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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5]2군 4사 녀전사 오철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6.17일 09:20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ㅡ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15)

■리 함

1
오철순(吴哲顺, 1918-1940)은 연길현 왕우구사람으로서 1918년 생이다. 그의 아버지와 두 오빠가 일찍부터 혁명투쟁에 나선데서 철순은 어려서부터 그들의 영향을 심히 받았다. 1932년초부터 철순의 아버지가 놈들의 포위토벌에서 희생되고 이어 그의 두 오빠도 피어린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다나니 집에는 어머니와 철순이, 열두살밖에 안되는 녀동생밖에 남지 않았다.

1934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일제놈들은 왕우구근거지에 대한 제3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하루이틀도 아닌 4개월, 근거지의 전부 가옥이 타버리고 수백명 군중들이 원쑤놈들의 총칼아래 쓰러졌다. 근거지의 나머지 1000여명 군중들은 더 깊은 산속인 사방대로 들어가지 않을수 없었다. 철순이 일가 세식솔도 사방대로 향한 사람들속에 섞이였다.

사방대산속의 식량난은 극도에 이르렀다. 근거지정부에서 식량운반대를 조직하여 백구에 나가 군중선전교육을 앞세우면서 조그마나마 식량을 구해오긴 했으나 그것으로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캐서 우려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대로 유지하다간 모두가 결단날 판국이였다. 중공동만특위에서는 1934년 음력 11월에 군중해산지시를 내렸다. 중공연길현위에서는 1935년 음력설을 쇠고 특위의 지시를 군중들에게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사방대는 온통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누구나 하산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달가량 지나니 차츰 하나둘 사방대에서 떠나갔다. 하나 철순은 죽을지언정 혁명대오를 떠나고싶지 않았다. 1935년초에 그는 나머지 400여명 혁명군중들과 함께 어머니와 녀동생을 데리고 새로 창설된 안도현 처창즈근거지로 들어갔다.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에는 리도삼을 책임자로 하는 왕우구정부가 새로 조직되였다. 식량난은 보다 막심하였다. 련일가도 쌀 한알 구경할수 없었다. 때론 식량이 보이긴 해도 숟가락으로 헤여먹어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오철순은 굴하지 않았다. 혁명대오의 품에 안겨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으로 여긴 오철순이였다. 오직 아버지와 두 오빠의 원쑤를 갚고 이 세상 로고대중들의 원쑤를 갚으려는 일념밖에 없었다.

1935년 음력 10월, 처창즈근거지는 해산되고 부대는 내두산근거지를 거쳐 남만의 광활한 지역에로 진출하였다. 오철순은 어머니와 녀동생을 설복하여 적구에 내려보내고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처창즈삼림속에 남았다. 대부분은 어린애와 그들 어머니가 아니면 로인, 아동단원들이였다. 별수가 없었다. 조직에서는 그들을 3개 방향으로 분산시켰는데 김원철이 한개 패를 데리고 미혼진으로 가고 최춘산이 다른 한개 패를 데리고 소황구로 갔다. 나머지 패는 남창수가 데리고 오도양차로 들어갔다. 오철순 등 젊은 축들은 려영준을 대장으로 하는 반일자위대에 편입되여 대전자 서북골의 왕바버즈로 이동하였다.

오철순은 반일자위대의 작식대원으로 되였다. 투쟁은 간고해도 그는 삶의 보람을 느끼였다. 이 무렵에 그는 려영준과 사랑의 정을 맺게 되고 서로 고무하며 하나 또 하나의 난관을 헤치였다. 이해 1935년 철순이는 열여덟살 꽃피는 나이였다.



1991년 11월 14일,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ㅡ그제날 처창즈항일근거지에서

고 리철룡의 취재를 받는 항일로간부 려영준(자료사진).



1991년 11월 15일, 안도현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를 찾은 려영준(자료사진).

2
맵짠 겨울이 가고 새봄이 소리없이 깃을 폈다. 1936년 이해 봄에 처창즈반일자위대는 새로 항일련군으로 개편된 제2군 군부의 지시를 받고 남만으로 떠나갔다. 군부에서는 또 려영준한테 흩어진 군중들속에서 한개련을 무어가지고 밀영에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철순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본지에 남아 흩어진 동지들을 하나하나 찾았다. 며칠사이에 40여명으로 헤아리는 반일자위대가 또 조직되였다.

