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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자랑, 우리 민족의 항일투사 리계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16일 11:43
광복 70주년을 맞으면서 필자는 항일투사들이 용솟음쳐나온 내 고향 룡정의 덕신향을 찾았다. 덕신향소재지에서 약 30리 떨어져있는 금곡촌으로 가다가 금곡저수지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옛 추억속에 잠기게 되였다.

1958년 우리 나라 대약진시기에 많은 지방들에서는 땅을 깊이 파고 (심경) 깊은 골짜기마다 물을 가두는 공사를 벌렸다. 덕신향에서도 전국적으로 불어치는 운동바람을 타고 덕신향의 여덟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막기 시작하였다. 덕신향을 민간에서 흔히 《팔도하》(八道河)라고 부르고있다. 여덟 골짜기는 다음과 같다. 금곡골, 영동골, 장동골, 성암골, 철점골, 희망봉골, 청림동골, 옥계골인데 기본상 골짜기를 막는 공사를 어데서나 벌렸다. 팔도하상류에 있는 금곡저수지가 제일 컸다. 그때 전 향의 젊은 청년들을 조직하여 금곡촌에 집중시켜 2년이란 시간을 들여 공사를 끝냈다.

저수지가 완성된후 향정부에서는 이 저수지에 대한 이름을 어떻게 지을것인가 하는 토론을 벌렸다. 간고한 항일의 나날에 금곡촌에서는 많은 우수한 독립운동가들과 항일투사들이 나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화룡현위 제1임 서기인 채수항동지, 제5임 서기인 김일환동지(일명 김성호),《연길작탄》제조자인 손원금동지(조선인민군 대장급), 녀항일투사 리계숙동지(김일환동지의 부인) 등이다. 향정부에서는 금곡촌에서 출생하고 혁명전선에서 적들과 싸우다 나젊은 생명을 바친 항일투사 리계순을 기리기 위해 이 저수지를 《류호란저수지》라고 이름을 달았다.

그때 중학생이였던 우리는 이 저수지에서 목욕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였는데 금곡마을 서기는 우리들에게 이 저수지에서 혁명투사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군 하였다.

(1)

항일투사 리계숙동지는 1914년 11월 15일 화룡현(지금의 룡정시)덕신사 금곡(金谷)촌의 가난한 농민 리원백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금곡촌은 향소재지로부터 약 30여리 떨어져있는 궁핍한 마을이다. 앞산 하나만 넘으면 개산툰이고 서쪽은 달라자(지금의 지신)와 가깝고 남쪽은 오랑캐령이고 삼합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있다.

그때 연변은 이미 왜놈들이 침략의 마수를 뻗친 뒤여서 연변의 백성들은 생활이 몹시 쪼들렸다. 금곡촌도 례외가 아니였다. 계순이 아버지는 마른날 궂은날 가릴새 없이 힘들게 일해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하여 계순이를 학교 갈 나이가 되였어도 학교에 보내지 못하였다.

계순이는 14세 되던 해에야 겨우 농촌에서 꾸린 사립학교에 들어갈수 있었다. 금곡학교는 비록 장동학교보다 늦게 세워졌지만 반일애국주의 혁명전통으로 이름이 높았다. 학교의 진보적인 교원들은 여러가지 형식으로 학생들에게 반일애국주의 사상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문예활동을 벌리고 반일애국투쟁에 발벗고 나서도록 군중을 교양하고 선동하였다.

이런 활동에 그 누구보다 열성스레 참가한 학생은 리계순이였다. 어려서부터 대바르고 영리한 리계순이는 춤과 노래를 잘 불렀다. 한차례 공연이 있을 때였다. 한 사람이 연단에 올라서서 일제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자 한 녀학생이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며 높은 소리로 구호를 불렀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

《일본제국주의 강도놈들을 타도하자! 》

온 회장이 삽시에 끓어번졌다. 계순의 어머니가 급히 머리를 돌려보니 여러 사람을 이끌고 구호를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딸 계순이였다. 후에 가서야 어머니는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어린 계순이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북받쳐올라 자발적으로 한 일이였음을 알게 되였다.

