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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피는《장백산》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0.11.03일 10:34
-《장백산》잡지 창간 30돐 맞으며

○ 장백산잡지사 사장 주필 리여천

《장백산》잡지 창간 30주년을 맞으며 항상 우리한테 도움을 주신 각계 지도자 여러분들과 국내외 지성인, 동인, 작가, 독자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우리말 대형문학지《장백산》잡지는 1980년 5월 1일에 유서깊은 황성옛터 통화시에서 창간하여 지금까지 장장 30년이란 긴 세월을 걸어왔다. 첫 창간호가 고고성을 울리면서 올해 5호까지면 총 173호가 된다.

초창기에는 사무실도 없고 전문편집도 없고 재정보장도 없는 상황이였기에 장백산은《들가방편집부》로 첫 걸음마를 떼고 모든 간난고초를 겪으면서 오랜 세월을 걸어왔다. 지금도 걸어온 30년을 돌이키면 가슴이 벅차난다. 장백산의 30년은 창업의 30년이였고 간난의 30년이였으며 또한 성과가 빛나는 휘황찬란한 30년이였다.

처음에는 통화시 문련의 중국어잡지인《장백산》의 이름을 빌어서 내부 계도간행물로부터 1983년에는 정식공개간행물로, 지금은 길림성 10대 우수간행물, 북방지역우수간행물, 국가출판총서에서 인정한 쌍효간행물로 성장했으며 2005년에는 전국 3만개 간행물가운데서 평심한 백종중점간행물의 하나로 되였으며 우리말 간행물뿐만아니라 소수민족문자로 출판하는 간행물중 제일 인기있는 잡지로 평가받으면서 국가 핵심간행물로 되였다.

처음에는 통화시 문련소속의 내부간행물로부터 1990년 4월에 장춘으로 들어오면서 선후로 성작가협회, 성민족사무위원회에 소속이 되였다가 2004년에는 길림일보그룹에 소속이 되였다.

류화현의 선전부 간부과장으로 있던 남영전선생은 중국어로 시를 창작하는 분이였지만 조선족문인들의 고초를 헤아리고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고저 과감히 발벗고나서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장백산》을 창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로심고초를 아끼지 않았다. 그이는 여러번 승진할 기회가 있었고 북경으로 전근할수 있는 기회가 차례졌지만 동요 한번없이 김택원선생님과 같이 장백산을 창간하고 예쉰이 넘어서도 2년이나 더 현직에 있으면서 장장 30년동안 장백산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 하셨다. 창시자중의 한분인 김택원선생은 남사장의 든든한 조수가 되여 밤낮이 없이 일하시다가 아쉽게도 1995년 어느 날 오전까지 출근을 했다가 피로로 하여 오후 다섯시즈음에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 그이는 잡지사에서 장장 20여년동안 심혈을 몰부은 분이다.

초창기에 우리는 통화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는 보조금 2000원을 가지고 잡지를 만들어야 했으며 김택원선생은 자기의 장끼를 발휘하여 번역을 해서 번역원고료를 무료로 잡지사에 들여놓고 행정비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84년 정식으로 편제를 가지면서 리여천선생과 김수영선생이 선후로 잡지사로 전근이 되였고 김수영선생은 퇴직한 후에도 칠순이 되도록 10년이나 더 출근을 하셨으며 역시 일생을 다 잡지사사업에 바친 분이시다. 리여천선생은 28세 호시절에 잡지사에 들어와서 인생의 제일 좋은 황금시기를 잡지사사업에 의바지하였으며 지금까지 여전히 27년이란 긴 시간을 잡지를 위해 분투하고있다.

초창기에 잡지사는 사무실이 없었기에 항상 애로가 많았다. 남의 사무실을 빌려쓰든가 아니면 코구멍만한 세집을 잡고 넷이 들어앉아서 편집을 해야 했으며 2000년에야 116평방으로 된 주택을 하나 사서 사무실로 사용할수가 있다.

창간호 발행이 2000여부로부터 번영시에는 3만부까지 달했으며 현재 조선족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4000여부를 오르내리면서 문학지로서는 상당한 발행부수를 보존하고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사무실이 없는 서러운 나날을 돌이키면 가슴이 설레인다. 남의 눈치를 봐가면서 사는 그 고통은 당사자 아니고서는 리해할수가 없다. 특히 발행때마다 그 애로가 더 컸다. 한때는 발행료의 40퍼센트를 우전국에 줘야 하기에 우리는 자체발행을 시도하였는데 3만부 되는 잡지를 뜨락에 부려놓으면 산더미가 되였다. 그러면 그것을 뜨락에 늘여놓고 잡지사의 가족들마저 모두 동원하여 며칠씩 잡지를 봉투에 넣고 주소를 적으면서 발행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잡지사에게《광장편집부》란 미칭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비오는 날이면 잡지를 6층 사무실까지 메올려야 하는데 지쳐쓰러지는 직원이 한둘이 아니였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불만없이 수걱수걱 일을 하군 하였다.