문제는 무기가 없는것이였다. 그래서 려영준 등은 무기구입에 나섰다. 때론 한자루의 총을 얻기 위해 사선을 헤치며 수백리길을 넘나들어야 하였다. 그럴 때면 오철순은 밀영에 남아 후군일에 살손을 붙이며 빈틈없이 일해나갔다.

무기가 해결된후 반일자위대는 소분대로 나뉘여 활동하였다. 오철순도 이 대오에 가담하여 명월구, 대전자 등지에 가서 적들의 전화선을 절단하지 않으면 교통을 파괴하였으며 자위단실에 불을 질렀다.

1937년 3월, 오철순 소속 반일자위대 일행 30여명은 10여일분의 식량과 탄알을 휴대하고 대전자의 왕바버즈를 떠나 남만으로의 원정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2군 군부가 활동하는 무송현인데 연도에 대사하, 소사하, 량강, 이도, 내두산을 거쳐야 하는 근 천리길이였다.

묘령을 지나면 태고연한 원시림이다. 벌써 며칠을 내처 행군하였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밀림을 헤치니 눈뿌리 아득한 《눈바다》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이 덧신을 해신고 겨우《눈바다》를 조이니 10여일분의 식량이 거덜이 났다. 며칠을 더 걸으니 대원 거개가 기력이 쇠잔하여 일어설수조차 없었다.

반일자위대는 숙영지를 정한후 움직일수 있는 사람 모두가 흩어져 눈을 헤치고 참취, 송곳나물, 느타리 등 마른 나물과 잣송이를 찾았다. 헌데 어스름이 깃을 펴도록 작식대원 오철순이 보이지 않았다. 사처로 찾아보아도 허사였다.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을가? 모두가 마음을 조이였다.

새날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전우들은 밤새 목이 쉬도록 찾아다니다가 눈우에 또렷히 찍힌 발자국을 찾아 따르기 시작하였다. 발자국은 우중충 반공중을 떠인 잣나무밑에서 동강이 났다. 흔적은 다시 아래켠으로 움직이다가 두세길되는 낭떠리지에서 가뭇 사라졌는데 낭떠러지가에 철순이가 갖고 떠난 자루가 눈우에 떨어져있었다. 사실은 불보듯 뻔했다. 낭떠러지아래에는 머리가 흩어진 한사람이 쓰러져있었다.

《철순이!》

려영준이 선참으로 부르며 마구 내려갔다. 동무들도 뒤를 물었다.

《철순이, 정신을 차리오!》

려영준이 철순이를 안아일으켰다. 철순이가 눈을 떠보니 전우들이 그를 빙 둘러쌌다.

《어떻게 찾아왔어요?》

철순이는 눈물이 글썽하여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알고보니 그는 손에서 떨어져 나간 잣송이를 주으려다가 봉변을 당했던것이다. 무등 애를 써도 벼랑을 치솟아오를수 없은 그였다.

3
드디여 철순이는 숙영지로 돌아왔다. 자기가 보살피던 두 부상병이 꼬박 굶은것을 보니 얼굴이 뜨거워났다. 그는 인차 자루안에서 잣송이를 꺼내 불에 구웠다. 막대기로 툭툭 치니 잣알이 떨어졌다. 그리곤 뽑아낸 속알을 짓찧어 통졸임통에 넣고 끓이였다. 한참후에 배낭에 소중히 간직했던 비상미를 꺼내 두 통졸임통에 한줌씩 넣었다.

《쌀! 쌀! 어디서 온 쌀이요?》

철순이에게서 걸직한 좁쌀미음을 받아쥔 두 부상병은 두손을 떨면서 물었다. 옆의 동무들도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왕바버즈밀영을 떠날 땐 식량을 똑같이 나누어가진 그들이였다. 허나 철순이는 녀성의 섬세함으로 만일을 고려하여 눈을 쥐여먹으면서 비상미를 아끼고 또 아껴왔으니 말이다.

