어떻게 생각하는가며 물어와 리옥금이 대답올려 모주석께서 기뻐하시며 여러 대표들을 둘러보며 고무격려하였다.

대회가 끝나는 날 련환모임에 모주석, 주은래, 주덕 등 동지들이 참석하여 대표들에게 술을 부어 잔을 들고 다 함께 대회의 승리적페막을 축하했는데 리옥금은 그때 모주석이 앉은 상에 앉게 되였다. 리옥금은 그날 난생 처음 술이란걸 먹어보았는데 바로 모주석이 부어준 술이였다. 련환회서 리옥금은 《공산당이 없으면 새중국이 없네》라는 노래를 한어로 불러 빨리 배웠다는 모주석의 치하를 받았다. 조선족은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며 주은래동지가 춤을 추라고 하여 통역원의 《도라지타령》에 리옥금은 모주석과 주은래, 주덕, 등영초 등 동지들의 박수고무를 받으며 춤도 추었다.

《우리의 승리는 만리장정의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간고한 투쟁은 아직 앞에 있습니다. 더욱 큰 승리를 따내기 위하여 동무들은 이런 저런 곤난을 극복하면서 혁명을 끝까지 하여야 하겠습니다.》

《녀성들이 일떠나는 날이라야 중국혁명이 승리하는 날입니다. 》

모주석이 자신에게, 대표들에게 한 마디마디를 가슴깊이 아로새기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더 한층 분발노력하였다.

호조조를 더 잘 꾸리고 발전시켜 초급농업사를 세웠으며 농업사주임직을 떠메고 생산을 발전시켜 전선을 지원하고 건설에 이바지 하였다. 1949년 12월에 그녀는 중국녀성대표로 북경에서 열린 아세아부녀대표대회에 참석하는 영광을 지녔고 1951년, 1953년 련속 길림성1등로력모범으로 당선되였다.

《리옥금때문에 우리는 너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일심정력 혁명과 건설에 몰두하는 며느리를 보면서 시부모 된 마음은 아프기만 하였다. 전선에 나간 아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며느리가 청춘을 홀로 보내게 할수 없었다. 시보무들은 시당위 조직부에 리옥금을 재혼시켜줄것을 거듭 제기하였다.

1953년 3월 당위의 지지밑에 이름난 전국로력모범 김시룡의 중매로 항일전쟁에서 부상한 영예군이고 바로 김시룡과 한 마을(동성향 영성촌 2대)에 살고있는 조덕호와 재혼하여 그 마을로 왔다.

김시룡과 한 생산대여서 간부를 분산시킨다는 개념에서 리옥금네는 얼마후 영성4대로 옮겼다. 그녀는 시집와서도 선줄군이였다. 선후하여 그 촌에서 촌 당지부 조직위원, 부서기, 촌 부련회주임, 생산대장 할것없이 뭐든 맡기는대로 출중하게 해내였다. 드디여 그녀는 그촌에서 1962년 3월 전국 첫패로 되는 《3.8붉은기수》로 당선되였고 문화대혁명 10년 동란후인 1978년 3월, 58세의 나이로 연변녀성대표로 제4차 전국부녀대표대회 대표에 당선되였고 이듬해엔 재차 전국 《3.8붉은기수》칭호를 수여받았다.

바로 리옥금의 영향과 양성으로 영성촌에선 1995년 5월 두번째 전국 《3.8붉은기수》를 배출했는데 그가 바로 촌부녀회주임, 당지부 조직위원인 남영숙이였다. 리옥금할머니는 지금도 당년 자기를 따라 목숨까지 걸고 일한 남영숙, 최보금 등 녀성들을 그리워하고있다. 당시 영성4대서 련속 몇년간 풍작을 거두어 소문이 높았댔는데 그것은 리옥금이 부녀들을 데리고 50가마의 비료를 가공부식해내 시비량을 대폭 늘린 덕이 아닐수 없었다. 탈곡이 끝난 동지섣달일지라도 거름만들기에 궐기해나선 리옥금이 인솔한 부녀들은 가축거름, 인분 할것없이 거두어들여 온돌에 불 때서 가공, 부식시키는 방법을 채용했는데 구들돌을 캐오는 일이며 온돌을 놓고 불 때는 일이며 전부 녀성들이 감당했다. 봄에 소수레로 거름을 실어낼 때 남성들이 하루에 13차 하면 그녀들은 25차씩 실어냈다. 문화대혁명후 영성촌의 첫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는 리옥금이 울렸는데 특히 모내기때면 새벽 2시에 일어나 종을 치고는 집집을 다니며 밥을 짓게 녀성들을 깨우기까지 하였다.오늘날 영성사람들이든 동성사람들이든 할것없이 리옥금 하면 《리옥금때문에 일을 참 많이 했다》란 말을 꼭 한다.