그후 금곡촌소학교를 중심으로 군중성 반일투쟁이 발랄하게 진행되면서 화룡현 반동당국을 크게 놀래웠다. 당국은 일본침략자들을 위하여 급급히 무장경찰을 충동시켜 이 학교에 불을 질러 재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리계순은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을수밖에 없었다. 계순의 마음속에는 일본침략자에 대한 증오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당시 길림사범학교에서 공부하던 계순의 오빠 리지춘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1929년 5월이였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기간 반일활동에 참가한 탓으로 졸업을 두달 앞두고 학교에서 쫓겨났던것이다. 나젊은 리지춘은 금곡에 돌아오자바람으로 야학을 꾸리고 반일사상과 반봉건투쟁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그러면서 누이동생 계순이에게 많은 혁명의 도리를 이야기해주었고 고향의 사람들과 함께 반일투쟁에 나섰다. 계순이는 오빠의 도움으로 혁명의 도리를 재빨리 알게 되였으며 오빠가 벌려나가는 혁명활동에서 유력한 조수로 되였다. 계순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늘 원쑤놈들의 코밑까지 잠입하여 표어를 붙이고 삐라를 산발하였으며 비밀편지를 나르고 선전사업을 하는 한편 제힘으로 할수 있는 일들을 찾아하였다.

1931년 늦은 가을이였다. 일제가 동북을 강점한후 연변의 여러 지방의 반일투쟁을 진압하는데 더욱 미쳐날뛰였다. 리원백의 일가 더우기는 리지춘과 리계순은 일제놈들과 경찰놈들 그리고 자위단놈들이 감시하는 중점대상으로 지목되였다. 계순의 오빠는 할수 없이 지하로 잠입하여 혁명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들의 련락지점을 뒤산 매바위굴로 정하고 활동하였다.

당시 공청단구위에서는 비밀련락원을 맡고있었던 리계순을 빨리 금곡촌을 떠나라는 통지를 보내왔다. 이튿날 날이 어두워지자 리계순은 부모님께 작별인사도 올리지 못하고 그들과 리별하였다. 계순이는 정겨운 눈매로 자애로는 두 부모님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머금고 남몰래 금곡촌을 빠져나왔다.

며칠후 리계순은 금곡촉과 100여리 떨어져있는 약수동(지금의 화룡시투도진룡문촌)으로 와서 평강구 부녀회 주임직을 담임하였다.

(2)

일본침략자들은 1932년 여름 화룡현 평강지구에 대하여 미친듯한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로 하여 약수동 항일유격근거지는 심한 타격을 받게 되였다. 그러자 간부들은 약수동을 떠나 어랑촌 항일근거지로 전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리계순도 그들과 함께 떠나 부녀회와 아동단사업을 맡아하였다.

그해 가을이였다. 금곡촌의 농민 손금철이 어랑촌에 찾아와서 리계순에게 뜻밖의 불행한 소식을 전하였다. 그의 오빠 리지춘과 몇몇 청년들이 뒤산 매바위굴에 모여서 회의를 하던중 갑자기 일본 《토벌대》습격을 받아 불행하게 붙잡히게 되였다고 한다. 9월 25일 일제놈들은 리지춘 등 혁명자들을 금곡촌에 끌고와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놀라운 소식을 접한 리계순은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비분을 참지 못해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계순이는 오빠의 가르침을 받아 혁명에 들어서게 된 일과 둘도 없는 사랑하는 오빠가 장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에 떠난 일을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번졌다. 그는 오빠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받아 일본침략자와 끝까지 싸울 결의를 굳게굳게 다지였다.

그는 결연히 가위를 찾아들고 지금까지 아끼고 사랑해오던 그 치렁치렁한 머리태를 썩뚝 잘랐다. 이어 필을 들어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년로하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오빠의 희생때문에 얼마나 상심하고 계십니까. 절대 울지 마세요. 오빠는 영광스럽게 희생되였어요. 오빠의 피는 결코 헛되이 흐르지 않을겁니다. 저는 오빠와 희생된 동지들의 피값을 꼭 받아내고야 말것입니다. 여기 보내는 저의 머리태가 곧 이 딸의 결심인줄 아세요. 부모님께서 키워주신 은정은 영원히 잊지 않고있으나 복수하기 위하여 , 혁명투쟁을 위하여 저는 모든것을 바칠 결의를 다지였어요. 부모님께서는 이 딸을 보고싶을 때마자 이 머리태를 보시면서 이 딸 계순이를 본듯이 생각해주세요…. 》