오철순의 소행은 대원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이에 힘입은 동무들은 너도나도 일어나 우등불가에 둘러앉았다. 누군가 《유격대행진곡》을 선창하자 모두가 목소리를 합치였다. 기아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들은 다시 힘을 내였다.

반일자위대는 꼬박 한달반 푼하여 끝내 2군 군부를 찾아갔다. 2군 정치위원 겸 제1로군 부사령 위증민은 무송현 동강의 한 인삼장 널막에 있다가 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벌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철순 등 매 대원들의 손을 뜨거이 잡으며 말하였다.

《동무들이 걸어온 원정의 길은 동북항일투쟁사에 길이 남아있을것입니다!》

무송현 동강밀영에서 반일자위대는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교도퇀에 편입되였다. 오철순은 항일련군의 어엿한 녀전사로 되여 동지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도중 그들은 명령을 받고 서남차북쪽 가라거우고개 매복전에 참가하였다. 이 매복전에서 교도퇀은 왜놈과 위만군을 박아실은 군용자동차 한대를 습격하여 적 10여명을 격사, 20여명을 생포하고 숱한 무기와 량식 등을 로획하였다. 그후 오철순은 또 부대를 따라 림강현 묘령부근의 밀림속에 이동하였다가 당지의 위만군병영습격전에 참가하여 솜씨를 보이였다.

묘령전투후 오철순 등은 제2군 4사에 편입되여 활동하였다. 1938년 겨울에는 화전현 대금장 남골밀영으로 들어갔다.



항일련군 제1로군 조선족녀전사들(자료사진).

4
이해 섣달 스무사흗날 밤(양력 1939년 1월 24일)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 부총사령 겸 정치위원 위증민이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이 밀영에 들어섰다. 양정우총사령이 오철순 등 4사 전사들과 친절히 악수할 때 철순이는 격동된 심정을 금치 못하였다. 전설속의 위인인 양정우장군을 처음 뵙게 되였기때문이였다.

이윽고 부대 전체가 끼리끼리 삶은 강냉이식사를 하고 있는데 로금장에 주둔한 일제수비대와 위만군이 곧 달려든다는 적정보고가 전해졌다. 1000여명 항일련군은 양사령의 전투명령에 따라 신속히 남산고지에 올랐는데 골짜기가 미여지게 쓸어들던 놈들은 숱한 주검을 남기고 패주하였다.

때는 어둠이 가실무렵이였다. 이날밤 대부대는 외발자국을 내면서 두도, 류하쪽으로 전이하였다. 그다음날 다시 쳐들어오던 1500여명 적들은 양사령의 유인술에 걸려 송화강쪽으로 가버렸다. 부대는 시름놓고 두도, 류하부근의 밀영에서 설맞이차비에 서둘렀다.

설날아침 양사령과 위부사령이 각 련을 순회하며 설날인사를 하였다. 설날이라 강냉이가루떡에 소고기(소 한마리 잡았음) 넣은 콩장을 먹으니 그 기분이 별스레 좋았다.

낮에는 병사대회―양사령과 위부사령이 선후로 무대에 올라 연설하고 저녁에는 무대아래에 우등불을 피우고 흥겨운 오락회를 가지였다. 오철순이 허성숙, 허순선, 황희순, 김철호 등 조선족전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 양사령은 련속 박수를 치면서 조선족녀성들은 싸움도 잘하고 춤도 잘춘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철순 등이 자체로 창작한,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던 녀성들이 손에 총을 잡고 일제와의 항쟁에 나선 주제의 무용은 이날밤 오락회를 고조에로 이끌었다.

오철순 소속부대는 두도, 류하부근 밀영에서 한달나마 머무르면서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에 참가하였다. 이해 (1939년)3월 11일에는 양정우사령의 지휘하에 화전현 목기하목재판습격전투와 돈화현 따푸차이허진공전투에 참가하였다.

