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들은 지금 젊은 시절에 바라마지 않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는 일흔을 넘긴 조선족 어르신 길병호와 그의 마누라 최제숙이 흡족해 하는 말이다. 그들이 앉아있는 객실 쏘파 뒤벽에는 ‘가화만사흥’이란 글자가 새겨져있는 십자수 그림이 걸려있다.
1945년생인 길병호는 5살 때 부모를 따라 길림에서 흑룡강 가목사 화천현 성화향으로 이사해왔다. 이곳은 전 현에서 유일한 조선족 집거지이다. 갓 성화향에 왔을 때는 주위가 온통 황무지였다. 당시 길병호 일가를 비롯한 35가구는 나무로 틀을 잡고 세운 큰 천막에서 비집고 지냈는데 집집마다의 사이에는 널판자로 칸막이를 했을 뿐이였다. 모내기철에는 전부 맨발바람이고 장화 한컬레 없었다.
새 중국 첫 집체농장인 ‘성화집체농장’이 전세기 50년대에 여기서 탄생했다. 당지 주민들은 집체 벼농사로 살림을 일구었다.
성화집체농장이 번창함에 따라 촌에서는 집체로 토벽돌집들을 줄줄이 지었다. 또 남들은 여전히 석유등을 쓰고 있을 때 성화촌에는 이미 전기가 들어와 “집집마다 나팔을 달고 대대의 유선방송을 들었다.”
농장의 이야기는 후에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였는데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란 길병호는 앞으로 커서 농장 생산대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였다.
개혁개방 후 살림이 나날이 윤택해지면서 길병호 일가는 단층집에서 일약 층집에 들었다. 이들 부부는 오늘날의 편리한 나들이를 떠올리며 세월이 참 많이 변했다고 감탄한다. 이들은 두 아들이 모두 상해에 있는데 전에는 상해에 한번 다녀오려면 보통렬차로 이리저리 바꿔타며 몇십시간을 고생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목사에서 뜨는 비행기편으로 고작 몇시간이면 상해에 도착, 당날로 천리 밖의 자녀들과 만날 수 있다.
무릎아래 한구들 가득한 자손들과 함께 초요를 바라고 달리는 길병호가 바라는 삶은 아주 순수하다. 병이 없고 아픈 데가 없고 나가 움직일 수 있으면 만족이다. 낚시가 취미인 그는 마누라와 함께 남새밭 가꾸기에도 살손 붙인다. 자그마한 터전에서는 고추, 가지, 감자··· 무려 열다섯가지 남새가 한창 기를 쓰며 푸르싱싱 자라고 있다.
/래원 중국청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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