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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림기획련재-8] '황제보살'을 위해 설법한 고구려의 승랑(僧朗)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6.01.25일 13:46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사찰로 통한 대문은 뭔가를 감추려는 듯 꽁꽁 닫혀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풍경구의 입구를 이용해야 한단다. 사찰은 서하산(栖霞山) 풍경구의 일부로 되고 있었고, 따라서 사찰로 들어가려면 25위안을 내고 풍경구의 티켓을 구매해야 했다.


  "억지라도 이런 억지가 있어요?" 일행 중 누군가 부르튼 소리를 했다. '억지 춘향'의 이상한 모양새로 되었다는 것이다.

  옛말에 "맞기 싫은 매는 맞아도 먹기 싫은 음식은 먹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찰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풍경구의 관광객이 되어야 했다. 어쩌면 서하사(栖霞寺)의 덕분에 "뽕도 따고 님도 보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호사가 아닐지 모른다.

서하사를 울긋불긋 물들인 가을단풍



  실제로 서하산 풍경구의 백미는 산의 이름처럼 노을이 물든 단풍이라고 한다. 일행이 탑승했던 택시의 기사는 현지 태생이었는데, 언제인가 가족과 함께 일부러 서하산을 찾은 것은 단풍 구경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청(淸)나라 때 건륭(乾隆) 황제도 서하산의 이 단풍을 찾아왔다. 한때 서하산 동쪽 봉우리의 부근에는 건륭 황제의 행궁이 있었다. 건륭의 남방 순시에서 사용된 여러 행궁에서 제일 큰 행궁이다. 건륭 황제는 6차의 남방 순시에서 선후로 5차에 걸쳐 45일 서하산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서하산을 '금릉(金陵)의 제일 아름다운 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금릉은 강소성(江蘇省)의 소재지 남경南京의 별칭이다.

  금릉이 옛날 부근의 산에서 따온 성읍의 지명이라면 '서하산'은 도장의 이름에서 따온 옛 지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보다 도장이 먼저 생겼다고 하는 부질없는 얘기가 아니다. 원래 산은 약재가 많아 섭생(攝生)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섭산(攝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남조(南朝, 420~589) 시기 명승소(明僧紹)가 섭산에 있는 그의 거소를 '서하정사(栖霞精舍)'로 명한다. 명승소는 산동(山東) 사람으로 한때 정직랑(征直郞), 참군(參軍), 정원외랑(定員外郞) 등으로 있었으며, 이 때문에 또 '명정군(明征君)'이라고 불렸다. 명승소는 그와 가깝게 보내고 있던 선사(禪師) 법도(法度)를 청해 정사에 머물면서 예불(禮佛)하게 했다. 이 도장이 동네방네 소문을 놓게 되면서 도장이 자리하고 있는 산은 서하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

서하사 정문에 서있는 코끼리 동상



  길 양쪽에 늘어선 석등(石燈) 모양의 장식물이 사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 버티고 서있는 동상(銅像)이 유달리 눈길을 끌고 있었다. 여느 사찰과 달리 사자가 아닌 대상(大象, 코끼리)이었기 때문이다.

  "'대상(大象)은 무상(無象)'이라고 했으니, 이 코끼리 조각물은 '가장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는 도(道)를 말하려는 걸까요?"

  기실 코끼리는 덕망과 위용을 상징하는 것으로 석가모니의 태몽으로부터 불교와의 인연을 시작한다. 그러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하나의 물음표가 홀연히 떠올라서 발부리에 걸리고 있었다. 산문(山門) 밖에서 '수항정(受降井)'이라고 하는 괴이한 이름의 우물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명정군'을 기리여 당(唐)나라 때 세운 비석은 바로 이 우물가에 서있었다. '명정군' 비석은 남경에 잔존한 당나라 시기의 제일 큰 비석으로 고종(高宗)의 어서(御書)가 씌어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명정군이 마시던 우물이 수항정이라니



  그건 그렇다 치고 수항(受降)이라고 하면 항복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다면 명승소가 정사를 세울 때 누군가에게서 그 무슨 항복을 받을 일이 있었던가…

  한참이나 빗나간 생각이었다. 수항정에 있는 안내문은 왕창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민국(民國) 34년(1945) 8월, 국민정부가 본국으로 송환할 일본군 포로의 일부를 서하사에 집중시켰는데, 그때 포로들이 식수용으로 이 우물을 팠으며 그래서 지은 이름이 '수항정'이라고 한단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중일전쟁 때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 포로와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이로 인해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 약 30만 명의 중국인이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다. '수항정'은 실은 약 80년 전 남경에 있은 피비린 기억을 땅에 유물로 깊숙이 파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찰의 천 년 전의 옛 기억은 폐허에 묻히고 상당 부분이 발굴, 복구되지 않고 있는 듯 했다.