1939년 봄, 양정우사령이 이끄는 부대는 남만으로 다시 진출하고 4사는 위증민부사령의 지휘하에 동만에 진출하여 기동령활한 유격전을 벌리였다. 오철순은 4사를 따라 돈화현과 안도현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따푸차이허부근전투와 위탕골서북골전투, 한총령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이해 여름의 어느날, 위증민부사령이 직접 지휘하는 4사는 마쯔시마 일본소장이 거느리는 일본군, 위만군 토벌대가 돈화현성에서 떠나 따푸차이허로 향한 다음 정보를 입수하였다. 정찰병들이 적의 전화선에다 수화기선을 이어놓고 도청하였던것이다. 위부사령은 적정을 분석한 뒤 이 한무리 적들을 일망타진하기로 결의하고 부대를 날밝기전에 지정된 위치에 대기하도록 명령하였다. 오철순은 려영준 그리고 4사의 주력부대 100여명과 함께 한총령 남쪽아래 길동쪽 산기슭에 매복하였다.



광복을 맞은 항일련군 조선족녀전사들. 왼쪽으로부터 김철호, 리영숙, 김정숙, 황순희(자료사진).

5
1991년 11월, 필자는 친구 리철룡, 리성비와 함께 항일로간부 려영준을 모시고 찦차로 돈화현, 안도현일대의 전적지를 답사한적이 있다. 돈화현 한총령전투지점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때 따푸차이허진 출신이고 따푸차이허진에서 생활하는 중국인 로인 사진(沙津,66살)이 동행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년의 한총령전투지점자리는 그제날 고해루점 (高海樓店)자리이기도 한데 고해루라고 하는 한 중국인이 여기에다 려관삼아 음식점삼아 고해루점을 꾸리고 오가는 차량과 길손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우리가 전투지점에 이르러 보니 전투지점 왼쪽켠, 즉 동쪽은 완만한 산이고 산아래 골짜기에는 시내물이 흐르고있었다. 산과 시내물사이는 조금 트인 개활지였다면 전투지점 도로표식은 719킬로메터를 가리키고있었다. 사진로인은 우리에게 이 길은 흑룡강성에서 시작되여 이도백하까지 곧추 뻗은 국방도로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또 따푸차이허진에서 이곳까지는 22화리(華里), 즉 11킬로메터이고 이곳에서 북쪽의 한총령 영마루까지는 8화리, 즉 4킬로메터이며 북으로 령넘으면 마오점(馬五店), 이합점(二合店), 한총구(寒蔥沟), 마호(馬號)가 돈화쪽으로 차례로 이어진다고 덧붙혔다.

재미있는것은 두 로인의 말씀이였다. 사로인은 한총령전투에서 거꾸러진 적들은 돈화에서 따푸차이허로 와서 원 주둔병들을 대체하는, 다시 말하면 환방(換房)하는 놈들이라고 했는데 려영준로인은 돈화서 따푸차이허로 오는 토벌대놈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려영준은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당년의 전투경과를 자상히 들려주었다.

그날 적토벌대는 마쯔시마 일본소좌가 거느린 부대였다. 점심때쯤 한총령 령쪽에서 적의 군용트럭소리가 들리였다. 이윽고 일본군, 위만군을 꽉 박아 실은 세대의 군용트럭이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려왔는데 위부사령은 앞에 선 트럭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두번째, 세번째 트럭이 시름놓고 매복권내에 들어섰을 때 위부사령은 사격명령을 내리였다. 아군의 기관총과 보총 등이 일제히 불을 뿜자 적진은 대번에 수라장이 되였다. 일본소좌는 트럭우에서 망원경을 들고 허우적하다가 기관총사격에 황천객이 되였다. 적들은 별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아군의 집중사격에 녹아났다. 오철순도 4사의 녀전사들과 함께 연해연방 총을 쏘아댔다.

전투는 불과 반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오철순은 부대전사들과 더불어 산아래로 짓쳐내려가 싸움터를 수습하기 시작했는데 적들은 트럭우에 철궤(탄알상자)를 펴고 앉았다가 몰살당했었다. 이날 아군은 적 군용트럭 두대를 짓부시고 소좌 등 수십 명을 전멸하였는데 로획품은 중기관총 1정과 보총 수십자루, 탄알 수십 상자 등이였다. 그날 오철순은 전우들과 같이 적의 철갑모를 벗어 썼는데 참 멋지였다. 려영준도 뻐드러진 한놈의 철갑모를 벗기니 철갑모 안에는 대골이 가득 찬대로였다. 그래서 시내물에 씻어서 썼다.

