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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20] 3군ㅡ6군 녀전사 김벽영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23일 14:59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ㅡ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20)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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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에는 조선족녀전사 김벽영(金碧荣)이 활동하고있었다. 김벽영은 1936년에 겨우 15살밖에 안된데서 재봉대 녀전사들로부터 쑈진(小金儿)으로 불리였다. 1936년에 15살로 1922년 생이고, 흑룡강성 통하현 산구(通河县山里)출신이라는걸 보아 통하현 태생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통하현 조선사람들 거개가 오늘의 청하진(清河镇) 경내 대고동(大古洞)과 서북하(西北河)에 이민온 조선이주민들이고 그 시초이주가 1920년초라 할 때 더욱 그러하다. 김벽영은 청하진에 이주한후 태여난 조선이주민의 후예라고 함이 옳을듯 하다.

오늘의 통하현 청하진일대는 1928년 봄과 가을에 벌써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조선인혁명가 김지강(金志刚, 즉 崔镛健)과 김재연(金在渊), 장세진(张世振) 등이 선후로 나타나 활동하면서 서북하와 대고동 일대는 혁명의 기운으로 넘쳐난다. 1930년 가을에는 대중적추수투쟁 물결이 드세게 일어나고 1935년 봄에는 청하 서북하의 30여호와 대고동의 20여호 조선사람들이 통하일대에서 활동하는 항일부대ㅡ동북반일련합군에 참가하게 되니 지방에서 소선대원으로 활동하던 김벽영이 우리 당이 지도하는 항일부대에 참가한것이 이 시기의 일이 아닌가싶다.

대부분 조선족으로 구성된 주하반일유격대가 동북반일련합군ㅡ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개편된것은 1935년 1월의 일이다. 제3군은 건립된후 신속한 발전을 거치면서 산하에 전문 재봉대를 두어 군복문제 해결에 전력을 다하였다. 1935년 11월 이후 3군 재봉대는 통하현의 대고동과 소고동 깊은 산속에 설치된 밀영에 자리잡았다가 1936년 8월 1일 동북항일련군 제3군으로의 개편을 앞두고 소서림하(小西林河) 상류의 심산밀림속 로도묘골, 랑랑궁(老道庙沟娘娘宫)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로도묘골과 랑랑궁은 오늘의 이춘시 서림구에서 18킬로메터 되는 홍성촌 동남산 북쪽비탈(西林区18公里红星村东南山北坡山脚处)에 위치하고있으며 탕리천(糖梨川) 항일련군 3군 재봉대라고도 불리운다. 모아산밀영이라고도 한다. 3군의 후방류수처는 언녕 탕리천에 자리잡고있었다. 1936년 여름 항일련군 3군에서는 닥쳐올 겨울에 대비하여 동복을 해결하기 위하여 모아산으로 불리우는 심산속에 탕리천밀영을 새로 일떠세우게 되였다.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녀전사 김옥선의 해방후 회고에 따르면 재봉대의 최초 7명은 진정산(陈静山), 장의숙(张义淑), 곽숙진(郭淑珍), 리종부(李钟孚), 김호련(金浩莲)과 자기,후근일을 맡아보는 고씨(顾氏)라는 분 등 7명으로 알려진다. 3군 재봉대 관련자료를 보면 1936년 9월에 통하현에서 홍명숙, 김벽영, 장경숙, 김옥선, 장희숙, 박경숙(洪明淑、金碧荣、张景淑、金玉善、张熙淑、朴景) 등 녀전사들이 새로 재봉대로 오는데서 3군 재봉대 녀전사들은 15명으로 늘어난다. 이들 15명중 진경산 등 11명이 조선족녀전사로 알려진다. 김벽영이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에 참가한 진실한 력사기록이다.



