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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편]백년력사의 학교 새 백년의 진로는 어디에?(1)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4.08.07일 11:21
기획-계렬조사보도 《길림성 산재지역 조선족학교에 가보다》(25)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편]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은 한복 교복 입고 등교하는 날.

류하현:

○길림성 조선족 산재지역에서 력사 가장 오랜 102년을 자랑하는 학교가 있는 곳

○한국 초대 부통령 리시영 여섯형제가 항일의 꿈 무르익혔던 곳

○운남강무당, 황포군관학교 및 청산리대첩에 군관 대거 배출한 곳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등 반일투사들이 머물던 곳

《류하현은 102년전인 1912년에 벌써 서간도 최초의 보통학교인 〈은양학교〉가 설립된 곳이고 한국 초대 부통령인 리시영 여섯형제가 일찍 항일의 꿈을 무르익혔던 곳이며 한국 경희대학교의 전신이라 불리는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곳이기도 합니다 〈은양학교〉의 방기전 초대교장과 한경희 제2임 교장은 선후로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습니다.》

《102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는 류하현조선족완전중학교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길림성 조선족 산재지구의 〈맏형〉학교이지요.》

일전, 류하현을 찾은 기자에게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 리정호(54)교장은 자신이 나서 자린 유서깊은 고장 류하현의 우리 민족의 력사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류하조선족학교 백년의 발자취》 책을 설명하고있는 리정호교장

《류하조선족학교 백년의 발자취》 펴낸 민족교육 《파수군》

리정호교장은 1980년에 룡해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후로 류하현 이도구중학교, 이도구선광소학교, 삼원포조선족중심학교, 조선족교육중심, 조선족실험소학교 등 류하현 유수의 조선족학교 및 교육기관에서 장장 34년을 일반교원, 보도원, 부교장, 교장으로 근무해왔다.

류하현 102년 민족교육사의 3분의 1에 달하는 시간을 교육일터에 바쳐온 그는 개혁개방이래 류하현 민족교육의 산 증인의 한 사람이다.

리정호교장에 따르면 그는 1989년에 개명하여 설립된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의 제5임 교장이며 1912년의 《은양학교》때부터 따지면 제24임 교장이다.

류하현에는 지난 백여년동안의 류하현 민족교육의 어제와 오늘을 집대성한 책 한권이 있다.

바로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 리정호교장이 주필을 맡고 류하현조선족완전중학교 류복련교장이 부주필을 맡은 《류하조선족학교 백년의 발자취》이다.

리정호교장은 지난 20여년의 자료수집과 유적답사에 기초하여 2009년 7월부터 사비를 털어가며 류하현 전역 및 통화, 매하구, 휘남, 청원 등지를 참빗질하며 민족교육의 산증인 1000여명을 일일이 방문하고 민족학교의 옛 활동사진과 졸업사진과 옛 문자자료들을 수집, 정리하고 력사의 흔적속에 사라져가고있는 학교 옛터들을 직접 촬영하였다.

20만자의 문자자료와 100여장의 사진자료로 이루어진 이 책은 류하현 민족교육 100주년을 맞는 2012년에 교육과학출판사에 의해 인쇄출판되였다.

현재 이 책은 류하현의 민족교육사를 료해,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리정비적인 력사자료로 되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습니까!》라는 기자의 말에 리정호교장은 쑥스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며 《민족교육의 〈파수군〉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로고를 지켜보아온 주변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의 책임심과 의지력에 탄복한다고 한다.



《와! 기자아저씨가 사진 찍어준다.》 이 학교 유치원 어린이들.

1910년대 독립운동의 《전초지》-류하현

류하현은 길림성 동남부의 통화시에 소속돼있는데 3348평방킬로메터의 면적에 38만명의 인구가 살고있다.

그중 호적상 등록된 조선족인구는 2만 3000여명, 삼원포조선족진과 강가점조선족향 등 두개의 조선족향진에 27개의 조선족촌이 있다. 통화지구에서는 매하구 다음으로 조선족인구가 두번째로 많은 현이지만 현재 실제 거주인구는 4000명좌우밖에 안된다.

류하현 조선족사회의 형성은 약 150년전인 1860년대부터였고 민족교육의 발단은 《은양학교》의 설립된 1912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후 조선땅에서의 일제의 무력탄압이 날로 심각해짐에 따라 독립운동의 불길이 점차 해외에로 전이됐는바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활동이 가장 활약적이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자금을 모아 학교를 꾸리고 무장력량을 키워 독립전쟁을 추진했는데 당시 류하현에만 해도 26개의 학교를 꾸려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의 꿈을 꾸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류하현 삼원포였다.