동란의 박해속에서도 떳떳한 녀호걸

영성촌에서 일하기 싫은 망나니들은 김시룡, 리옥금한테 억울한 죄명을 덮어씌워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로 비판투쟁하였다. 그때면 리옥금은 《인민군중을 사회주의 길로 이끌어가는 선줄이다》고 드팀없이 대답하였으며 《내가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라면 모주석이 장알이 박힌 내 손을 보고 순전한 농민의 손이라 했겠냐?》며 대항했다.

옥금이가 8살에 지주집에서 우마같은 생활을 하면서 죽을번하다 14살에야 지주집에서 뛰쳐나온 사실을 12곳이나 다니며 증명한 증명서류를 원 시어머니가 제출해주고 발전촌의 촌민들이 우리네 로동모범이 왜 자본가요, 집권파로 되였느냐며 들고일어났으며 영성촌의 량심촌민들도 날이 갈수록 많이 보호해 나서 끝내 2년반만에 리옥금은 죄명에서 《해방》받았다. 그 때 비판투쟁을 받을 때 리옥금은 두 다리를 바로 쓰지 못하면서, 지어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까지 되였었지만 그녀는 끝끝내 시련을 이겨내였다.



손자손녀들의 사랑속에 포위된 리옥금할머니, 거의 매일 손자손녀들의 문안전화를 받는단다.

도시생활에서도 당년의 녀걸본색

1984년 64세에 남편과 함께 룡정시내로 올라와 도시생활을 하기 시작한 리옥금할머니는 농업로동에서 손을 뗐으나 80여세대가 사는 가두 소조 조장직을 16년 맡아하면서 주민들이나 구역의 크고 작은 일의 해결사로, 도우미로 나서주었으며 자기보다 남을 생각하는 대공무사의 영웅본색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골물이 터졌을 때 자기집 담장을 무너뜨려 몇천원의 손실을 보더라도 골물이 자기집 마당으로 흘러가게 한 일, 줄집에 불이 붙었을 때 세번, 네번 불속으로 뛰여들어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구해준 일…주민들도 《정말 속부터 겉까지 빨간 녀인》, 《당년의 녀걸 답다》고 고개숙인다.

지금도 한달에 네번되는 가두 지부활동이나 로인회 독보활동 등 조직활동에 빠지지 않고 꼭꼭 참가하고있다고 한다.

리옥금할머니도 남부럽지 않게 아들 딸 다섯(큰 딸 사고로 잃음)을 두었지만 여느집과 마찬가지로 자손들이 사업수요, 돈벌이, 학습때문에 멀리, 혹은 외국에 나가 있다나니 막무가내인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리옥금할머니는 《나가서 하나라도 더 벌어서 자식들 공부 원없이 시켜라고 내가 등 떠밀어 보낸거요.》라고 하면서 며느리들을 칭찬하는것을 잊지 않는다. 《엄마로 말하자면 나는 자식들한테 미안한 엄마요, 자식들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했고 장가들어도 살림밑천 하나 보태주지 못한 엄마요. 늙어서 내가 오히려 짐이 되여 미안한데 나때문에 남처럼 벌러 가지도 못한다면 내가 얼마나 더 속이 타겠소? 난 아직 거뜬하니 내 걱정을랑 하지 말고 가라고 했지, 며느리들이 사흘이 멀다하게 전화오는데 하는말이 부디 건강하게 좀만 기다려 달라는 부탁이요 소비돈은 늘상 푼푼히 쥐여주고…내가 원망스럽지도 않냐 하면 어머니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후방건설에서도 승리할수 있었지 않았습니까고 하던 며느리들 말이 고맙지요.》라고 하는 리옥금 할머니다.

편집/기자: [ 김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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