싸움터를 수습하면서 보니 적들은 저저마다 누런 군복에 다리에 각반을 치고 가죽신을 신고 소가죽으로 만든 베도재(가방)를 메였다. 베도재마다에는 보리쌀과 입쌀이 조금 들어있고 과자 한봉지, 소고기 통졸임 하나씩 있은 외 벤또(밥곽), 물통도 하나씩 들어있었다. 이 모든것은 그대로 아군의 전리품으로 되였다.

오철순의 얼굴엔 기쁨의 희열이 함뿍 어리였다. 그후 몇달사이 오철순은 승리의 기세로 부대를 따라 천보산전투 등 수십차의 크고 작은 전투에 용감히 뛰여들었다. 려영준 항일로간부가 한총령전적지에서 들려준 오철순의 전투행로였다.

6
1939년 6월 하순의 천보산전투가 있은후 4사는 안도현 황구령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안도현 한요구로 이동하였다. 한요구는 돈화현 한양구부근에 있는 산간지대로서 왕청일대에 진출했던 5사도 명령을 받고 뒤미처 한요구에 이르러 4사와 회사하였다. 2개 사의 병력은 500여명(어떤 자료는 300여명으로 되였는데 이 수자는 려영준의 말씀이다.)에 불과했으나 전투력은 대단하였다.

이해 7월에 4사와 5사는 위증민의 사회하에 안도현 한요구에서 정식으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개편되였다. 이 개편은 1938년 8월의 집안현로령회의 결의에 따른것으로서 진한장, 후국충, 조선족 박득범이 각기 지휘, 부지휘, 참모장을 맡았다. 방면군산하에 13, 14, 15퇀을 두었는데 오철순이 녀전사들과 함께 원 4사 밀영의 재봉대원으로 되고 려영준이 방면군사령부직속 경위련에 소속되여 위증민부사령과 진한장지휘를 이어주는 원거리 통신련락에 나섰다.

오철순은 새로 개편된 제3방면군과 함께 한요구에 한달동안 머무르면서 정치,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8월하순에는 부대를 따라 안도현 대사하습격전투(8월 23일)에 참가하였다.

1939년 하반년부터 동북항일무장투쟁은 극히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 일제침략자들은 수십만 관동군정예부대와 위만군, 헌병, 특설부대, 삼림경찰대, 지방경찰대, 무장자위단을 총동원했는데 남만과 동만의 산간지대 어디라없이 적들이 쫙 깔리였다. 적들은 항일련군에 대한 전면적인 대토벌에 광분했다. 한데서 오철순소속 제3방면군은 1939년 이해 가을과 겨울에 주로 소부대로 나뉘여 활동하게 되였다. 13퇀은 안도, 왕청, 연길, 동녕일대에서, 14퇀은 액목일대에서, 15퇀은 돈화, 왕청일대에서 활동할 때 오철순은 재봉대를 따라 돈화현 따푸차이허 서쪽의 4사 밀영에 들어갔다.

4사 밀영을 한양구밀영이라고도 한다. 이 밀영은 태고연한 산속 밀림지대에 자리잡은데서 쉽사리 발견할수가 없었다. 인가와 동떨어진 밀영이여서 간혹가다 부대의 통신병들이나 거치여 갈뿐 동지들의 얼굴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1940년초의 어느날 항일련군 제3방면군 제13퇀의 조선족전사 박춘일은 소속부대를 따라 안도현과 연길현일대에서 활동할 때 연길현 석인구에서 중국인 조수림과 함께 퇀부의 련락임무를 맡고 오철순 등이 자리잡은 한양구밀영을 찾게 되였다. 부대의 품을 떠난지 몇달이 잘되는 오철순과 그의 전우들은 박춘일과 조수림을 대하게 되자 기뻐 어쩔줄을 몰랐다. 헌데 그번 만남이 뜻밖의 재난을 가져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다.