2013년 10월 17일 오전, 항일련군 3군 재봉대 옛터ㅡ중공북만림시성위 탄생 애국주의교육기지 기념비 락성의식에서 이야기하는 김벽영의 생전전우이고 흑룡강성 정협 원 부주석인 항일련군 로전사 리민. 1936년 9월 18일, 중공북만림시성위가 설립되던 그번 《주탕련석회의》에 공청단북만성위 서기 황성식이 참가하였고 김벽영 등 3군 재봉대녀전사들은 그번 회의를 물심면으로 받들어 나섰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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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련군 3군 재봉대 출신인 김백문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절 재봉대 대장은 진경산, 당지부서기는 김백문이고 재봉대밀영은 3군군부와 수십리 떨어진 산속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재봉대밀영은 워낙 염씨성을 가진 염감독(闫把头)과 그보다 나이가 어린 30여세의 작은 감독(小把头)이 살아가는 산막이였다. 그들은 산막 주변에 약간의 뙈기밭을 일구어 옥수수와 호박, 감자 등을 심는 한편 수렵에 나서며 생계를 이어가고있었다. 재봉대가 그 자리에 간편한 귀틀집을 세우니 곧 재봉대밀영으로 자리를 잡았다.

김벽영이 처음 3군 재봉대에 참가할 때만 해도 재봉대에는 일본제 낡은 재봉기 한대뿐이고 재봉기를 다룰줄아는 사람도 대장 진경산 한사람뿐이였다. 김벽영 등 녀전사들은 진경산대장한테서 재봉기술을 부지런히 익히였다. 그런데 그 시절 3군부대에서는 만일을 고려하여 적들에게서 로획한 천이나 솜, 식량 등을 재봉대밀영에서 20ㅡ30리 떨어진 곳에 숨겨놓은데서 재봉대 녀전사들이 자기로 날라와야 하였다.

때는 한창 8월ㅡ9월이라 맡겨진 동복과업을 질적으로 제때에 완수하자면 시간을 다그쳐야 하였다. 눈 내리기전에 옮겨야 눈 내린후의 어려움과 눈우의 발자취로 인한 적들의 자취추적을 피할수가 있은데서 진정산대장은 동지들과 토의하고 20ㅡ30리밖 비밀거점의 천 등을 전부 옮겨오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로부터 김벽영 등 10여명 재봉대 녀전사들은 매일 한차례씩 왕복 수십리길에 나서면서 인당 식량 한주머니 아니면 천 몇필씩 지여 날라야 하였다. 나이 어리고 단련이 없는 김벽영은 처음에는 선배들만큼 지여나를수는 없었지만 차츰 적응되여 갔다. 어깨는 부어오르고 발에는 물집투성이여도 누구하나 어렵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1936년 9월 18일 소흥안령의 심산속에 위치한 탕리천 3군 재봉대밀영에서 주하-탕원 중심현위와 3ㅡ6군 당위 성원들이 참가한 《주하탕원련석회의》(珠汤联席会议)가 열리였다. 련석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되고 길동, 동만, 남만, 북만 4개 성위를 설립할데 관한 상급당의 지시와 당면한 정치군사정세, 조직에 대한 중대한 문제들이 토의되면서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련석회의기간 김벽영 등 재봉대 녀전사들은 회의참가자들의 주숙과 식사 등 후근일들을 전반적으로 맡아나서며 최선을 다하였다.

주하탕원련석회의에는 통하현 사람이고 공청단북만성위서기인 황성식도 참가하였다. 련석회의에서 중공북만림시성위가 조직되면서 황성식이 림시성위 청년부장으로 당선되였다. 의미로운것은 련석회의에 참가한 황성식(黄成植, 1918ㅡ1939)과 재봉대 녀전사 김벽영의 사랑의 인연이라 하겠다. 여러 자료들에서는 김벽영이 황성식의 련인으로, 후에는 안해로 등장하는데 둘다 통하현 사람이여서 원래부터 알고 련인관계로 지냈는지 아니면 련석회의에서 련인관계를 가지고 후에 부부관계로 발전하였는지는 알려지지가 않는다. 혹자는 1936년에 15살밖에 안되는 김벽영이 너무 빨리 련인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고개를 갸우뚱할수도 있겠지만 1930년대 그 세월은 남녀 15살 쯤이면 의례 결혼해야 하는 나이, 15살 정도를 넘기면 로처녀, 로총각으로 불리였음을 알아야 할것이다.