잡지사는 그냥 차량이 없었기에 발행시에는 자전거로 운반을 해야 하는데 남직원들은 열몇번씩 봉투에 담은 잡지를 실어날라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우리 잡지사를《자전거잡지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잡지사직원들은 더 좋은 작품을 모집하기 위하여 넓은 통화벌을 누비며 다녔고 발행부수를 늘이기 위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군 하였다.

재정상황이 어려웠기에 항상 출장보조도 받지 못하면서 되려 월급을 달달 털어서 발행에 보태쓰기도 하였다. 그래서 때로는 월급이 마이나스가 될 때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잡지사의 간거한 력사를 아는 사람은 이를 두고《장백산정신》이라고 한다.

장백산은 문학지로서 초창기부터 그 종지가 명확했다. 문학의 쟝르라면 다 취급대상이 되였다. 소설문학을 위주로 하면서 시, 수필, 실화문학, 평론, 잡문, 등 란을 설치했고 대형문학지란 그 우세로 장편을 많이 취급해왔다. 지금까지 장편만 해도 거의 50여편이나 되며 취급한 원고가 거의 6천만자에 달한다. 와중에 박선석의 대하소설 《쓴웃음》은 장장 7년반동안 우리 잡지에 련재하면서 국내외 독자들의 감탄을 불러오기도 했다.

장백산은 항상《최선》이 우리의 표준이였다. 그래서 이미 고인이 되신 항일투사 김학철선생의 만년의 많은 주옥같은 작품이 거의 우리 잡지에 실렸으며 김학철선생 본인도 우리 잡지에 글을 내는것을 원했다. 역시 이미 고인이 되신 연변대학 부학장 정판룡교수는 생전에 《고향떠나 50년》이란 력작을 쓰셔서 우리 잡지에 련재를 했으며 이 작품은 지금 봐도 우리 조선족문학에 있어서 길이 남길 력작이 아닐수가 없으며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의 재부가 아닐수가 없다.

《몽당치마》를 쓰셔서 1983년 전국우수단편소설상을 탄 원로작가 림원춘선생님은《우산은 비에 운다》란 장편을 우리 잡지에 련재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뿐만아니라 지금은 자서전《그날의 25시》를 련재하고있다.

연변대학 교장으로 계시는 김병민교수는 연변대학 60돐을 맞으면서《와룡산일지》를 우리 잡지에 련재하고있으며 이 글은 연변대학의 빛나는 력사가 담겨있을뿐아니라 우리 민족의 창업사가 그려졌기에 많은 국내외 교육자,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있다. 그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우리 장백산의 이 진지에서 자기 문학의 꿈을 키워가고있다.

우리 조선족문학은 중국 문학의 일부분으로서 우리《장백산》은 우수한 중국문학을 조선족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저명한 시인 하경지. 애청 등의 주옥같은 시를 소개했을뿐아니라 중국문단흐름을 알리고저 《형제》,《청자기》같은 당년 판매량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작품들을 련재하기도 했다. 우리는 시종 중국문학란을 설치하여 좋은 작품들을 실으면서 조선족문학이 중국문학과 더 빨리 더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여 정성을 다해왔다.


《장백산》은 초학자를 키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십여년동안 줄곧 대학생코너를 설치하여 대학생들의 작품특집을 꾸리는것으로 조선족문학의 대를 잇는데도 홀시하지 않았다.

장백산은 줄곧 세계적인 범위에서 우리 민족문학의 만남의 장, 교류의 장을 만드는데 힘써왔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좋은 정세를 세계에 알리고 장길도 건설에 의바지하고저 우리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86년부터 우리는 한국, 조선, 일본, 미국, 카나다, 브라질, 독일 등 각 나라의 우리글 작가들의 글을 실어왔다.

장백산은 중국생활체험기와 한국생활체험기란을 설치하여 한국에서의 중국인들의 어려움과 중국에서의 한국인들의 성장과정을 글로 담아 중한문화교류와 경제발전에 가교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 글을 본 분들은 한국에서 살고있는 우리 조선족들의 어려움을 페부로 느끼면서 한국문화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중국시장으로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인들에게는 반드시 장백산의 중국생활체험기를 읽으면 그만큼 도움이 컸기에 우리 나라 대외개방의 좋은 창구가 되기도 했다.

1987년에는 조선의《조선문학》잡지사와《천리마》잡지사의 초청으로 우리 성 해당부문의 책임자들로 조성된《장백산》잡지사 대표단이 조선을 방문하여 당시 장철부총리의 접견을 받는 그런 영예를 지니기도 했으며 한국의 많은 문학지와 자매지를 맺고 교류를 활발히 진행해왔다.