당시 조선의 최고 갑부였던 우당 리회영과 그의 형들인 리건영, 리석영, 리철영 및 동생들인 리시영, 리호영 등 리씨 여섯형제와 기타 반일투사들은 삼원포 추가가에 반일무장단체인 《경학사》를 창설, 이를 거점으로 한국력사상 최초의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독립인재들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는 후날 한국 경희대학교의 전신으로 불리고있다.

한국 제16, 17, 18대 국회의원이며 우당 리회영의 손자인 리종걸이 《다시 그 경계에 서다》라는 책에서 밝힌데 따르면 당시 우당 리회영 여섯형제가 《신흥강습소》창립에 내놓은 돈은 40여만원, 지금으로 치면 한화 600억원(인민페로 환산하면 약 3.6억원)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였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페교될 때까지 선후로 3500여명의 반일 군사인재들을 양성해냈다. 그중 일부 졸업생들은 《운남강무당》, 《황포군관학교》 등으로 떠났고 대부분은 동북 각지에 남아 독립군의 주력이 되였다.

1920년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주도한 청산리대첩에서 박영희, 강화린, 오상세 등 많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견장교로서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여 조선 독립운동사상 최대 승첩을 이룩하는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후날 리시영은 대한민국림시정부에서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국무위원 등 직을 력임하다가 한국의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으며 1949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6년동안 정성들여 키워온 학생들을 졸업시키며.

1912년 《은양학교》 개학시 학생 370명, 최대로 800여명

초대교장, 제2대교장 한국정부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리정호교장에 따르면 현재의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는 1912년 삼원포 대화사에 설립된 《은양학교》를 주축으로, 1923년 강가점 초산툰에 설립된 《동광학교》와 1923년 류하현성서에 설립된 《협창학교》 등 류하현내 력사가 유구한 3개의 학교가 지난 2008년까지 근 백년동안 수십번의 페교와 통합, 개명을 거쳐 최종 하나로 통합된 목전 류하현내의 유일무이한 조선족소학교이다.

1912년 10월, 항일독립운동가 방기전 등이 류하현 삼원포 추가거리에 《은양학교》를 설립하였다. 개학식에 찾아온 학생들중에는 류하지역과 주위 기타 현에서 찾아온 10세의 어린이가 있었는가 하면 30세가 넘은 열혈청년들도 있었다.

주간학교, 야간학교, 주일학교 등의 형식으로 학교를 꾸렸는데 20명의 교원이 370명의 학생들에게 조선어, 작문, 산술, 력사, 지리, 리과, 부기, 도화, 습자, 음악, 체조, 성경, 중국어 등 과목을 전수했다. 학교는 애국열에 불타는 교육을 진행했고 《신흥무관학교》와 밀접한 련계를 갖고 일반학과 외에도 군사훈련과까지 설치하였으며 해마다 체육운동대회도 거행했다.

그때마다 주변의 해룡현, 신빈현, 통화현, 청원현, 산성진 등지의 청년학생들이 사면팔방에서 모여들어 항일구국을 호소했고 각 지역의 독립운동경험도 서로 교류하면서 새 출발점을 찾군 했다.

리정호교장에 따르면 당시 류하현 경내에 1191가구에 5853명의 이주민이 작은 마을 47개를 형성하여 살고있었다고 하니 《은양학교》의 학생수는 류하현 조선족 인구수의 6%에 맞먹는셈이였다. 그만큼 조선족들의 교육에 대한 중시를 엿볼수 있었다.

《은양학교》는 그 영향력이 부단히 장대해져서 1918년에는 학생수가 800명을 넘어섰다.

1920년 9월, 일제대토벌때 《은양학교》는 반일교육을 했다는 죄명으로 강제페교됐고 교장 방기전은 일제에 체포돼 통화로 압송되여 가던중 합니하에서 일제의 군도에 네동강으로 잘리워 장렬히 순국했다.

1990년 한국 정부는 초대교장 방기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졸업하는 오빠언니들을 환송하기 위해 고사리 손으로 연주하는 저급학년 학생들.

류하현 민족교육에 길이 남을 《교장부자 3인방》

부친은 한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장남은 조선 렬사로

류하현의 민족교육사에서 방기전 초대교장외에도 빼놓으면 안되는 인물 세 사람이 있다.

그들로는 제2임 교장을 맡았던 한경희와 제3임 교장을 맡았던 한경희의 장남 한청옥, 제11임 교장을 맡았다가 후날 연변대학 교수로 퇴직한 한경희의 3남 한진옥이다.

1919년, 《은양학교》의 학생 50여명이 일제에 매수된 마적단에 랍치되여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2000여명의 토비군이 류하현경내에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류하현에는 2년동안이나 공식적인 학교가 없었다.

1922년 한경희는 삼원포에 은양학교의 뒤를 이은 《동명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와 원 《은양학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학생을 양성한 《동명학교》의 위망을 듣고 조선 국내를 포함한 각지에서 열혈청년들이 구학하러 찾아들었다.