계순이는 잘라낸 머리태를 정히 싸서 그 편지와 함께 손금철에게 맡겨 부모님께 전하도록 하였다. 그해 리계순은 갓 18세였다 소녀티를 벗고 몸매가 미끈한 처녀로 이미 성장해있었다. 그 시절 농촌에는 계순이처럼 단발머리를 한 녀성들이 극히 적었다. 그러므로 리계순이 머리태를 자른 일은 희소한 소식으로 되여 재빨리 어랑촌 유격근거지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쩍 하면 대량의 병력을 출동시켜 어랑촌(지금의 화룡 와룡향) 일대에 쳐들어와 토벌을 하군 하였다. 항일투사들은 군민들과 함께 싸우면서 일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리계순은 녀성들을 조직하여 밥과 물을 나르고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한편 아동단을 조직하여 보초를 서고 편지를 나르게 하였다. 그러느라 그의 두눈은 늘 뻘겋게 피발이 서있었고 두다리는 팅팅 부어있었다.

(3)

1933년초 리계순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나젊은 혁명전사와 서로 사랑하게 되였고 뒤이어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였다. 김일환(덕신향 출신)항일투사는 그 당시 중공화룡현위 조직부장으로 있었는데 그해 3월에는 현위 제5임 서기로 임명되였다. 리계순도 현위 비서로 다시 임명을 받았다. 시어머니는 현위통신원으로 일하였다.

리계순은 갓 결혼한 몸이지만 밀월을 보내기는커녕 조직에서 주는 임무를 맡고 일본령사관이 둥지를 틀고있는 룡정에 잠입하여 지하공작을 하게 되였다.

리계순이는 거지로 가장하고 룡정시내를 관찰한후 한 국수집에 들어가 밥을 몇끼 빌어먹으면서 국수집 식구들과 낯을 익혔다. 어느날 계순이는 국수집에서 일손이 딸리여 바삐 돌아치는것을 보고 품값을 받지 않고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모든 잡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주인의 허락을 받게 되자 안신처를 찾게 된 그는 속으로 기뻤다. 계순이는 물을 긷고 옷을 빨고 청소하는 등 일들을 찾아하였다.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척척 해가면서 주인들의 호감을 샀다.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고 소박하고 듬직한데다 일손이 재고 알뜰한것을 본 주인은 계순이를 손님시중을 들게 하면서 반찬을 볶고 국수를 누르는 일까지 시켰다. 그럴 때마다 계순이는 더욱 착실하게 일하였다.

계순이가 일하는 국수집은 일본령사관 근처에 있다보니 령사관 경찰들이 단골손님으로 자주 찾아왔다. 그는 국수와 볶음채를 날라가면서 적들의 기밀을 알아내고는 어랑촌근거지에 전하였다. 그리고 10여명의 아이들을 교육하여 삐라를 산발하도록 하였다. 난데없는 삐라가 자주 거리에 나타나자 놈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경황실색하였다.

계순이는 식당에서 일하는 일군들을 조직하여 혁명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그러자 국수집 근처의 녀인들도 리계순을 친인처럼 믿고 따르게 되였다. 리계순이가 아무리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활동하느라 하여도 시간이 길어지니 자연 놈들도 눈치를 채게 되였다. 그러자 계순이는 재빨리 룡정을 떠나버렸다. 리계순이는 혁명투쟁속에서 당조직의 준엄한 고험을 거쳐 1933년 5월 진붉은 당기아래에서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4)

1933년 11월, 중공동만특위에서는 김일환, 리계순 일가를 화룡현 서북변구에 있는 처창즈(지금의 화룡시 와룡향 화안촌)에 파견하여 지하사업을 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들은 조직의 결정에 원망 한마디 없이 복종하였다.

그들은 이주민의 신분으로 처창즈에서 한족지주 리씨의 집에서 일군으로 일하고 밤이면 제각기 나뉘여 혁명사업을 하였다. 김일환과 리계순은 그곳에서 농민가정에 들어가 혁명의 도리를 선전하고 군중을 발동하였다. 그들은 식당과 약품을 마련하여 유격대에 보내군 하였다.

