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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항일영웅 황옥청, 허현숙 부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17일 14:34
황옥청(黄玉清), 지금은 낯선 이름이지만 60여년전 길동지역 항일전장에서는 그 명성이 자자했었다.

황옥청, 본명 한형호(韩亨镐), 1899년 조선 함경북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05년, 그의 전가족은 흑룡강성 목릉(穆棱)현 향양(向阳)에 이주하여 살았으며 중국국적에 가입했다. 1909년, 황옥청은 현지 소학교에서 글을 배웠으며 1913년 졸업한후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하며 살아갔다.

허현숙(许贤淑), 조선족, 흑룡강성 목릉의 한 농민가정 출신으로 아름답고 선량한 처녀였다. 두 사람은 20세기 20년대에 백년가약을 맺었다.

1927년, 황옥청과 기타 애국자들은 표어, 전단지 등 형식으로 일본침략자들의 죄행을 폭로하고 인민들이 단결하여 투쟁할것을 호소했다. 1928년, 황옥청은 이 촌의 빈곤한 군중들을 이끌고 지주의 잔혹한 착취와 수탈에 반항하는 감조감식투쟁을 진행했다.

1929년, 황옥청은 김세현 등 20여명의 군중들을 조직하여 전교를 명의로 항일을 반대하는 기독교목사를 맞상대하여 투쟁을 벌이다가 팔면통괴뢰경찰서에 두달남짓 갇혔다. 출옥후 그는 계속하여 군중들을 령도하여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으며 압박에 반항하는 영용불굴의 강인한 성격을 나타냈다. 투쟁실천에서 그는 점차 중국공산당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으며 주동적으로 당에 접근하고 당의 령도를 받아들이고 당의 요구에 따라 여러가지 활동에 종사했으며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황옥청은 중공목릉현 하성자구위원회(下城子区委员会) 서기로 당선되였고 얼마 안되여 또 중공목릉현위원회 선전위원을 맡았다. 1932년 가을, 중공수녕(绥宁)중심현위원회는 황옥청을 밀산으로 파견하여 군중들항일사업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황옥청과 허현숙은 이미 7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만약 밀산으로 가게 되면 그들은 수년간 경영해온 가업을 포기하고 다시 품팔이를 하면서 살아가야 했다. 혁명의 숭고한 리익을 위하여 황옥청은 밀산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안해 허현숙을 설득했다.

허현숙도 생각한 끝에 혁명의 리익을 앞자리에 놓고 수년간 피땀으로 일궈온 가업을 포기하고 다시 자수성가하기로 결정했으며 결연히 남편과 함께 새로운 혁명의 길에 올랐다. 이런 혁명각오는 그 당시 평범한 녀성으로 말하면 드문것이였으며 지금에 와서도 아주 드문 일이다. 11월, 황옥청과 허현숙은 밀산현 서대림자에 도착했다. 황옥청은 서대림자, 백포자 일대에서 품팔이를 하며 항일선전을 했고 군중을 발동하여 빠른 시간내에 당이 령도하는 군중성항일조직-반일회를 성립했다. 허현숙도 적극적으로 남편을 협조하여 혁명활동이 순리롭게 전개되도록 했다.

1934년 9월,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은 오평을 길동 밀산 하다하북산(哈达河北山)에 파견하여 중공밀산현위원회 확대회의를 주재하게 했다. 회의는 인민항일혁명군과 밀산유격대를 합병하고 항일동맹군사령부(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칭)를 조직하고 리연록이 군장을 맡았다.

이 항일무장의 지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공밀산위원회는 여러명의 현위간부를 파견하여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을 충실히 하였다. 황옥청은 이미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된 안해 허현숙에게 함께 부대에 가서 사업하자고 동원했던터였다. 밀산에 도착한후 허현숙은 또 딸을 낳았는데 금방 말을 배우기 시작한 딸은 가족의 웃음주머니였다. 하지만 참군하게 되면 부대생활이 지방보다 더 불안정하고 힘들고 위험했으므로 두살미만의 아기를 데리고 부대에 가는것은 타당하지 않았다.

황옥청은 엄마품에서 어리광부리는 딸을 보면서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마음을 잘 아는 안해는 눈물을 머금고 《우리는 모두 당의 사람이기에 당을 위해서는 뭐든지 포기할수 있어요. 옆집의 아줌마도 우리 딸을 좋아하는데 딸을 그 집에 주면 마음을 놓아도 될거예요!》라고 말했다. 작은 오빠는 어른들의 이 가슴이 찢어지는 말을 리해하지 못한채 어머니에게 《동생을 데리고 가요. 제가 업을게요. 저는 동생을 업고 아주 빨리 달릴수 있어요. 데리고 가요. 부탁드려요, 아버지!》라고 계속 졸라댔다.

당의 사업을 위해 황옥청부부는 딸을 남에게 보내고 아들과 함께 산으로 올랐다. 부대에 도착한후 황옥청은 1사 1퇀 2련의 지도원을 맡았다. 허현숙도 남편과 함께 부대에 남아서 복장공장에서 일하게 되였으며 영감하고 싸움을 잘하는 항일녀전사로 되였고 아들도 어린 통신원으로 되였다.

1936년 3월,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에 따라 동복항일동맹군 제4군을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개편했고 황옥청은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개편된후 4군은 부단히 장대해져 신속하게 4개 사, 10개 퇀, 2000여명으로 발전되였다. 그해 11월, 항일련군 제4군은 정리개편을 진행했는데 황옥청은 4군 1사 정치부주임을 겸임했다.