1924년에는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등 반일투사들이 삼원포를 방문해 한경희의 집에 머물면서 자신들이 쓴 《국어독본》을 인쇄출판하여 조선인학교에 배포하기도 했다.

《동명학교》는 반일교육의 중심지로, 반일여론의 발원지로, 반일운동의 책원지로 부상하여 명실상부한 반일운동 후계자양성의 용광로로 되였다.

한경희는 1915년에 류하땅에 처음으로 《은양학교》의 녀학생들로 《삼성녀자학교》를 설립한 녀성교육의 《선각자》이기도 하다. 가사, 재봉, 자수, 무용 등 학교를 설치한 여자학교는 1928년 한경희교장이 일제에 체포되자 페교되면서 37명 학생이 동명학교에 편입됐다.

1928년 한경희교장이 일제에게 붙잡려 3년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그의 장남 한청옥이 제3임교장으로 부임됐다.

1929년 한청옥교장의 주도하에 학교에서는 문예연출대를 조직하여 각 마을에 내려가 순회공연을 하면서 민중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했고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식자(识字)대오를 조직해 야간이면 각 마을로 내려가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30년, 《남만조선인청년동맹》 지도자였던 한청옥은 반대파인 국민부의 암살을 당하였다.

민족주의자인 한경희에게 대한민국정부는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공산주의사상을 전수받은 그의 장남 한청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는 렬사로 추인했다.

1947년 중국인민해방군 동북민주련군이 류하를 수복한후 한진옥이 동명소학교의 제11임교장을 담임했다. 그해 류하현민주정부의 결정에 따라 《동명학교》는 《동명소학교》와 《동명중학교》로 분리되여 운영하게 되였다.

동명소학교는 동명중학교는 각기 몇십년간의 변천을 거쳐 현재의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와 류하현조선족완전중학교의 전신으로 되였다.

동명소학교는 1950년대 중기에 이르러 학생수가 560명에 달하였다. 1990년 류하현정부의 결정에 따라 삼원포조선족진조선족중심소학교로 승격하면서 주변 4개 향진의 8개의 조선족소학교의 교수를 책임졌는데 당시 관할구역내 조선족학교의 학생수는 742명으로서 개혁개방이후의 최고치에 이르렀다.

리정호는 1992년부터 2008년 삼원포진소학교가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에 통합될 때까지 제19임교장을 맡았다.

1989년 류하현성에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가 설립되였고 류하현내 각 향진에 널려있던 선봉학교, 영풍학교, 안구진학교, 고유방학교, 강가점학교, 삼원포조선족중심소학교 등이 여러 조선족소학교가 2008년을 마감으로 전부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에 통합되였다.

리정호교장은 《갖은 풍파와 역경을 겪으면서 페교와 복교와 통합을 반복하며 간고한 로정을 거쳐온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의 백년은 겨레의 맥과 얼을 이어온 백년이였고 애국애족정신을 키워온 백년이였으며 민족의 영재와 미래의 주인을 길러내는 백년이였다.》며 자부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백년이라는 파란만장한 세월속에서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는 항일투쟁과 해방전쟁 그리고 조국건설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고 민족문화를 영위하고 민족의 영재를 양성하는데 혼신을 다한 학교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기자에게 지난 102년동안 칠전팔기의 류하현 민족교육사를 들려준 리정호교장은 《광복전까지만 해도 류하현에는 39개의 학교가 설립되였었고 불과 20여년전인 1980년대말까지만 해도 26개의 소학교가 존재했었다. 이렇게 력사가 유구한 류하현 유일의 민족학교 교장을 맡게 되여 크나큰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조상들의 유지를 받들어 새로운 백년의 새도약을 이룩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

《하여 우리 학교가 잘못되면 류하현의 조선족 기초교육이 잘못된다는 생각에 그 압력이 진짜 크다》며 리정호교장은 또한번 큰 한숨을 쉬였다.



사업토론도 즐겁게 하고있는 학교지도부 성원들(좌로부터 로은영 부서기, 조경옥 부교장,리정호 교장, 안성실 부교장).

류하현 유일의 조선족소학교

현재의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는 소학교 6개 학년에 7개 학급, 205명의 학생이 있고 유치원은 학전반까지 4년제에 4개 학급, 75명의 유치원생이 있는바 학생과 유치원생 수가 도합 280명이다. 이는 지난 7월 10일 소학교 졸업식날의 통계수자이다.

학생중 5분의 1은 조선족과 타민족 부부가 낳은 아이이며 기숙생은 학생수의 가까운 53명이나 된다. 그중 류하현성과 최소 45킬로이상씩 떨어져있는 삼원포조선족진과 강가점조선족향의 아이들은 여러명이 소반(4살)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고있는데 이들은 두주일에 한번씩 주말이면 부모의 품속으로 돌아간다. 한학기에 가족의 얼굴을 8, 9번밖에 보지 못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는 기숙제학교로서 부지면적은 1만 8000평방메터, 건축면적은 4236평방메터인데 교수청사는 2002년에 건축했고 학생 기숙사는 2005년에 건축했다.

