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지난 세기 70년대 초중반, 선양시는 북부와 서부의 황무지와 한전을 수전으로 개간한다는 시책하에 동북3성에서 대량의 조선족 농호들을 모집함으로써 신성자구(현 심북신구)와 우홍구에 20-30개에 달하는 조선족촌들이 새로 생겨났다. 선양시 우홍구 광휘가두 선풍촌도 그때 생겨난 마을, 1976년 성내 철령, 무순, 신빈 등지에서 모여온 82세대 조선족농호들이 린근의 한족촌에서 세방살이를 하며 버려졌던 840무의 황무지를 옥답으로 개간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선풍촌에도 도시진출, 해외진출붐이 일어 근년에는 상주인구가 30명미만(총인구 256명)밖에 되지 않았다. 촌민들이 마음대로 주택을 처분하고 경작지를 타민족에게 양도하게 한다면 선풍촌도 기타 많은 조선족촌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촌이란 허울밖에 남지 않게 되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김일선촌당지부서기(52세)의 고민이 깊어졌다.“피땀흘려 이룩해낸 마을을 망하게 할수는 없다. 꼭 지켜내야 한다.” 그는 스스로 마을지킴이로 자원해 사명으로 간주하였다.
“경작지는 반드시 본촌 촌민들에게 양도하고 주택은 타민족들에게 팔지 못한다.” 선풍촌의 이 규정은 오늘날까지 충실히 집행돼 빈집들이 고스란히 주인들을 기다리고있다. 김일선서기는 앞장서 촌민들이 내놓은 경작지를 도급해 규모화영농의 길을 걸었는데 경작면적이 520무에 달한다. 실농군인 방철기씨(58세) 역시 촌민들이 내놓은 경작지 140무를 도급경영, 나머지 토지는 기타 3호의 농호에서 맡아 경영해 본촌 토지가 한무도 류실되지 않았다.
근년래 정부의 혜농정책덕택으로 농업세가 전격 면제되고 농기계구입시 60%를 보조받으며 또 무당 90원의 농사보조비까지 받을수 있어 농사짓기도 수지가 맞는단다. 김일선서기는 연 농사순수입이 40여만원에 달하고 방철기씨도 해마다 10여만원에 달하는 순소득을 올린단다. 한때 주변친구들이 너도나도 한국으로 떠나는바람에 방철기씨도 마음이 동한적이 있지만 한국에 간 친구들과 소득을 따져본 후에는 한국행을 접었단다. “한국에 간 친구들이 일년사시절 노가다판을 전전하는데 비해 저는 1년에 로동일이 불과 2개월도 안돼요. 실제수입은 그들보다 절대 낮지가 않고요…” 방철기씨의 자랑이다.
전 촌 60% 토지를 도급경영하는 한편 김일선서기는 마을건설에 무척 심혈을 기울여왔다. 수년전 시민위와 구재정에서 10여만원의 보조금을 쟁취해 마을의 배수로를 수건하였으며 3년전에 또 상급에서 보조금을 쟁취해 마을길에 32개의 가로등을 설치하고 마을안 구석구석에 14개의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였다. 감시카메라덕에 선풍촌에는 도적이 나타나지 않아 대부분이 로약자들인 촌민들은 발편잠을 잘수 있단다.
마을에 김일선서기와 방철기씨가 기둥처럼 벋치고있기에 촌민들은 기댈 의지가 있다. 지력장애자인 김규선씨는 두 사람의 도음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데 지난해 김일선서기는 상급에서 내려온 보조금 2만원으로 김규선씨에게 살림집을 지어주었으며 자가용이 있는 방철기씨는 촌민들의 “의무기사”로 되여 경상적으로 촌민들을 위해 봉사하고있다. /요녕조선문보
/요녕조선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