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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9] 길동성위 비서처 녀전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17일 08:30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ㅡ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19)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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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녀전사에 대해 알려지는 직접적인 자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선족이고 조선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고 중공길동성위 비서처(中共吉东省委秘书处) 에서 사업하였다, 1939년 2월 요신일(姚新一) 등과 함께 련화포강(莲花泡江) 서쪽에서 일제놈들과 격전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가 전부이다. 이밖에 신상을 알리는 자료는 아직 전혀 보이지 않으나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비서일군인데서 녀전사의 발자취를 추적할 기회는 남겨지고있다.

원래 동북땅에는 중공만주성위가 활동하고있었다. 1933년 초 상해의 당중앙이 중앙혁명근거지로 전이한후 만주성위는 상해중앙국과 중공대표단의 이중지도를 받게 되였다. 후에는 중공대표단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그때 중공대표단은 로씨야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海参崴)에 자리잡은데서 서로의 련락이 상대적으로 편리한 편이였다. 1935년 가을 중공대표단에서는 만주성위를 철소하기로 결정하고 동북경내의 4대 유격구를 중심으로 4개 성위와 2개 특위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1936년 1월에 중공만주성위는 정식으로 철소되였다. 그후 흑룡강경내에는 선후로 중공할빈특위(哈尔滨特委)와 북만, 길동(吉东) 2개 성위가 조직되였다. 이해 7월에 중공대표단은 원래의 길동특위를 취소하고 중동로(中东路)를 계선으로 도북특위(道北特委)와 도남(道南) 2개 특위를 새로 설립하였다. 이에 앞선 3월에 호림지구의 요하중심현위(虎饶地区饶河中心县委)를 토대로 하강특위(下江特委)를 조직하니 길동지구에는 3개 특위가 활동하면서 중공대표단의 지도를 받았다. 그 시절 박정희가 어느 소속에서 무얼 했는지는 알려지는 자료가 전무한 상태다.

1937년 3월 14일, 방정현의 사도하자(方正县四道河子) 5군밀영에서 주보중의 지도하에 당의 확대회의가 열리면서 도북특위를 토대로 중공길동성위가 조직되였다. 도남특위와 벌리ㅡ목릉ㅡ밀산 3개 현위(勃利、穆棱、密山3个县委)와 항일련군 4군과 5군 당위, 8군 당총지가 길동성위의 지도를 받았다. 1938년 이후에는 하강특위와 항일련군 제7군당위도 길동성위의 지도를 받게 되였다.

중공길동성위는 조직되면서 성위 비서처를 두었다. 박정희가 어디에서, 언제 성위 비서처로 전근하였지는 알수 없지만 1937년 8월에 성위 비서처가 5군 군부를 따라 의란현(依兰县) 경내의 깊은 산속밀영에 자리잡고있을 때 이미 박정희가 등장하고있다. 그때 성위 비서처는 도합 12명으로서 김석봉(金石峰), 전창철(全昌哲), 김동식(金东植), 김영남(金永南), 박정희 등이 조선족이였다.

그때 성위 비서처에는 후일 주보중장군의 부인이고 5군 부녀퇀 제2대(대대라고도 한다) 지도원인 왕일지(王一知)가 활약하고있었다. 성위 비서처 인원이 모두 12명이고 비서처의 이모저모를 글로 알린 사람도 왕일지였다. 왕일지는 《중공길동성위 비서처에서의 나날》(在中共吉东省委秘书处工作的日子)이란 한편의 회고문(동북항일련군사료편찬조 편찬. 중국공산당력사자료총서ㅡ동북항일련군사료 하, 중공당사자료출판사, 1987년 12월)에서 박××는 사업일군으로서 비서처의 화식을 맡고있었다고 밝히였다. 왕일지는 박정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있었다. 길동성위비서처 관련 여러 연구자료들에서는 박정희를 비서처 비서라고 밝히였다.

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은 조선족 김석봉이였다. 김석봉은 비서처에서 책임지고 발간하는 신문의 조선문 총편집이기도 하였다. 비서처에는 또 중공남만성위와 북만림시성위, 지방당조직을 련락하는 4명의 교통원이 있었다. 비서처는 또 항일련군부대의 사단급간부 부상병들을 접수치료하는 책임도 짊어져야 했으므로 류씨라는 의사 1명을 더 두게 되였다.



