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일레븐)
경기 종료 직전 마지막 역습 기회, 아스날의 모든 공격수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잡은 미드필더 송이 슬쩍 앞을 쳐다봤다. 중앙의 반 페르시-샤막-제르빙요를 둘러싸고 밀란의 수비수들이 몰렸다. 반면 왼쪽 측면의 박주영 앞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봐도 선택은 분명한 듯 했다.
하지만 송의 발을 떠난 공은 제르빙요를 향했고, 패스는 차단됐다.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은 펄쩍 뛰었고, 아스날의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박주영의 입 속에는 씁쓸함이 맴돌았다.
아스날이 7일 새벽(한국 시각) 에미리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1-2012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홈경기에서 AC 밀란을 3-0으로 꺾었다. 그러나 1차전 원정에서 0-4로 패했던 아스날은 합계 3-4, 한 골 차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경기에 앞서 공언한대로 벵거 감독은 이날 공격수를 총동원했다. 반 페르시, 옥슬레이드-챔벌레인, 월콧, 제르빙요를 동시에 선발로 내세웠고 후반 29분에는 샤막을 교체 투입했다. 박주영에게도 오랜만에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 후반 38분 부상당한 월콧을 대신에 그라운드를 밟았다.
아스날은 전반에만 세 골을 몰아치며 ‘대역전 드라마’의 실낱같은 희망을 잡는 듯했다. 그러나 후반 내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고, AC 밀란의 거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공격 일변도로 나선 탓에 시간이 갈수록 선수들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그랬기에 교체로 들어온 박주영은 동료들보다 한발 더 뛰었다. 몸 상태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공격 뿐 아니라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모습. 무언가 '한 방'을 기대하게 했다.
그렇게 후반 정규 45분이 모두 흘러갔고 3분의 추가시간이 주어졌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던 순간, 아스날에게 마지막 역습 기회가 찾아왔다. 박주영도 지체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AC 밀란 수비진은 중앙과 오른쪽에서 뛰어드는 아스날 선수들만 쳐다보다 왼쪽의 박주영을 노마크 상태로 풀어두고 말았다. 공만 주어진다면 결정적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을 잡고 있던 송은 박주영이 아닌 수비에 둘러쌓여 있던 제르빙요에게 패스했고, 곧바로 수비에 차단됐다. 이윽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며 아스날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떨어뜨렸다.
순간 얼마 전 들었던 허정무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의 말이 오버랩됐다. 현역 시절 PSV 아인트호벤 입단 초기 그라운드에서 소외받았던 경험이 담긴 말이었다.
“선수는 자신도 모르게 믿을 수 있는 동료에게 더 패스할 수밖에 없다.”
이날 송의 선택도 마찬가지였다. 올 시즌 전 유럽을 통틀어도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자랑하는 반 페르시, 드리블 돌파 능력이 좋은 제르빙요다. 반면 박주영은 경기 출장 기회조차 잡기 어려울 만큼 부진했다.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대역전의 발판이 될 기회를 살리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박주영의 팀 내 입지를 너무나 극적으로 보여주는 찰나였기에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엔 충분한 장면이었다.
글=전성호 기자(spree8@soccerbest11.co.kr)
사진=PA(www.pressassociat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