장백산은 한국을 비롯한 국외 많은 나라로 잡지가 나가고있으며 2002년에는 한국 번역원에서《장백산》잡지 200부를 구매하여 한국의 각 대학도서관에 발행하여 연구, 저장하도록 하였다. 지금도 한국의 제일 큰 책시장인 교보문고에 가면 장백산잡지가 판매되고있다. 한국의 서울출판사에서는 무료로 장백산의 초창기부터 2004년까지의 모든 작품을 종합본 68개로 출판하여 한국의 각 도서관으로 발행하고있다.

《장백산》은 많은 작가들을 키워왔다. 통화시 매하구시 농민작가 박선석은 대하소설 《쓴웃음》을 제외하고도 《재해》등 많은 장, 중, 단편소설을 장백산에서 독점련재하는 식이였으며 지금은 당당한 작가로 성장하여 박선석팬이 이루어질 정도로 많은 독자들의 애대를 받고있다.

문학의 황무지였던 통화시 조선족문학은 장백산이 있음으로 하여 마송학, 리승호, 김남현 등 많은 작가들이 배출하였다.

남영전사장은 창작도 잡지사건설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잡지사를 운영하면서도 시창작에 게을리 하지를 않았다. 근간에 그이가 쓴 토템시는 새로운 쟝르로서 중국문단에서 당당하게 한자리를 매김하게 되였다. 그이의 토템시는 북경을 비롯한 많은 대학교 연구생들의 론문테마로 되였으며 북경, 무한, 장춘 등지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남영전토템시세미나를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으며 올해는 중국작가협회에서 조직한 당대 중국소수민족시인 10대《걸출시인》의 한사람으로 평선되여 커다란 영예를 안게 되였다.

사장의 이런 시재와 그의 인격매력은 잡지사를 꾸려나가는데 더없는 재부가 되였으며 《장백산》은 길림성에서뿐아니라 중국작가협회, 국가출판총서의 중시를 받고 많은 지지를 받아오기도 했다.

장백산은 30년동안 많은 작가들을 키웠고 많은 글들을 실었을뿐아니라 많은 문학상을 설치하여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한국 한 지명인사의 후원으로 전국정치협상회의 회의실에서《장백산》문학상 시상식을 가졌으며 당시 조남기부주석께서 친히 시상을 하기도 했다. 당시 수상자로서는 덕고망중한 김학철선생님과 정판룡교수님이였으며 상금도 2만원의 거액으로서 국내외 커다란 반향을 가져오기도 했다.

장백산모드모아문학상은 광주 모드모아그룹의 리성일리사장의 후원하에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장장 8년동안 진행해왔다. 모드모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 달리 수상자에게 수장작가작품집을 출판해주기에 많은 작가들의 인기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50여명이 수상을 했으며 단행본만 해도 52개를 출판했다. 그래서 우리 잡지사를 작은 출판사라고도 한다. 또한 모드모아문학상은 세계문학상을 설치하였기에 많은 국외작가들이 참여하여 명실한 문학상브랜드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또한 우리 조선족문단의 유일한 문학상인《중국조선족문학비평상》은 장백산잡지사에서 올해까지 5회째 주최하였다. 이《중국조선족문학비평상》은 한국의 한림대학 정덕준교수가 발기하고 후원해온 상이다. 장백산잡지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조선족문학의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평선을 하기에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조선족문단을 리드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상이기도 하다. 5회에 달하는 이 상은 상금이 많을뿐아니라 비평계에서는 권위적이기에 론문지가 아닌 문학지《장백산》에서 주최한다는것은 우리 문단에서의 커다란 기여가 아닐수가 없다.

장백산은 항상 진선미를 추구하면서 민족적이면서도 원고의《최고》를 만들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장백산에서 나간 작품들이 많은 국내외 문학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제일 큰 상이라고 할수 있는 김학철문학상이 첫 2회의 수상작품이 다 우리 잡지에 련재한 글이다. 1회에서는 허련순의《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가 대상을 수여받고 2회에서는 박선석의 《쓴웃음》이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작년에 연변주에서 가진《진달래문학상》에서 문학부분 7개 상가운데 4개가 우리 잡지의 작품이다.