1934년 가을, 동만 각지의 유격근거지가 엄중한 파괴를 받았기에 현, 구, 정부와 많은 혁명군중들을이 처창즈에 모여들게 되였다. 이해 11월 항일투쟁이 바야흐로 깊이있게 전개되고있을 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찍 연길, 왕청 등 현의 혁명대오 내부에서 불어치고있던 이른바 《반민생단투쟁》의 요사한 바람이 이곳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에까지 불어오게 된것이다. 그리하여 김일환은 《민생단분자》라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였으며 리계순도 련루되여 일체혁명활동에 참가할수 없게 되였다. 김일환이 이 좋은 간부라는 것이 판명되자 그에 대한 비판도 중지되였다. 그러나 며칠뒤 김일환은 끝내 암살당하고말았다.

김일환의 비참한 죽음으로 하여 리계순은 가슴이 한없이 아파났다. 그는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미쳐날것만 같았다. 원한을 품고 떠나간 남편의 억울한 죽음은 리계순이 심령에 아물길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였다. 계순이는 임신한 몸조차 지탱하기 어려웠다.

계순이는 그래도 당에 대해 한마디 원망도 없었고 혁명사업에 대하여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자기의 일생의 행동으로 자신과 남편이 당에 충성하고 혁명사업과 인민군중들에게 미안한 일을 한적이 없다는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5)

1935년 음력 2월 리계순은 딸을 낳았다. 아이의 이름은 김정자라고 지었다. 그때 계순의 일가는 너무도 가난하여 온 집식구가 참기 어려운 고통속에서 근근득식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남편의 피해로 계순이를 비롯한 전 가족이 피해를 받아 군중들의 의심스러운 눈길과 경시를 받아왔던것이다.

드디여 사람을 불안에 떨게 하던 《반민생단투쟁》은 사라지고 김일환의 억울한 루명이 벗겨졌다. 계순의 일가는 비록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끼니를 이어가는 간고한 형편이였지만 마음은 도리여 거뜬하였고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계순이는 젖먹는 아이를 업고 허약한 몸을 지탱하면서 만강의 열정으로 신새벽부터 저녁까지 피로를 잊고 이집저집 찾아다니면서 군중을 발동하고 조직하는 사업을 하였다.

그해 10월 일제놈들은 명월진과 송강진으로부터 몇백명으로 무어진 《토벌》대를 대거 출동시켜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에 덮쳐들었다. 놈들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을 지르는 3광정책을 실시하였다. 집집의 뜨락에 무져놓은 낟가리가 삽시간에 재더미가 되고말았다.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의 혁명부대는 안도현 내두산으로 원정하게 되였다. 대다수의 청장년들이 부대를 따라 처창즈로 떠났다. 그리고 부녀, 어린이, 로인, 병약자들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부근의 여러 산골짜기에 분산하여 은페하기로 되였다.

리계순은 젖 먹는 어린애 때문에 부대를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것이 못내 안타까왔다. 그녀의 일가와 다른 네가정의 열아홉사람은 서남차 골짜기의 밀림속에 잠복하여 막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리계순은 일제놈들을 항격하는 전투장을 떠나지 않았다. 계순이는 주동적으로 소분대의 전투행동에 참가하여 여러차례 적들을 기습하여 무기와 군용품, 식량 등을 탈취하였다.

어느 하루, 일제놈들이 대량으로 병력을 집결하여 갑자기 산속으로 쳐들어왔다. 계순이의 일가와 마을사람들은 제때에 치벽한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은페하였다. 적들은 병졸들을 몇십개의 짝패로 나누어가지고 도처에서 산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놈들은 군중들이 은페한 곳까지 다가왔다.

바로 이 위급한 시각에 계순의 품에 안겨 젖을 빨고있던 딸 정자가 젖이 나지 않는다고 《와 -》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계순이는 직감적으로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다.

어린애의 두번째 《와-》소리가 미처 입안에서 나올 새도 없이 그녀는 무의식간에 한손으로 어린애의 입을 눌러막고 다른 손으로 옷속의 솜을 뜯어내여 어린애의 입안에 밀어넣었다. 정자의 울음소리는 그치고 군중들은 구원되였다.

산을 수색하던 적들이 가버린 뒤 딸 정자는 다리가 이미 뻣뻣하게 굳어졌고 낯색이 새파래 눈을 우로 치뜨고있었다. 한동안 주무르며 구급하여서야 애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였다. 계순의 이마에는 콩알 같은 땀방울이 내돋아있었다. 사람들은 리계순의 행동에 깊이 감동되였다.