7
이튿날 아침, 박춘일과 중국인전사는 밀영을 떠났다가 한양구어귀에서 적토벌대와 교전하고있는 부대를 만났다. 부대는 적들과 싸우다가 놈들을 따돌렸으나 적들은 한양구 밀영의 종적을 알아내고 급습을 들이댔다.

려영준의 회상에 따르면 따푸차이허에서 멀지 않은 지음구골 막바지는 당년 화전과 몽강(지금의 정우현.)으로 넘나드는 유일한 코스였는데 지음구고개너머에 4사 밀영이 있었다. 당년 남만에서 활동하는 위증민부총사령을 찾아 남만으로 통신련락을 다닐 때면 늘 4사 밀영에 들리여 식량을 보충 받았다고 한다. 더구나 4사 밀영에는 사랑하는 오철순이 있어 더구나 가고픈 심정이였다. 그때마다 오철순은 자기한테 차려진 식량을 갈라서는 보태주군 하였다.

1991년 11월 중순, 답사길에 찦차가 돈화와 안도의 경계를 이루는 동청령에서 고장난데서 동청령에서 북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돈화현 따푸차이허진에 가서 2~3일 머물러야 했다. 이 기간 첫눈이 푸실푸실 내리였다. 하루는 필자가 려영준로인을 보고 그제날 4사 밀영자리가 어딘가고 묻자 그는 우중충한 산들로 둘러싸인 서쪽골을 가리키면서 저쪽이라고 말하였다. 지음구골은 바로 그곳이였는데 첫눈이 푸짐히 내린데서 직접 답사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려영준은 이윽토록 그쪽을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톺는것이였다. 어느덧 그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있었다. 불현듯 짚히는바가 있어 오철순녀사가 희생된 곳이 아니냐고 묻자 머리를 끄떡이는것이였다.

알고보니 너무도 비참한 살풍경이였다. 1940년 춘삼월에 려영준은 제3방면군지휘 진한장의 친필서한을 갖고 1련 전사 김창룡과 같이 돈화현의 사하진에서 남만의 몽강현 금북골에 계시는 위증민부사령을 찾아 떠났다. 도중에 그들 둘은 따푸차이허를 지나 지음구골에 들어섰는데 춘삼월의 깊은 계곡에는 한 겨울의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어디라없이 일만군토벌대들이 욱실거리였다. 토벌대놈들을 이리저리 피해 지음구골 막바지를 넘어 그쪽의 깊은 계곡에 떨어지니 그 아래 좁은 골짜기에 4사 밀영이 있었다. 그런데 응당 보여야 할 밀영의 귀틀집은 오간데 없고 불에 타버린 자리만이 그들을 쓸쓸히 맞아주었다. 적들의 토벌을 맞은것이 분명하였다.

《?》

려영준은 가슴이 무너져내리는것만 같았다. 귀틀집자리 여기저기는 동지들의 주검인데 마당에는 머리칼이 흩어진 두 녀인의 주검이 누워있었다. 려영준이 급기야 두 주검한테로 달아가니 그중 하나가 오철순의 시체였다. 실신할 지경인 려영준이 철순의 시체를 흔들며 마구 불렀지만 오철순은 대답이 없었다…

오철순은 이렇게 불귀의 나라로 갔다. 불맞은 귀틀집의 형체로 보아 려영준과 김창룡이 밀영에 대이기 얼마전이였다. 철순이는 가슴과 복부에 총창이 찔리였는데 그의 한손에는 쌀을 넣은 미대가 꽉 쥐여져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도 미대를 버릴 수가 없은 모양이였다. 미대는 온통 피투성이고 터진 한쪽 끝에는 피묻은 쌀알이 력연했다.

려영준 항일로간부가 들려준 오철순과 오철순의 장렬한 최후였다. 이해(1991년) 려영준은 76살의 고령이였지만 피로를 무릎쓰고 우리와 함께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전적지를 답사하였다.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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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 '김호중'이 최근 교통사고를 내고 달아낸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그의 소속사 대표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매니저에 김호중을 대신해 경찰에 출석하라고 지시한 이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김호중은 지난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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