황옥청동지는 문무에 모두 뛰여났다. 1937년 1월, 그는 부대를 이끌고 밀산현 4인반(四人班), 편련자(偏脸子)등지의 위갑소(伪甲所)를 습격하고 한간주구들을 제거했으며 부대를 위해 대량의 의연금을 모집했다. 2월, 그의 령도아래 승리적으로 보청(宝清), 부금(富锦)일대의 항일투쟁의 새 국면을 열었다.

5월, 그는 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5군과 련합하여 공동으로 밀산현 하다하(哈达河)의 괴뢰군 제26퇀을 공격하여 이 퇀의 퇀장을 생포하고 박격포련, 기관총련, 3개 보병련의 모든 무기와 탄약을 획득했다. 8월, 그는 또 부대를 이끌고 량수천자(凉水泉子)의 적들을 공격하여 10여명의 적을 죽이고 13자루의 보총을 획득했다.

1938년, 일본군은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발동하는데 뒤탈이 없게 하기 위하여 병력을 집중하여 동북항일련군에 대한 잔혹한 토벌과 소탕을 진행했으며 이로 하여 동북항일무장투쟁이 가장 힘든 시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이 동북항일련군부대를 위삼강성(伪三江省)지역에 《모아서 섬멸》하려는 음모계획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건립하며 하동, 남만 항일련군부대와 열하항일부대와 련계를 달고 내지 항일전쟁과 호응하여 전 중국항일전쟁의 최고조를 맞이하기 위해 중공길동, 북남림시성위는 서정(西征)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항일련군 4군은 군부 1, 2급 두개 사를 포함한 서정부대를 조직했다. 황옥청과 그의 안해 허현숙은 모두 서정주력부대에 참가했다. 행동의 편리를 위하여 지휘부는 목단강연안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곧 제4군과 제5군의 녀전사들을 부녀퇀으로 개편하고 랭운(冷云)을 퇀장으로 임명하여 제5군 1사와 서정선두부대와 더불어 먼저 출발하게 했는데 허현숙은 부녀퇀의 일원으로 되였다.

출발 전날밤, 허현숙이 황옥청에게 작별하러 왔다. 황옥청은 안해의 마른 몸을 보며 슬프기도 하고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어머니로서 자식 둘을 버리고 이제 와서 남편과 헤여지게 되였는데 과연 감당할수 있을가? 황옥청은 안해의 손을 꼭 잡고 《이젠 돌봐주지 못하게 되는데 조심하오. 우리가 꼭 승리하여 다시 만날 알이 올것이라고 믿소》라고 말했다.

허현숙은 금방 만든 신발을 남편에게 건네주며 《우리는 모두 당의 사람이예요. 당의 사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곤난이든지 이겨낼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결연히 말했다. 그들은 누구도 이번 작별이 영원한 리별이 되리라고 생각못했다. 8월, 항일련군 제2로군 서정부대가 오상에 진입하여 원보진을 습격하는 전투에서 허현숙은 부상당한 녀전사를 구하다가 생포되였다. 적의 피서린 칼앞에서 허현숙은 굴하지 않았고 무참히 살해당했는데 영웅적인 행위로 공산당원으로서의 맹세를 실현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옥청은 슬픔을 씹어삼키며 계속하여 항일투쟁을 견지했다.

서정부대의 작전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고 탄약, 식량을 미처 보급받지 못해 몇번이나 오상현에 들어갔으나 항일련군 제10군과 련계를 취하지 못해 아주 곤경에 빠졌다. 이런 정황에서 황옥청은 명을 받고 보청으로 돌아가 2로군 총지휘 주보중(周保中)을 찾으러 갔다.

1938년 11월, 황옥청은 적들의 봉쇄로 2개월 넘게 주위를 맴돌다가 마침내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를 찾았으며 총지휘 주보중에게 서정부대의 정황을 보고했다. 그뒤, 황옥청은 10여명의 작은 소대를 이끌고 총지휘부와 항일련군 5군, 7군을 왕복했으며 길동성위와 2로군 총부의 각항 지시와 명령을 하강특위(下江特委)와 각급현위, 각부의 당위에 전달했다.

1939년초, 황옥청은 적들의 《가을대토벌》의 포연탄우를 뚫고 길동성위 제7군 보충퇀 퇀장 리일평을 표창할데 관한 통보를 부대에 전달했으며 부대의 투지를 크게 높였다.

10월 23일, 제5군 3사 9퇀의 50여명은 황옥청을 따라 보청현 향수천자 위경찰분서와 자위단을 습격했다. 12월, 황옥청은 중공길동성위 위원으로 선거되였고 제2로군총부 정무처 주임을 맡았다. 1939년 겨울부터 1940년초까지 황옥청동지는 총부류수부대 5군 3사 1개 퇀을 이끌고 적들의 미친듯한 포위토벌에도 계속하여 보청, 부금, 박리일대에서 완강하게 활동했다.

1940년 2월 20일, 황옥청은 20여명의 전사를 이끌고 임무를 집행하고 밀영으로 돌아오던중 보청현 태평구에서 일본괴뢰《토벌대》를 만나게 되였다. 황옥청은 한면으로는 현장에서 적을 저격하고 한면으로는 사람을 파견하여 밀영의 동지들에게 전이하라고 전달했다. 몇배나 많은 적들앞에 황옥청은 침착하게 전사들을 조직하여 석굴로 후퇴했고 석굴을 리용하여 적들에게 사격하며 적을 견제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격전가운데서 황옥청과 그의 신변의 18명 전사들은 모두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인민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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