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사범 78기 졸업생 한어반 동창들이 경건한 모습으로 중문으로 된 시 ‘상봉’을 낭송하고 있다.
(흑룡강신문=칭다오) 박영만 기자=흑룡강성과 내몽골 등 지역에서 조선족교사들의 요람지로, 황포군관학교로 불리우는 오상사범학교 제1기 졸업생 동창모임이 38년만에 처음으로 아름다운 해변도시 칭다오시에서 감격스레 진행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1976년 흑룡강성, 내몽골 등 지역의 50여 개 시, 현에서 고향을 떠나 오상사범으로 100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각 기층당지부에서 추천하고 시험을 거쳐 입학해야 하는 특별한 시대가 낳은 특별한 인물들이었다. 2년뒤 이들은 대부분 인민교사의 신분으로 교단에 올라 평생을 민족교육에 헌신해왔다. 그 100명이 이제는 92명으로 남아 이번 칭다오모임에 45명이 전국 11개 성과 시, 한국 등지에서 모든 것을 제쳐놓고 칭다오에 모여 첫 동창모임을 하게 된 것이다.
“철수 동무요.“
“아, 니 안순옥이구나.”
“김명화, 반갑소.”
20일 오후 4시부터 칭다오시 청양구 신라호텔 로비에서는 제1기 졸업생들이 서로 인사하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수시로 볼 수가 있었다.
“인생에서 38년이 한번은 있을 수 있겠으나 두번의 38년은 쉽게 오지를 않습니다. 비록 짧은 이틀간이지만 그간에 쌓인 모든 그리움과 회포를 실컷 풀면서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노래하면서 마음껏 웃어봅시다.”
이번 모임의 주비위원회 조장으로로 나선, 일찍 가목사시교육국에서 근무하였던 이철수 동창의 이 개막사는 처음부터 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어갔다.
이어 당시 3개 반중의 조문반 김금애 부반장, 수학반의 군중 대표 정국남씨의 격정에 넘치는 발언이 있었다. 한어반은 김병찬 당시 반 당지부서기의 지휘하에 한어반 학생 전원이 중문으로 된 시낭송 ‘상봉’을 선보였다.
이들의 발언은 어느덧 사람들의 사유를 40년전으로 이끌어갔다.
1976년 당시 오상사범은 목단강시에 있었다. 목단강시조선족중학교에 임시로 자리잡은 사범학교는 교실이며 숙소며 식당이며 모두 소박하고 간고한 형편이었다. 게다가 입학해서부터 학교는 오상으로 이주하는 대변혁 시기에 직면해 있었다. 목단강시로부터 오상이라는 낯설은 곳에 자리를 옮기에 되었다. 당연히 수많은 곤난과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모두가 순리롭게 졸업하였다. 졸업한 후 대부분은 학교 및 교육관리부문에서 핵심골간 역할을 했을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업성과들을 따내 민족교육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여왔다.
그 사이 각 반 차원에서 몇번씩 만나기는 했지만 전체 78기 졸업생들이 한꺼번에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졸업 38년이 지난 오늘 씩씩했던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흰머리, 흰수염에 60세를 넘어 칠순을 바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격동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수학반의 김종근 동창은 수술을 받은지 한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창모임 소식을 듣자 즉시로 비행기표를 예약하여 손꼽아 기다려 오늘 이 자리에까지 왔다고 한다.
이번 동창모임의 준비위원회 대표인 이철수, 김병찬, 이익선, 안순옥 ,장계숙, 김명화, 남철산 등 동창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서 이번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가 있었다.
21일 이들은 통일복을 입고 버스에 올라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대교인 교주만해상대교를 지나 금사탄해수욕장, 해저 82.8미터에 놓여진 해저터널, 잔교, 5.4광장 등 칭다오의 명승지를 관광하면서 기쁨의 회포를 나누었다.
수학반 정국남 동창의 말대로 교단에 올라 첫 10여 년은 교육사업에 충성하면서 시집장가도 가야 했고 그다음 10여년은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들을 키우면서 공부도 시키느라 고생했고 마지막 10여년은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랴 귀여운 손주들을 돌보랴 38년이 후딱 지나가버렸다고 하는 말에 모두들 동감을 표시했다.
“자 이제 우리는 첫째는 건강, 둘째도 건강, 오로지 건강만 챙기면서 좋은 동창들과 자주 만나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보냅시다.”
23일 오전 38년만에 만난 동창들은 건강을 주제로 덕담으로 주고받으면서 2년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