  객당(客堂)에 있던 각준(覺俊) 장로는 승랑(僧郞) 대사의 위패에 참배하러 서하사에 일부러 왔다고 여쭈었더니 대뜸 사찰 뒤쪽의 웬 법당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장로의 뒤를 따라섰더니 이 법당은 신도와 사찰에 있던 승려들의 위패를 봉안(奉安)하고 있는 추모의 시설이었다.

  보아하니 서로 한심한 엇박자를 만들고 있었다. 장로는 승랑 대사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장로님, 승랑 대사님은 이 사찰의 옛날의 주지스님이라고 하던데요."

  그러자 각준 장로님은 "아차!" 하더니 금세 미안한 기색을 짓는다. 우리가 미구에 당도한 곳은 조사당(祖堂)이었다. 조사당은 객당(客堂)의 바로 맞은쪽이니 한 바퀴 빙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런데 또 헛걸음을 해야 했다. 어둔 조사당에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아서 위패의 이름을 읽을 수 없었다. 이윽고 각준 장로님은 손전등을 찾아들고 다시 조사당에 들어왔다. 사찰의 역대 조사(祖師)의 위패는 그렇게 약간 굴곡적인 길을 걷게 만든 후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진신을 드러냈다.

손전등 불빛으로 조사당의 위패를 밝히고 있는 각준 장로



  선대(先代)의 40여명 주지와 고승을 열거한 위패에서 승랑의 이름은 인차 눈에 뜨이지 않았다. 잠깐 후의 일이지만, 승랑은 위로부터 세 번 째 줄에서 오른쪽으로 열한 번 째 자리에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는 너무 뒤로 밀린 위치였다. 이름 못할 아쉬움이 조사당의 어둔 그림자처럼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승랑은 한국 불교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 삼론종 창설의 선구자로 중국 불교사에도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다른 건 잠시 제쳐놓더라도 승랑은 그때 그 시절 일명 '황제보살'이라고 불리는 독실한 불자 양무제(梁武帝, 464~549)에게 설법하여 소승(小乘)을 버리고 대승(大乘)으로 돌아서게 했다고 하니 그의 막강한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승랑은 고구려 20대 왕 장수왕(長壽王, 394~491) 후기에 요동에서 태어났고 30세 때 내륙으로 건너와서 명승 승조(僧肇, 383~414) 계통의 삼론학(三論)學을 공부했다. 그는 대륙 서쪽의 돈황(敦煌)까지 가서 담경(曇慶)으로부터 삼론을 배웠고 또 대륙 남쪽의 회계산(會稽山)에 있는 강산사(岡山寺)에 머무르기도 했다.

  삼론학은 '3론' 즉 《중론(中論)》,《백론(百論)》,《십이문론(十二門論)》을 널리 내세움으로써 얻은 이름이다.

  유감스럽게도 승랑의 생몰일 연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가 나중에 왜서 고구려로 귀국하지 않았는지도 풀 수 없는 천년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승랑의 자세한 구법 노선도 역시 베일에 가려 있다. 혜교(慧皎, 497~554)의 《고승전(高僧傳)》 등에 수록된 승랑과 관련한 내용들은 거개 단편적인 내용들이다. 그러나 승랑이 고구려의 요동 일대부터 내륙으로 이어지는 육상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했다는 추론은 여전히 가능하다. 당시 고구려와 중원의 여러 나라가 바닷길은 물론 육로를 통해 서로 인적, 물적 왕래를 했던 기록은 많은 고대 문헌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승랑의 저술은 현존하지 않지만, 길장(吉藏, 549~623)의 저술 등 중국과 일본에 현존하는 삼론관계의 문헌들에 그의 논설이 적지 않게 인용되고 있다. 길장은 승랑에서 시작한 일가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로 '삼론종학'을 크게 완성하여 삼론종의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삼론종은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諸法性空)"는 설을 거듭 천명하기 때문에 '법성종(法性宗)'이라고도 불린다.