김벽영 소속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옛터 사진(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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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에 중공북만림시성위 청년부장 황성식은 중공하강특위 서기 중책을 짊어졌다. 중공하강특위(中共下江特委)는 송화강하류지구 항일운동을 지도하는 당의 기관으로서 1936년 9월 18일 주하탕원련석회의 결의에 의해 중공탕원중심현위를 개편하여 조직되면서 중공북만림시성위의 지도를 받았다. 중공하강특위는 하동(哈东), 상강(上江) 특위와 더불어 림시성위 산하 하나의 특위로 떠오르면서 특위아래에 가목사시위(佳木斯市委)와 탕원, 화천, 의란, 부금, 수빈(汤原、桦川、依兰、富锦、绥滨) 등 5개 현위를 두었다.

김벽영의 남편 황성식은 중공하강특위 서기로 부임한후 산하 가목사시 항일운동을 지도하다가 적들에게 발견되여 총상을 입었다. 황성식은 중공가목사시위 제1임서기 동선교(董仙桥)의 집에 머물렀으나 상처가 중하였다. 동선교의 부인은 황성식을 녀자로 분장시키고는 마차편에 가목사로 호송하였다. 가목사에서 다시 항일련군 6군의 조선족 서광해한테로 넘어가니 서광해는 황성식을 다시 쏘련쪽과 가까운 7군의 최석천에게 보내였다.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황성식은 1937년 겨울을 흑룡강너머 쏘련땅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젊은 안해인 김벽영은 남편의 치료과정을 두고 어떤 역할을 놀았는지 알려지는 자료가 전혀 않아 유감이기만 하다. 가목사시 작가협회 회원이고 교원출신이고 항일련군 녀전사 연구가인 교화(乔桦)와의 2015년 5월 1일 통화에 따르면 김벽영과 황성식 사이의 딸이 지금 흑룡강성 의란현 인가에서 생활하고있다고하니 김벽영의 결혼생활과 이왕지사가 적지 않게 알려지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지금 인터넷을 달구며 하나하나 략력으로 알리는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녀전사들》 자료에 의하면 김벽영과 리민은 1938년 9월 28일 6군 1사로 전근한것으로 알려진다. 실상 탕원현 오동하촌(梧桐河村) 출신인 리민(李敏,1924ㅡ)이 항일련군 6군부대에 참가한것은 1936년 겨울의 일이고 그후 인츰 배성춘을 재봉대 대장으로 하는 6군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하게 되였다. 리민 관련 글들이거나 개별적인 회고문, 리민회고록을 헤아리면 리민과 비슷한 또래 김벽영은 가장 미더운 친구로서 그와 더불어 1938년 9월 이전에 벌써 6군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함을 보이고있다. 김벽영이 3군 재봉대에서 6군 1사로 넘어온 1사밀영은 오늘의 보청현 과회산(宝清县锅盔山)에 자리잡은데서 과회요밀영이라고 한다.

2012년 12월 흑룡강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리민회고록에는 1938년 9월 이전에 김벽영이 이미 6군 1사 재봉대에 나타나고 리민과 함께 원래의 《산나물채집곡》에 자체로 지은 가사를 붙이고 배성춘대장 등과 함께 부르는 장면이 나타나며 1938년 5월의 어느날 6군 정위 장수전(张寿钱,즉 李兆麟)으로부터 총을 발급받고 좋아서 어쩔줄 모르던 장면이 나온다.

김벽영은 자기가 받은 한자반 가량되는 《테궁지》총을 들고 리민과 비기면서 리민의 《칠성자》총보다 더 좋다고 우쭐한다. 리민은 또 리민대로 권총보다 길고 단발배기인 《테궁지》보다 자기의 련발배기 《칠성자》가 더 낫다고 우긴다. 총에 대해서 외인인 그들은 교도대의 남전사들을 찾아 갑을을 가리기까지 한다. 그들 둘은 항일련군 녀전사라지만 필경은 10대 중반의 소녀들이였다.