길동성위 비서처 회고문을 쓴 왕일지와 남편 주보중.

주보중은 항일련군 제5군 군장이고, 제2로군 총지휘이며 성위비서처를 직접 이끈 중공길동성위 서기였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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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성위 비서처의 주요한 과업은 《구국주보》(救国周报)와 당내간행물 《전초》(前哨)를 출판하고 식자교과서(识字课本), 정치상식교과서, 자체로 편집하는 혁명가곡, 삐라,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告父老同胞书), 위만군사병들에게 고하는 글(告伪满士兵书), 일본군관병들에게 고하는 글(告日本官兵书)을 만들고 찍어내는 등등으로 헤아려진다. 이런 신문간행물과 교과서 등은 모두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 등으로 등사하는데 한장의 등사용지로 1200부를 찍어낼수 있었다.

성위 비서처의 일군들은 기사나 글들을 쓰고 등사용지에 옮겨놓고 교정을 보는것이 주요한 사업으로 나선다. 이밖에 전체 일군들은 신문지절단, 인쇄, 장정, 부수나누기, 포장 등 다면수로 나서야 했다. 명절 신문과 간행물의 겉표지는 또 세가지 색으로 등사하여야 했기에 숙련된 전문기술을 수요로하였다. 이런 일련의 신문간행물 꾸리기는 늘 밤을 새면서까지 해내야 하기에 아침시간대에 보면 서로의 얼굴은 잠기가 어린 얼굴이 아니면 검은 등사기름이 여기저기 찍이여 서로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려야 하였다.

왕일지가 전하는 길동성위 비서처의 진실한 사업실정이다. 이같은 사업실정으로 보면 성위 비서처는 전문지식이 따라야하기에 적어도 중학교출신이상 아니면 나설수 없는 항일련군의 주요기관으로 알려진다. 그러면 박정희가 항일련군 부대의 지식형 녀전사임은 틀림이 없는것 같다.

해마다 7ㅡ8월간이면 길동성위비서처의 일군들은 큰 곤경을 겪어야 한다. 그 곤경이 모기 따위들의 시달림인데 흐리거나 비오는 날이면 더구나 말이 아니다. 얼굴이고 목이고 손이고 발목이고 드러나는 곳마다 달려들어 매일 모기류와의 숨가쁜 전쟁을 치러야 한다. 박정희 등 비서처의 동지들은 이런 곤경속에서 맡겨진 과업에 충실하면서 부근의 재봉대와 후방병원, 무기수리소 등 밀영을 찾아 정기적으로 정세보고를 하지 않으면 혁명가요를 가르치고 부대의 전투소식을 통보하고 상병원들을 위문하며 그곳 동지들과 더불어 공연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절실한 문제는 먹는 문제였다. 만일을 위하여 밀영과 먼곳들에 부대를 일구어 옥수수나 콩, 수수, 감자, 무우, 배추 등을 심기도 하지만 먹는 문제 전부를 해결할수가 없어 산아래 지정된 곳에 가서 식량을 메와야 하였다. 흔히 별을 이고 나가면 달을 이고 돌아와야 하는데 한쪽 100여리 길을 60-70근을 지고 걸어야하니 남자들도 그러한데 녀전사들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였다. 박정희는 이들 녀전사들가운데의 한 사람이였다.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일제놈들은 북만의 의란현(依兰县)과 화남현(桦南县) 지구들에 2만여명의 병력을 내몰아 수십대 비행기의 배합밑에 전대미문의 동기대토벌을 발동하였다. 새해 첫날인 양력설날에는 적들이 쏘아대는 포성이 의란현 커상커거우(克上克沟)의 산천을 뒤흔들었다. 적정에 습관된 박정희 등 비서처의 동지들은 다급히 필수품들인 등사기, 등사기름, 등사종이 등 등사물건들을 나누어지고는 다른 물건들은 모두 감추어 버렸다. 한편으로 주변의 여러 밀영들에 통지하면서 철거행동을 같이하였다.