장백산은 잡지를 잘 꾸리는데서 그친것이 아니라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올해만 해도 중앙민족대학과 같이《박선석작품연구 및 조선족문학의 현황과 전망》이란 세미나를 가졌으며 연변대학과 같이《불멸의 영령-최채》출간기념식을 가지기도 했다. 《불멸의 영령-최채》는 민족의 력사가 담겨있을뿐아니라 항일투쟁사와 민족정책의 우월성이 담겨있는 력작이기에 우리 잡지에 련재했을뿐아니라 한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으며 중국의 각 명문대학 도서관에 책을 증증하여 저장하도록 했으며 출간기념식을 성황리에 치르기도 했다. 출간기념식에 주정부의 지도간부들의 참여와 지지를 받았을뿐아니라 전국정치협상회의 조남기전임부주석께서 축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중국의 명문대학과 손잡고 학술세미나를 가지는것은 문학지로서는 아름찬 일이지만 그 사회효과는 적극적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런 노력을 계속 도모해나갈것이다.

장백산은 중한문화교류를 위하여 노력해왔다. 2004년에는 한국 10대 시인의 시집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북경의 문예출판사에서 출판하였으며 이 계기로 중한문화교류의 장을 펼쳤다. 중국 작가협회에서는 중한문화교류에서 우리 잡지사의 가교역할을 바랐다. 우리 잡지사에서는 중, 한 시의 번역으로부터 출판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지고 고품위가 있는《중한시집》,《한중시집》을 두개 언어로 출판하였을뿐아니라 두나라 작가, 시인들이 한자리에 만나《중한문화연구세미나》를 가지게끔 추진하기도 했다.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학회에서는 장백산의 공적을 기리고저 우리에게《원정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장백산 잡지사의 휘황찬란한 3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감개무량하다.

당의 좋은 민족정책이 없었다면 장백산의 오늘이 있을수 없으며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성과를 거둘수가 없었을것이다.

우리가 애로에 빠질 때마다 당의 따뜻한 손길이 우리를 고무해주고 밀어주군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성정치협상회의 전임주석이였던 류희림동지는 장백산 초창기에 통화시 서기로 있으면서 줄곧 장백산을 관심해오신 분이다. 성인민대표대회 리정문전임부주임은 항상 장백산의 행사에 꼭꼭 오셔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 분이다.

성민족사무위원회 전임주임이였던 김영준동지는 지금까지도 고령이심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장백산에 와보시지 않으면 마음이 안놓인다고 찾아주시는 잡지사발전에 공로가 큰 분이다. 현직에 있는 성민족사무위원회 강광자주임은 장백산을 밀어주는것은 소수민족정책의 락실이라고 떳떳이 말한다.

항상 재정난으로 시련을 겪을 때마다 성재정청의 지도자들과 성신문출판국의 지도자들은 소수민족문화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의 민족정책에 대한 옳바른 인식으로 많은 관심을 가져다주군 하였다.

장백산 발전연구회 회장으로 계시는 신봉철님께서는 사금을 털어서 장백산잡지의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신 분으로서 장백산 발전사에 빛나는 한페지로 남을것이다.

장백산의 발전은 기업인들의 사심없는 후원과 갈라놓을수가 없다.

광주모드모아 리성일리사장은 거액의 후원금을 내여 장백산모드모아문학상을 설치해주셨으며 연변성보그룹의 정영채리사장과 대화그룹의 리규광리사장, 길림성조선족발전총회 류천문회장은 잡지사가 경제난에 처할 때마다 따뜻한 손길을 주셨으며 김희재교수님께서도 물심량면으로 도움을 주셨다.

한국의 많은 문학단체와 재단의 후원이 컸으며 두산그룹의 리두철회장과 비평상을 설치한 정덕준교수님, 그리고 배상호, 리상규 서지월 등 작가 시인, 지성인들의 도움이 컸다는것을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장백산은 물론 30년동안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지만 아직도 걸어가야 할 길이 멀다.

당의 요구에 아직 먼 거리가 있으며 많은 분들의 베풀어준것보다는 거둔 성과가 작으며 아직 해결해야 할 애로가 많다.

아직까지 작은 116평방의 주택을 사무실로 사용해야 하고 차량이 없기에 발행할 때마다 곤난에 부딪치고 특히 장춘의 교통이 불편한 상황에서 직원들의 출퇴근도 문제가 되고있다. 국가 핵심간행물로서는 너무 격에 맞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의 옳바른 민족정책이 있고 든든한 길림일보그룹의 지도자들의 관심이 있고 많은 기업인, 지성인들의 지지가 있고 많은 작가 시인들의 참여가 있는 이상 장백산의 래일은 더욱 찬란할것이라고 굳게 믿어마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당의 문예방침에 따라《인민을 위하고 사회주의을 위하는》방향과《백가쟁명 백화제방》의 방침아래 력사의 사명감을 안고 어떤 곤난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뚫고 나가는《장백산정신》을 이어받아 당이 믿고 길림일보그룹에서 믿을수 있고 독자들이 즐기는 좋은 잡지로 꾸려나갈것이다.

편집/기자: [ 신정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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