김벽영 소속 항일련군 제6군 재봉대 옛터 사진(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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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보다도 이른 이해 음력설 경에 3군 재봉대 당지부서기로 활동하다가 잠시 북만성위 비서처에서 일을 보게 된 김백문은 무슨 원인인지 온 얼굴에 누런 물이 흐르는 부스름으로 번져갔다. 그때를 두고 김백문은 한편의 회고문에서 누런 물이 어디로 흐르면 어디에서 부스럼이 생겨나면서 나중에는 두눈까지 덮을 기세로 말이 아니였다고 회고하였다. 심산속에서 먹을것도 얻기 어려운데 약품은 더구나 볼수도 없어 부스럼은 보다 기승을 부린다. 한번은 적토벌대와 조우하게 되였지만 두눈이 보이지 않아 동지들이 깊은 산속으로 내뛸 때 김백문은 전우들의 소리를 따라 달릴수밖에 없었다.

조직에서는 김벽영을 찾아 상의하고 김백문을 통하현 산구의 김벽영 집으로 보내였다. 마침 김벽영의 집에는 항일의식으로 꽉찬 벽영의 부모와 녀동생까지 있어 시름놓고 지성어린 보살핌을 받을수가 있었다. 병영의 어머니는 마땅한 약이 없다고 맥을 버린것이 아니라 매일 소금물로 온 얼굴의 부스럼을 깨끗히 소독하여주는한편 산에 가서 까마귀열매(老鸹眼)를 뜯어다가 물과 함께 끓이며 그 물로 부스럼부위를 부지런히 닦아주었다. 또 까마귀열매나무 뿌리를 캐다가 불에 쬐이면서 내돋는 물로 얼굴을 발라주었다.

한달이 푼히 흐르자 김백문의 부스름은 개끗히 나아져 조선족녀전사는 다시 동지들의 신변으로, 성위비서처로 돌아갈수 있었다. 이는 북만 항일련군부대의 치료미담으로 지금까지 널리널리 전해오고있다.

김벽영은 6군 재봉대에서 재봉대대장 배성춘언니와 리민과 장옥춘(张玉春)과 넷이서 군복짓기를 도맡았다. 배성춘대장이 재단하면 김벽영 등 셋은 부지런히 재봉기를 돌리였다. 교도대의 남전사들은 염색하고 널어서 말리우는것을 책임졌다. 재봉대 녀전사들은 군모만들기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그 어려움이란 붉은 오각별을 만들 붉은 천이 없는데 있었다.

그시절 부대전사들은 총이 령험하다면서 권총을 붉은 천으로 싸기를 즐기였다. 김벽영 등 재봉대 녀전사들은 그들에게 붉은 천을 내주기를 바랐지만 전사들은 보배처럼 아끼는 권총용 붉은 천을 쉽사리 내놓으려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동원으로 부분히 내놓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붉은 천은 태반이나 모자라서 적지 않은 군모에 붉은 오각별을 댈수가 없었다.

1938년 5월 6군 군부에서는 배성춘이 이끄는 6군 재봉대 동지들을 모두 군교도대에 편입시키였다. 군교도대는 군부와 함께 행동하는데 2개 중대로 무어진 군교도대의 당지부서기는 배성춘이였다. 김벽영은 재봉대를 따라 군교도대에서 활동하면서 오동하반(梧桐河畔)의 로등산(老等山)에 가서 부대의 서정을 후원하여 나섰다. 그들의 후원사업은 주로 서정부대를 위해 탄띠와 모자, 각반 등을 깁는 일들이였다.

그해 8월과 9월사이 김벽영 등이 믿고 따르는 배성춘이 6군 1사의 후근처 책임자로 전근하게 되였다. 군교도대의 류수인원들인 김벽영 등 한패의 동지들은 배성춘을 따라 보청현의 과회산 과회요(锅盔山锅盔窑)밀영으로 가서 6군 1사 정치부주임이고 조선사람인 서광해(徐光海)의 소부대와 만났다. 과회요밀영은 과회산의 동남쪽에 위치한 6군 1사의 밀영으로서 1937년 여름에 건립되여 줄곧 리용되고있었다. 6군 1사 사장 마덕산(马德山,본명 金乘浩)도 조선사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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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겨울은 북만 항일련군투쟁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로 기록된다. 적들의 그칠줄모르는 참빗질(篦梳)토벌앞에서 심산속의 밀영들은 하나 또 하나 파괴되여 말이 아니였다. 그때 6군 군부에서는 과회요밀영의 재봉기를 망라한 모든 물건들을 감추고 즉각 전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였다. 6군 1사 정치부주임 서광해와 배성춘은 밀영의 20여명의 소부대를 이끌어 보청현내의 장가요(张家窑) 쪽으로 전이하였다.

