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장사의 외길을 걷다
오늘도 변함없이 김치장사에 나선 김정희아줌마
《김치 사세요.》
매양 아침 여섯시에 매하구 아침시장에 가면 한 조선족녀인의 정다운 사구려소리가 새벽바람을 타고 귀맛좋게 들려온다. 그가 바로 김정희(56세)아줌마이다. 그녀는 김치장사와 장장 25년이란 인연을 맺어왔다.
지난 세기 80년대초기부터 조선족들은 김치장사로 전국각지를 누비면서 부를 창조하여왔다. 그후 출국열이 고조되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김치장사를 접었다. 지금은 시장에서 김치장사를 하는 조선족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김정희아줌마는 매하구의 아침시장과 철북시장의 유일한 조선족이다.
일찍 80년대초에 결혼한 김정희아줌마는 남보다 더 잘살아보려는 목적으로 1990년에 란주시로 김치장사를 떠났다. 김정희부부는 란주시에서 몇년간 김치장사를 하여 목돈을 손에 쥐게 되였고 2001년에는 천진으로 자리를 옮겨 오징어구이장사도 해보았다.
2008년에 남편이 한국으로 가게 되자 그녀는 매하구에서 김치장사를 새로 시작하였다. 그녀의 김치는 색상이 곱고 시큼시큼하게 맛이 들어 단골손님들이 많다. 게다가 저울대가 부러지도록 김치를 푹푹 담아주어 다들 마음으로 장사를 하는 고마운 아줌마라고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그녀의 하루는 매일 새벽 세시부터 시작이다. 세시간동안 김치를 버무리고 6시에 시장에 내간다. 80여근 되는 갖가지 김치를 2층아빠트에서 시장까지 운반하고나면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다. 허나 장사가 잘되니 힘든줄 모르겠단다.
아침시장에서만 해도 매일 판매수입이 적어서 300원, 많을 때는 500원씩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철북시장에서 김치를 파는데 그 수입이 짭짤하다. 명절때면 하루의 수입이 1400원에 달한다. 김정희는 장사를 하여 고향인 동풍현 횡도하자에 살림집도 마련한적 있다.
한국에 가면 돈벌이가 잘된다는 말을 듣고 김정희는 지난해 7월에 한국으로 갔다. 허나 식당일에 석달을 지치고난 김정희는 그만 손을 들고말았다. 식당일이 김치장사보다 재미없고 고달프며 수입보다 지출이 엄청나 전혀 한국에 못 있겠더라는것이였다. 그보다도 중병으로 앓고있는 아들과 운신을 바로 못하는 친정어머니가 걱정이 되여 단연히 귀국하였다.
중병에 걸린 아들과 친정어머니를 위해
2005년의 어느날, 고향에 왔다가 다시 김치장사하러 천진으로 가던 도중 당시 19세에 나는 아들이 달리는 렬차안에서 뜻밖에 까무러쳤다. 진찰결과 적수성포진뇌막염이란 진단을 받게 되였다. 외지에서 수입제약을 비롯한 여러가지 좋다는 약을 다 썼지만 별로 효험을 보지 못했다. 병원측에서는 입원 3개월후에 아들의 병을 불치의 병으로 판단하고 집에 돌아가 후사를 준비하라고 통보했다.
청천벽력이였다. 김정희는 눈앞이 새카매지더니 그만 넋을 잃고말았다. 그러나 오직 사랑하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힘내야만 했다.
매하구에 돌아온 다음 김정희는 아들의 병시중을 들면서 또다시 김치장사를 시작하였다.
사랑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약이 되였던지 천진병원에서 사망진단을 받았던 아들의 병은 놀랍게도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옴짝달싹 운신도 못하던 아들이 팔다리를 펴기 시작하였다. 기적이였다. 생활도 자립할수 있게 되였다. 뇌막염으로 인해 생긴 간질병도 완전히 호전되였다. 건강을 회복한 아들을 바라보는 김정희아줌마의 눈에는 파아란 웃음이 피여올랐다. 뒤이어 두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김정희아줌마의 친정에는 5남매가 있지만 모두 한국에 가다나니 년로하고 두다리를 바로 운신못하는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그의 몫이였다. 친정어머니를 모신지 인젠 6년철에 잡아든다. 매일 친정어머니에게 세수를 시켜드리고 음식과 약을 대접하고 화장실출입을 도와야 한다.
가끔 김치장사로 뼈가 지긋지긋 쏴났지만 언제 한번 고달프단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얼굴에 하냥 웃음만을 지어보인 그녀였다.
김치장사는 김정희가정의 명줄이나 다름없다. 김치장사를 해 아들의 생명을 구했고 친정어머니에 대한 정성을 다하고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집/기자: [ 리창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