박정희 소속 길동성위 비서처의 동지들은 림구현 조령(刁翎)지구에서 활동하는 항일련군 제5군 판사처주임 풍비랑(冯丕让)이 이끄는 부대와 련락을 가지고 풍비랑의 지도하에서 한겨울 북만의 강추위속에서 커상커(克上克), 응저라즈(鹰咀砬子), 희샤즈거우요(黑瞎子窖), 쟈피거우(夹皮沟), 양목강(杨木岗) 등지에서 선회하면서 두달남짓히 보내였다.



항일련군 교도려 시절의 사진. 왼쪽으로부터 왼쪽2ㅡ리조린, 왼쪽3ㅡ왕일지, 왼쪽4ㅡ주보중, 왼쪽5ㅡ김일성(자료사진)



길동성위비서처 김석봉과 요신일의 고향인 오늘의 영길현성 모습. (자료사진) 3

1938년 초 이후 항일련군의 투쟁은 가장 간고한 시기에 들어섰다. 적들의 토벌이 가심화되는데서 박정희 소속 길동성위비서처는 적들의 토벌이 별로 미치지 못하는 커상커거우의 한 깊은 산속에 자체로 비밀아지트를 설치하고 비서처의 주요과업을 그대로 밀고나갔다. 이해 11월에 적들은 의란현 조령지구(오늘의 림구현 조령지구), 목단강 북안지구에서 재차 동기대토벌에 광분하였다. 1939년 초에는 2개사단의 병력을 풀어 조령지구를 참빗질하여댔다. 적들의 동기대토벌의 중심은 주보중장군이 이끄는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와 5군 부대였다. 제2로군은 북만 항일련군의 제4군, 5군, 7군, 8군, 10군으로 구성되였다.

그 시절 박정희 소속 길동성위 비서처는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제2로군 참모장이 조선인 최석천, 즉 최용건이였다. 비서처의 극소수의 동지들이 지하련락원으로 파견되거나 5군 군부 교도대에 전근된외에는 모두가 손에 총을 잡고 2로군 총지휘부와 함께 행동하게 되였다. 이 시기 또 5군 부녀퇀의 제2대도 2로군 총지휘부와 같이 움직이였다. 부녀퇀 제2대 대장은 훈춘출신의 조선족 주신옥이였다. 적들의 봉쇄정책으로 박정희소속 비서처의 동지들은 부대동지들과 마찬가지로 극도의 기아와 피로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들은 또 두어달 남짓한 적들의 동기대토벌을 이겨나가야 하였다.

1939년 2월의 어느날 성위비서처 책임자 요신일(姚新一)이 박정희 등 비서처 10여명 동지들과 함께 방정현(方正县)의 성위 비서처 자리에 가서 관련 인쇄물자와 중요문건들을 처리하여야 했다. 박정희 일행 10여명이 밤낮 3일간 눈보라길을 헤치며 과업을 수행하고 제2로군총지휘부로의 귀로에 들어섰을 때이다. 이들은 목단강 서안의 련화포(莲花泡) 산곡에서 400여명의 적토벌대와 조우하게 되였다. 10여명 동지들은 요신일의 지휘하에서 적들과 결사전을 벌리였다. 찰나 조선족 김석봉 후임으로 성위비서처 비서장을 맡은 요신일이 32세를 일기로 적탄에 쓰러졌다.

분노한 박정희와 비서처의 동지들은 적들과 생사판가리 싸움을 벌리였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과의 싸움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갔다. 박정희, 김영남, 김일, 공례, 손소당 등 10여명 동지들은 마지막 탄알 한발까지 다하며 싸우다가 모두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들의 뜨거운 피는 바위와 흰눈을 붉게 물들이였다.

길동성위와 2로군 총지휘 주보중장군은 뒤미처야 성위 비서처 동지들의 비장한 최후를 알고 한갈래 소부대를 현지에 급파하여 박정희 등 10여명 렬사들의 유체를 수습하며 련화포서안(莲花泡西岸)의 한 로송밑에 묻도록 하였다. 추도회를 가지던 날 주보중장군은 만가(挽歌) 한수를 지어 성위비서처의 동지들을 추모하였다.

……

동지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당신들 피의 발자취 따라

목숨으로 민족해방 쟁취하리!

앞은 곧 승리이고 전진은 곧 승리이니

이는 당신들 위대한 빛발과 업적이여라!

2015년 4월 9일 정리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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