  각설하고, 승랑은 양무제의 초청을 마다하고 수도 건강(健康, 지금의 남경)의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서하산에 은둔했다. 이때 그는 초대 주지(住持) 법도(法度)를 스승으로 모시며 법도가 원적(圓寂)한 후 그의 뒤를 이어 서하사의 주지를 맡았다고 전한다. 천감(天監) 12년(512), 양무제는 당시의 승정(僧正)이었던 지적(智寂)을 비롯하여 승전(僧詮) 등 고승 10인을 특별히 선발, 파견하여 승랑의 가르침을 받게 한다. 승랑의 학설은 승전(僧詮)으로부터 훗날 삼론종의 대사로 된 법랑(法郞, 507~581)으로 이어지는데, 법랑의 후계자가 바로 삼론종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길장이었다.

  궁극적으로 서하사는 강남 불교인 '삼론종(三論宗)'의 발원지로 거듭나며,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 대륙의 4대 명찰의 하나로 되었다. 사찰에 당나라 황제의 친필 글씨가 남아있을 법 한다. 그런데 삼론종의 초조(初祖)이자 사찰의 제2대 주지인 승랑의 이름이 조사의 위패 명부에서 뒤로 밀려 있다는 게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운한 일은 또 뒤를 잇고 있었다. 아니, 서운하다고 하기보다 못내 쓸쓸하기까지 했다.

  사찰의 뒤쪽에는 산에 기대어 만든 '천불암(千佛岩)'의 유적지가 있다. 집계에 따르면 천불암에는 294개의 불감(佛龕)과 515존의 불상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불감에는 주불 1존이 있으며 주불 양쪽에 제자거나 보살이 보좌한다.

  각준 장로는 이 가운데서 제일 유명한 불상은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미타불)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무량수불은 대좌(臺座)까지 합치면 10미터가 넘는다고 하는데요, 천불암에서 제일 큰 불상이지요."

부처님과 대화하시겠어요, 이 전화를 사용해주십시오.



  명승소가 운명한 후 그의 아들과 선사 법도는 먼저 암벽에 무량수불을 파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에 앞서 법도는 사찰에서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여러 번 강설했는데, 이 경전은 무량수불이 중생의 서원(誓願)을 인도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완성된 불감에서 난데없는 광채가 뿜겨 나왔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의 귀족, 선비들이 저마다 달려와 산의 바위에 불감을 만들고 불상을 새겼다고 《서하사비(栖霞寺碑)》가 기록하고 있다.

  그맘때 서하정사에서 수행에 정진하고 있던 승랑은 모름지기 천불암의 탄생을 상당 부분 현장에서 지켜본 최초의 견증자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천불암의 불상은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이 대륙을 휩쓸던 기간 사찰과 함께 크게 훼손되었다. 불감에 옹립되고 있던 불상들은 적지 않게 머리가 뎅강 잘려나가는 등 전례 없는 법난(法難)을 당했던 것이다.

  건륭은 천불암 불상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은 마지막 황제였다. 또 서하산의 단풍도 구경할 수 있었으니 과연 황제다운 호화스런 행운이렷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기거했던 화려한 행궁은 뒤이어 함풍(咸豊) 연간의 전란에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서하산은 행궁이나 사찰이 아닌 단풍으로 중생들의 단체기억에 남으려고 작정을 한 듯하다.

불호를 외우며 사리탑을 돌고 있는 신도들



  천불암에서 내리는데 신도 여럿이 불호(佛號)를 외우면서 사리탑을 돌고 있었다. 이 사리탑은 남당(南唐) 시기의 유물로 서하사에서 제일 가치가 있는 옛 건물이라고 한다. 또 장강 남쪽에서 제일 오랜 옛 석탑의 하나라고 전한다.

  팽이처럼 사리탑을 돌고 있는 신도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섰는데, 그들 중의 누군가 자기들의 대열에 함께 들어서라고 권한다.

  "우리처럼 탑을 세 바퀴 돌면 한해 내내 평안하다고 하지요."

  미상불 사리탑은 본의를 떠나 미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듯 했다. 불자들의 참선과 수행의 참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난데없는 허망(虛妄)의 세계가 마치 눈앞의 탑처럼 허공을 꿰지르고 가슴 깊이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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