김벽영 소속 소부대는 세찬 눈보라속에서 하나 또 하나의 산을 넘다가 장가요의 산봉을 가까이두고 적정을 발견하였다. 그날은 1938년 11월 23일이다. 마동무(小马)가 금방 산정에 오른 놈한테 덮치다가 키크고 우람진 놈에게 도로 깔리였다. 류패장(刘排长)이 마침 이르러 총 한방을 먹이자 놈은 그자리로 뻐들어졌다. 찰나 마동무는 적의 시체를 음페물로 삼고 첫방에 군도를 휘두르는 놈을 거꾸러뜨렸다. 300여명의 적들이 산마루를 차지하려고 아득바득 달려들었다.

서광해는 지형부터 살피였다. 서쪽은 현애절벽이고 남쪽은 눈으로 덮힌 골짜기, 동산쪽에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있어 음페할수가 있었다. 서광해는 배성춘한테로 기여가 일부를 데리고 동산쪽을 에돌아 북산쪽에서 적들을 습격하겠으니 먼저 적들을 막아내다가 북산에서 총성이 울리면 동산으로 철거하라고 말하고는 10여명을 이끌고 동산쪽으로 짓쳐나갔다.

이윽고 동산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적들의 주의력은 동산에 쏠리였다. 배성춘이 재봉대녀전사들더러 탄알을 아끼라고 할 때 마동무가 허리에서 수류탄을 끄집어내여 가까이 다가든 적들을 향해 뿌리였다. 또 련속 2개의 수류탄을 안기자 적 10여명이 무리로 뻐드러지며 기관총이 벙어리가 되였다. 마동무가 세번째 수류탄을 뿌릴 때 적탄이 그만 그의 복부를 관통하였다. 마동무는 피못에 쓰러지면서도 곁의 리민에게 적들과 싸워가라고 나지막한 소리를 남기였다.

이날의 전투를 장가요(张家窑)전투라고 일컿는다. 적들의 기관총이 벙어리가 되자 류패장이 재빨리 굴러내려가 기관총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다. 배성춘의 권고하려고 할때는 이미 늦어 여러 사람들은 화력을 집중하여 류패장을 엄호하였다.기관총가로 다가간 류패장이 기관총을 잡으려는 순간 적들의 집중화력이 그한테로 쏟아졌다. 조금 지나 류패장이 다시 기관총을 잡으려고 서두를 때 적들의 집중사격이 다시 시작되였다. 류패장은 다시 움직이지 못하였다.

분노한 배성춘이 희생된 동지의 원쑤를 갚자며 주변의 전사들을 이끌어 적들의 몇차례 진공을 물리쳤다. 동산쪽으로 짓쳐나간 서광해주임 쪽에서도 적들의 포위에 들어 전투가 자못 치렬하였다. 아군의 두 진지에서는 적들과 생사판가리 싸움을 벌리였다.

김벽영도 이 생사판가리 싸움의 한 전사였다. 어느 순간 탄알이 떨어지자 김벽영은 배성춘대장한테 탄알을 다 써버렸다고 나직히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성춘은 다가드는 적들을 족치라고 높이 소리쳤다. 우리 전사들이 마지막 탄알을 다 써버리자 적들은 포복전진으로 한걸음한걸음 다가들었다. 적들이 40메터 쯤까지 다가들자 배성춘의 명령과 함께 김벽영은 등은 마지막 수류탄으로 선두에 몰킨 적들을 물리쳤다.