《세상에 기차기도 해라.. 정자는 죽었다 살아났구먼. 계순이는 우리를 위해 딸의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는단 말이요…》 주위사람들은 눈굽을 찍었다. 리계순은 되려 게면쩍게 웃고있는데 두 눈에서는 눈물이 피오듯 흘러내렸다.

(6)

처창즈의 투쟁환경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고하고 험악해졌다. 계순이는 시어머니와 딸애가 자기와 함께 고생하는것을 차마 보고있을수 없었다. 하여 여러번 시어머니더러 정자를 업고 적후에 있는 친척집으로 가 한동안 지낼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한사코 그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싶다고 하였다.

1936년 늦가을의 어느날, 리계순의 소분대는 오도양차 부근에서 동북항일련군 2군 6사 8퇀의 한 대오와 맞띄우게 되였다. 8퇀 정위 박덕산(원명 김일 덕신향 룡암 출신)은 리계순 등 사람들의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여 소분대를 《특별반》에 편입시켜주었다.

제2군의 정위 위증민이 8퇀으로 내려왔다. 그는 시간을 타 특별히 리계순을 접견하였다. 위증민동지는 그들에게 《민생단》이란 이 최악의 유령이 다시 당내와 혁명대오 내부에서 요사한 바람을 일으킬수 없다는것을 알려주었다.

《김일환은 우리 당의 훌륭한 동지였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피살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반역자 리억만의 작간에 의해 빚어진것인데 지난날 우리는 그의 꾀임에 들어 당신들까지도 괴로움을 받게 했습니다.》

위증민동지의 마디마디에 리계순은 한없는 따사로움을 느꼈다. 근 2년간 리계순은 혁명대오 내부에서 가지가지 랭대를 받고 참을수 없는 고통을 받았지만 사람들앞에서 눈물 한방울 흘린적이 없었다. 하지만 위정위 앞에서 마치 의지를 찾은 어린애처럼 소리내여 오래오래 통곡을 하였다.

그는 2년동안 참아오던 눈물을 속이 씨원할 정도로 한꺼번에 쏟아내고있었다. 리계순은 남편이 다 하지 못한 혁명사업을 거뜬한 기분으로 계승할수가 있게 되였다.

매서운 찬 바람이 불어치는 한겨울날 이른 아침, 리계순은 어린 정자를 업고 안도현으로 떠나는 시어머니를 바래고있었다. 철 모르는 정자는 이 모든 일을 알리가 만무했다. 그 애는 작은 입을 벌리고 어머니를 보며 해죽해죽 웃고있었다. 리계순은 리별의 아픔으로 가슴이 쓰려났다. 이것이 사랑하는 딸애와의 마지막 리별임을 그 누구도 모르고있었다.

리계순과 시어머니는 비록 멀리 떨어져있지는 않았으나 서로 아무런 소식도 모르는채 지내고있었다. 계순이는 시어머니와 딸애가 안도현에 있는 친척집에 당도하여 무사히 지낼수 있기만 바랐을뿐이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계순이의 시어머니와 정자는 길가에서 불을 지피고 몸을 녹이다가 자기의 아들을 죽게 한 리억만이 거느린 놈들에게 잡혀 연길현 조양천구류소에 감금되였다. 그들은 1년후에야 석방되였다. 이 백발이 창창한 혁명의 어머니는 당조직과 다시는 련계를 가질수 없었고 유일한 친인인 리계순도, 김선(친조카)도 찾을 수가 없게 되자 정자를 업고 조선으로 나갔다.

(7)

1936년 11월 리계순은 제2군 6사 8퇀을 떠나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하늘도 보이지 않는 원시림속을 뚫고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몇백리 길을 강행군하여 마침내 장백현 헤샤즈거우에 전이하였다. 리계순은 장백현 《일면수전투》에 참가하였고 또 무송에 가서 《소탕하전투》에도 참가하였다.

한달남짓한 강행군과 전투가 이어진 가운데 리계순은 두발에 동상을 입어 길을 걸을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리계순은 부득불 부대를 떠나 무송현 후방병원에 호송되여 동상을 치료받게 되였다.

