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부터 막강한 자금력을 내걸고 야심차게 시작했던 중국축구, 뛰여난 외국인선수들의 영입과 국내 선수들의 육성을 동시에 진행한 중국축구는 광주항대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함께 아시아 축구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최근 슈퍼리그의 대량 구단들의 파산위기와 더불어 중국 국가팀이 2022 까타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가장 약체로 여겨졌던 웥남팀에마저도 일격을 당해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되며 거액의 년봉을 받았던 귀화선수들과 중국축구협회의 야심찬 ‘귀화작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국축구가 외국인선수의 ‘귀화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19년이다. 중국축구협회와 광주항대구단이 주도한 ‘귀화작전’은 당시 국가팀 감독이였던 리피의 동의로 시작됐다.
2019년 중국계 노르웨이 출신의 후영영과 중국계 영국 출신의 리가가 북경국안팀에 입단하면서 최초의 귀화선수가 됐고 광주항대팀이 이후 2년동안 총 7명의 선수를 귀화시켰다. 지금까지 귀화선수는 11명으로 늘어났고 그중 5명은 중국계 선수들, 나머지 6명은 국제축구련맹 규칙상 5년간 현지 체류를 거친 외국인선수들이다.
한편 지금까지 국가팀에 발탁된 선수는 6명이다. 2019년 월드컵 예선에서 리피 감독이 리가와 엘케손을 처음 국가팀에 불렀고 2021년 예선이 재개되자 강광태, 알랑, 락국부, 페르난지뉴까지 국가팀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사실상 지금까지 아시아 나라들에서 귀화선수로 국가팀 기량을 급성장시키려 노력한 것은 중국뿐만은 아니였다. 가장 일찍이 ‘귀화작전’을 단행한 일본을 포함해 최근에는 윁남과 필리핀도 혼혈 및 귀화 선수를 대량 영입했다. 2022 월드컵 개최국인 까타르는 아예 귀화선수 6명을 중심으로 팀을 꾸며 월드컵 본선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아시아 축구의 ‘귀화바람’은 다수가 즉각적인 효과로 나타나지는 못했고 또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그것은 축구는 선수들의 개인 기량도 중요하지만 원팀으로 뭉치는 조직력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였다.
까타르도 귀화선수들의 활약으로 최근 일정한 성적을 냈지만 국내 선수들과의 화학적 결합에 문제가 생기자 정체성을 위해 외국인 유망주를 조기에 귀화시킨 뒤 자국에 동화시키는 방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중국축구의 이번 ‘귀화작전’을 완전한 실패로 귀결하는 가장 큰 문제도 바로 선수들의 정체성이다. 1989년 브라질 출신의 라모스를 귀화시키면서 이 정책의 선두 주자였던 일본, 당시 귀화선수들은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고 일본인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알렉스와 같은 선수들은 중, 고교 과정을 거치며 일본 교육을 받았고 자신의 뿌리 중 하나로 일본을 인식하고 있었다. 라모스 역시 겉모습만 브라질인이지 하는 행동과 생각은 일본인과 다를바 없었다.
반면 중국의 귀화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국적은 중국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외국인의 범주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선수들이였다. 그저 중국에서 4~5년 정도 뛰며 실력을 검증받았던 선수들일 뿐, 정신적인 측면에서부터 진짜 자국 선수로 가꿔나가는 계획성이 없었다.
중국의 귀화선수들을 살펴보면 국적 변경을 금전적인 대가로 결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시장가치 이상의 년봉과 보상을 받았다. 또 이들은 중국의 생활이나 문화에 동화되려고 하지 않았고 특히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이는 귀화를 추진한 중국축구협회나 팬들 뿐 아니라 동료 선수들 립장에서도 이들을 원팀이라고 보기에 힘들었다.
아쉬웠던 기억도 뒤로 한 채 중국축구의 ‘귀화선수 시대’는 어느덧 력사속으로 저물어가고 있다. 대부분 귀화선수가 중국을 떠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그래도 지난 몇년간 중국축구협회가 시도한 ‘귀화작전’ 경험을 통해 겪었던 시행착오와 노하우들을 거울삼아 앞으로 중국축구의 발전을 위한 자양분으로 귀하게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냥 실패로만 귀결하기에는 너무도‘비싼’ 경험이기 때문이다.리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