적들은 삼면으로 다시 조여들었다. 탄알과 수류탄까지 전부 써버린데서 배성춘은 《빨리 남산으로 퇴각하라!》고 지시하였다. 재봉대의 녀전사들이 산을 오르던 길을 따라 산아래로 퇴각할 때 김봉숙(金凤淑)녀전사가 앞에서 그들을 이끌고 배성춘이 뒤에서 동지들을 엄호하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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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숙은 옆에 선 리민을 보고 앞에서 눈길을 헤치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눈이 무릎을 치는데서 리민은 몇걸음 나아가지 못했는데 뒤쪽에서 동정(动静)이 알리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며 동지들을 부르려는데 적탄이 마구 날아든다. 눈우에 넘어진 리민은 눈앞의 개암나무숲으로 기여가다가 눈구덩이에 뛰여들었다.

리민은 눈구덩이속에서 적들과 생사결단을 내자는 배성춘의 웨침소리를 너무나도 똑똑히 들었다. 그 웨침소리는 곧 적들의 총성과 함께 사라졌다. 적들은 물러가고 어둠이 몰키였다. 마동무, 류패장, 배성춘 큰언니가 희생되였다면 김봉숙, 김벽영 등은 어떻게 되였을가? 홀로 남은 리민은 눈구덩이속에서 기여나와 가까이에 쓰러진 키다리 녀전사와 배성춘을 차례로 안으며 울다가 별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밤을 헤치기 시작하였다.

그뒤 천신만고로 대오를 다시 찾은 리민은 뒤늦게야 마동무, 류패장, 배성춘 등 동지들외에도 동산쪽으로 나간 조선족 서광해주임 등도 장렬히 희생되고 김벽영, 장옥춘(张玉春), 김봉숙(金凤淑), 심영신(沈英信) 등은 포위를 돌파하다가 불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1938년 11월 23일 이날의 김벽영 등 체포과정과 적들에게 끌리여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필자는 여태 모르고있었다. 이 과정을 알고있는 항일련군 녀전사 연구가이고 가목사시 작가협회 회원인 교화를 여러모로 찾다가 딸애의 도움으로 2015년 4월 30일 밤 드디여 직접 통화를 가질 기회를 가지였다. 교화는 자기가 직접 수집정리한 《김벽영 체포되여 적기가를 부르다》 한편과 관련 정리자료들을 사심없이 보내주어 심한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 교화의 《김벽영 체포되여 적기가를 부르다》항일련군 관련 자료의 몇구절을 그대로 옮기여 본다.

1938년 11월 23일 적들의 토벌에서 벗어나고저 항일련군 6군 재봉대 대장 배성춘(裴成春)은 뼈를 에이는 설한풍과 온 하늘에 흩날리는 눈을 무릅쓰고 오동하(梧桐河)를 떠나 보청현(宝清县)으로 전이하고있었다.리민과 김벽영이 이 소부대속에 섞이였다. 기아에 허덕이던 전사들이 보청현 장가요(张家窑)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양청매(杨青海)가 이끌며 토벌에 나선 위만군 35퇀과 조우하게 되였다. 그번 혈전에서 항일련군 6군 재봉대 대장 배성춘 등 여러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고 김벽영 등 4명 녀전사들이 체포되였다. 리민은 눈구덩이속에 떨어진데서 살아날수가 있었다.

양청매 무리들이 김벽영 등 4명 녀전사들을 압송하는 도중 김벽영 등 네 자매들은 《적기가》를 높이 불렀다.

……

적기가의 노래소리는 산곡간에 울려퍼지면서 양청매 등 위만군 병사들의 마음을 크게 울리였다. 아직 량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위만군들은 당당한 오척남아도 보가위국을 생각지 않고 몇사발 수수밥에 매달려있으니 저 녀인들보다 못하다고 개탄하면서 반란할 생각까지 가지였다.

김벽영 등 4명 녀전사들의 견강함이 보여준 거대한 항일의 힘이였다. 《항일련군 3군 재봉대의 녀전사들》 관련자료에 따르면 김벽영은 적들에게 체포되여도 굴강하게 싸웠고 나중에 적들에 의해 무기형을 선고받았으며 남차감옥(南岔监狱)에 투옥되였다가 옥중에서 빛나는 생을 마감지었다. 김벽영의 생전 친밀한 전우인 리민도 김벽영은 후에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관련회고를 남기였다. 김벽영의 남편 황성식은 1939년 6월 학북 로등산(鹤北老等山)으로 가는 도중 한차례 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2015년 5월 1일 정리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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