상처를 치료하는 기간 계순이는 자기 아픔을 돌보지 않고 언제나 열정적으로 다른 부상병들을 간호해주었다. 중환자들의 초약을 달이고 상처에 약을 바꿔붙이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궂은 일 마른 일 가릴새 없었다. 환자들은 모두 그를 《우리 누나》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리계순은 환난속에서 남창수와 심후한 감정을 건립하였는데 동상이 회복되자 그와 결혼하였다. 1937년 봄, 리계순은 상처가 낫자 장백현 헤샤즈거우 밀영으로 돌아가 제6사 사부의 간호사업을 맡아하였다.

계순이는 늘 지휘원, 전투원들과 함께 지방에 내려가 반일회, 부녀회 등 군중단체의 사업을 도와주면서 항일구국투쟁을 벌렸다. 이해 여름, 제6사 등 항일련군부대는 장백산지구에서 일련의 전투를 진행하여 관동군의 중국내지 진출을 견제하는것으로 전국의 항전에 유력한 배합을 하였다. 리계순은 부대를 따라 리명수, 간산봉 등 전투에 참가하였다. 번마다 과감하고 지혜롭고 영용무쌍하게 싸웠다.

그해 겨울, 제6사의 주력부대는 장백현을 떠나 몽강현(지금의 정우현)으로 진군하였다. 리계순은 두발에 입었던 동상이 재발하여 후방병원에 남게 되였다. 그는 자기 상처를 치료하는 한편 부상병의 화식과 간호사업을 책임지게 되였다.

이 병원은 장백현 혜샤즈거우 북산의 한 천연동굴에 자리잡았다. 동굴어구에는 나즈막한 바위벼랑이 가리워져있고 주위는 수림이여서 썩 잘 은페된 곳이였다. 여기에 남게 된 부상병들로는 사군수부의 박상활부장, 4련 련장 리득수, 사무장 왕동무, 60여세 되는 4련 로전사 최령감, 거기에 리계순까지 모두 다섯사람이였다. 이름이 《병원》이지 의사도 간호사도 약품도 없는 극히 어려운 처지였다.

리계순은 취사원이자 간호원이였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물을 끓여 밥을 짓고 옷을 빨고 기웠으며 짬만 있으면 밖에 나가 약초를 캐다가 약을 달여서는 부상병들의 상처를 씻어주면서 갖은 방법을 다하여 전우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그해 섣달 그믐께 며칠동안 련이어 큰눈이 퍼부었다. 헤사즈거우는 온통 흰눈에 뒤덮혀 어디를 보나 새하얀 은백세계였다. 눈이 멎자 또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수림이 세차게 설레이며 아우성치는 소리는 그밖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렸다.

이날 상처가 조금 아물기 시작한 리련장과 왕동무가 나무하러 나갔다. 그들 두 사람이 방금 동굴어구를 나와 몇걸음 나가다 말고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주춤거리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급히 돌아서서 냅다뛰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장백현토벌대 대장 마금두가 한무리 적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목표를 발견하자 총을 쏘면서 몰켜왔다.

리계순이 총소리를 듣고 급히 동굴어구로 나가보니 적들은 병원을 포위하고 미친 승냥이마냥 동굴어구로 다가오고있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명령하듯 웨쳤다. 《박부장동지, 놈들이 와요. 빨리 문잠동병원으로 전이하세요! 제가 엄호할네니 빨리! 빨리!..》

어느새 박부장과 최령감이 동굴에서 뛰쳐나와 서남방향으로 내뛰였다. 이 위급한 관두에 계순이는 어느때보다 더욱 민첩하였다. 그는 남은 량식을 놈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구석 깊은 곳에 감춰놓은 다음 마지막 사람으로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다른 동지들이 포위를 돌파하도록 엄호를 하였다. 계순이는 놈들의 화력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유인하였다. 이 생사존망의 시각에 그의 뇌리에는 오직 자기를 희생시키고 삶의 희망을 전우들에게 돌리자는것이였다.

심산벽곡은 다시 고요해졌다. 밀림속 병원은 침중한 손실을 받았다. 박부장은 벼랑에서 뛰여내려 장렬히 희생되였다. 리계순, 최령감, 왕동무는 체포되였다. 다만 4련 련장 리두수만이 다행으로 재난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그는 계순이 감춰둔 그 식량으로 그해 겨울을 간신히 날수가 있었다.

이듬해 봄, 압록강 량안에 꽃이 피는 계절이 왔다. 부대수장은 일루의 희망를 안고 이곳에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의 생사를 알아보게 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밀영속에서 리두수를 발견하게 되였다. 그후 그는 혁명가족 천만금의 집에 호송되여 상처를 치료받고 다시 부대로 돌아가게 되였다.

(8)

리계순 등 세사람은 장백현경찰서에 압송되여갔다. 잔인무도한 놈들은 사무장 왕동무를 무참히 살해하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그의 머리를 베여 목재회사옆 큰다리 아래의 전주대에 매달고 사람들에게 현시하였다. 그리고 리계순이와 4련 전사 최령감은 각기 축축한 감방에 가두었다.

놈들은 리계순이 신체가 허약한데다 또 해산을 앞둔 젊은 녀인인것을 보고 그녀를 심문하는것을 돌파구로 삼으려 하였다. 놈들은 리계순에게 련 며칠 가지가지 혹형을 들이대면서 항일련군부대가 간 곳이며 지도자의 이름, 무기장비 등 상세한 정황을 말하라고 핍박하였다. 하지만 리계순의 입에서는 오직 한마디 《모른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놈들은 남자들도 질겁하는 모진 혹형을 들이대면 이까짓 연약한 녀자의 입 하나쯤이야 쉽게 열수 있으리라 여겼다. 놈들은 가죽채찍, 주리대, 고추물 등 모든 고문을 들이댔지만 이 녀전사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지어 4련 전사 최령감의 머리를 잘라 그녀앞에 던져보이며 가장 잔인한 수단과 방법으로 계순이를 위협하고 공갈하였다. 하지만 역시 허사였다.

미구하여 리계순은 옥중에서 남자애를 낳았다. 해산한지 며칠 안되여 위경찰서장(경찰국장) 이시사까와 경무과장이 갑자기 감방으로 뛰여들었다.

그들은 계순이와 아들애의 모자정을 미끼로 그녀에게 투항을 권고해보려 시도하였다. 조건은 백성들이 모인 앞에서 항일련군 부대가 간 곳을 밝히고 지도자와 련락원들의 이름을 대며 《항일구국》이 《범죄》라는 것을 승인하고 《귀순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모자를 모두 즉시 석방시키겠다는것이였다. 이시사까는 리계순이 말 없이 침묵을 지키자 그의 마음이 동요하고있는줄로 알고 너털웃음을 쳤다.

《모자간의 정이야 어찌 끊을수 있겠는가. 너에게 3일간의 시간을 줄테니 어디 잘 생각해보거라.》 말을 마친 경찰국장은 경무과장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리계순은 이것은 놈들의 새로운 수작이라는걸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이런 음흉한 계책으로 계순이로 하여금 혁명동지를 팔아먹고 혁명을 배반하도록 하려는것이였다. 그것은 절대로 실현될수 없는 어리석은 망상이라고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그녀는 또 달리 생각해보았다. 이것이 군중들과 만날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하다면 군중들에게 항일선전을 하고 혁명사업을 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것이다!

리계순은 자기가 작정한대로 하면 어떤 결과가 따르리라는걸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진작부터 각오가 있었던 그는 아주 태연자약하였다. 그러나 아들애가 태여나자마자 자기와 함께 요절하게 될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질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이를 꼭 껴안고 비분에 떨며 쓰라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이는 죽일수 없다.! 절대로 죽일수 없다. 아이는 혁명의 씨앗이다.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아이를 살려 내보내야 한다.

리계순은 생각을 거듭한 끝에 백룡길(원 항일련군의 꼬마전사로서 십삼도구 전투에서 포로되였는데 간수소장 손운창이 보석하여 자기 양아들로 삼고 구류소에서 잡일을 시키고있었다.)을 통하여 간수소 소장 손운창과 내통하여 아이를 장백현삼림경찰대 2중대 범희정에게 넘겼다. 일을 끝낸 다음 손운창은 이시사까에게 리계순의 어린애가 죽었는데 시체는 세빠트에게 먹여버렸노라고 보고하였다.

이시사까는 일개 간수소장이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그런 담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참말로 믿고 더 캐여묻지 않았다. 아이가 전이돠여 출옥한 이튿날 리계순은 요구에 응하겠노라고 하였다.

1937년 12월 26일, 이날은 장백진의 장날이였다. 일제놈들은 헌병대와 위군을 출동시켜 장보러 모여온 백성들을 강박하여 만주가(지금의 룡강촌) 조선족소학교 운동장으로 몰아왔다. 그리고 대안에 있는 조선의 혜산진에서도 한무리 사람들을 몰아와 집회에 참가시켰다.

회의장 두리에는 기관총을 걸고 수풀처럼 빽빽이 보초를 섰는데 마치 대적을 앞두기라도 한듯 경계가 삼엄하였다. 소름이 끼치칠 정도로 공포의 분위기가 온 장내를 휩쌌다.

오전 11시쯤 되여 놈들은 헌병대 오토바이에 리계순을 태우고 회장으로 압송해왔다. 위경찰서장이 나서서 마른기침을 둬번 깇고 먼저 일본군 《토벌대》의 《공적》과 항일련군의 《패배》에 대하여 일장연설을 한후 리계순이 《회과자신》(悔過自新)한다고 선포하였다.

회장은 물뿌린듯 조용하였다. 수백명 군중들은 모두 이 항일녀전사를 지켜보고있었다. 리계순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이 이시사까의 손에서 《귀순서》를 받아쥐고 운동장에 모여선 군중들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갑자기 높은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가난한 로고대중 여러분, 이 리계순을 믿어주십시오. 저는 절대로 이 귀순서에 서명하지 않을겁니다. 우리는 절대 망국노가 되여서는 안됩니다. 항일전쟁은 기어코 승리할것이며 일제는 기어코 패배하고야 말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처럼 단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합시다!》

리계순은 말을 마치더니 《귀순서》를 갈기갈기 찢어 허공에 내뿌려던졌다. 이 돌연적인 행동에 이시사까는 놀라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처음 그는 리계순이 하는 조선말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있다가 그 뜻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사태를 만회할 수가 없게 되였다.

일본인 헌병대장은 군중들이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는것을 보고 분이 상투밑까지 올라 리계순에게 련이어 총을 두발이나 쏘았다. 리계순은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의연히 버티고 서서 계속하여 구호를 높이 불렀다. 적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급급히 구류소로 실어갔다.

1938년 1월 놈들은 리계순을 진일보 심문하려는 시도로 헌병대에 넘겨갔다. 뒤이어 그녀를 이도구 하시모도헌병대 본부로 압송하였다. 차가 리수구대호령 굽인돌이 산길을 에돌고있을 때 리계순은 상처가 갈라터지면서 류혈이 과도하여 까무라치고말았다. 잔인무도한 놈들은 숨이 거의 넘어가는 리계순을 산골짜기에 팽개쳤다. 이때 렬사의 나이는 겨우 스물세살밖에 되지 않았다.

(후기)

리계순이 희생된후 리수구 대호부근에 사는 김씨, 백씨, 조씨 성을 가진 세호의 조선족농민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렬사의 유체를 안장하였다. 리계순의 딸 김정자는 할머니인 《김어머니》를 따라 조선으로 갔다. 이름은 정임으로 고쳤고 성장한후 조선로동당중앙당사연구소 부소장직에서 사업하였다.

1972년 12월 3일, 장백조선족자치현인민정부에서는 렬사의 유해를 장백진 탑산기슭으로 옮겨다 매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리계순은 30년대 동북지구의 특수한 력사조건하에서 희생된 항일렬사이다. 그의 유골을 다시 안장한후 국가외교부의 지시에 좇아 줄곧 중조 두나라의 항일렬사로 보존하였다. 그후 조선정부의 요구에 의해 1989년 5월 4일부터 20일까지 성대한 청장활동을 거행하여 리계순의 유골을 조선 평양 대성산혁명렬사릉원에 안치하였다.

우리 민족 항일녀투사 리계순의 불굴의 혁명정신은 중조항일투쟁사에 영원히 빛날것이다.

(필자는 리계숙동지의 항일투쟁사적을 정리하면서 《조선항일투쟁사》와 《연변문사자료,》 양만규 등 력사학자들이 쓴 문헌들을 참고하였다. )

/김원범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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