목전, 리정호교장은 로은영 당지부 부서기와 안성실, 조경옥 부교장 등과 함께 학교지도부를 결성하고있다.

학교의 46명 교직원중 남성교직원은 11명이고 정식 사업편제가 없는 대과교원이 6명이다. 그외 타민족교원이 6명 있는데 이들은 주요하게 한어와 영어 교원이다.



18년째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졸업식때마 찾아와 지원을 아까지 않는 한국 동부제철의 유제원계장(오른쪽).

유구한 력사만큼 영예도 수두룩

근년래,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는 당지 당위와 정부의 따뜻한 민족정책과 해내외 우리 겨레들의 열성적인 성원하에서 길림성민족교육선진단위, 길림성근공검학선진단위, 통화시문명단위, 통화시교육과학연수선진단위, 통화시시범유치원, 통화시록색학교, 류하현양성교육시범학교, 류하현삼화건설선진단위 등 수많은 영예를 따냈다.

동시에 리정호교장도 길림성우수중함보도원, 통화시우수교육공작자, 통화시우수보도원, 류하현우수교육관리자 등 영예를 받아안았다.

현재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에서는 리정호교장이 수립해놓은 《학교는 내집처럼 꾸리고 교사는 형제처럼 대하며 학생은 자녀처럼 사랑하고 학부모는 친구처럼 대한다》는 학교경영관과 학교의 실정, 시대발전의 추세에 근거해 《안전하고도 조화로운 학교, 민족특색이 있는 학교, 교육질이 일류인 학교》를 꾸릴것을 학교 운영목표로 세워 우리 겨레가 한마당이 되는, 전통을 이어가는, 민족의 발전과 배움의 즐거움이 넘쳐나는 학교로 꾸리가기에 최선을 다하고있다.



학교의 든든한 후원자들-주변 촌의 촌서기와 촌주임들이 졸업생들에게 영예증서를 발급하고있다.

교원 로령화, 운영경비 부족 심각

현재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의 새 백년의 새 도약을 가로막는 가장 큰 난제중 하나는 바로 교원의 《고령화》문제이다.

리정호교장에 따르면 현재 학교의 대부분 골간교원들은 퇴직을 몇년씩 앞두고있다. 40명의 정식교원중 50세이상이 20명인데 그중 2, 3년내에 퇴직할 교원이 13명으로서 학교 정식교원수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들의 빈자리를 보충할 젊은 교원이 현재 류하현을 통털어 기껏해야 한두명꼴이다. 하여 교원대오의 신로교체 문제가 학교 지도층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이에 비추어 리정호교장은 정부에서 민족사범학교를 잘 꾸리고 해당 우대정책을 출범하여 유치원교양원을 포함한 교원대오를 보충해줄것을 호소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학교 운영경비가 부족한것이다.

교육 균형발전의 정책아래 근년래 현정부와 현교육국에서는 민족학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주었다. 정부차원의 지지와 투자하에 교수설비가 비교적 많이 보충되였는바 실험실, 도서실, 위생실, 음악실, 미술실, 컴퓨터실, 회의실은 물론이고 반급마다 현대화한 교수설비 멀티미디어로 교수를 진행할수 있을뿐만아니라 유치원도 실내, 실외의 크고 작은 놀이감도 수요를 만족할 정도로 갖추었다.

하지만 학교의 부대시설건설은 현내의 한족학교에 비할수도 없이 락후하다.

현내의 한족학교들은 학생수가 1000여명, 심지어 3000명에 달하는 학교도 있는바 학생당 조달되는 학교운영경비만 해도 민족학교의 수십배에 달하여 학교건물은 알록달록 이쁘게 장식돼있고 교정에는 인공잔디가 덮인 운동장이 건설되여있어 민족학교에서는 마른 군침만 삼키고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한국 동부제철, 광양촌 지원사업회, 미국 샌프랜시스코 남선교회, 국경을 초월한 봉사단 등 연인수로 1000여명의 인사들이 학교를 방문, 후원해주어 학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중 동부제철은 1997년부터 18년째 해마다 졸업식때마다 학교에 대표를 파견해 학교건설지원자금과 학생 장학금, 조학금을 전달하고있다.

그외에도 2009년 전국 제5차민족단결선진개인으로 표창받은 삼원포진 선광촌 당지부서기 박성호 등 주변 조선족촌 촌간부들은 학교의 중요한 행사때마다 참가해 지원의 손길을 끊지 않고있다고 말했다.



한복차림으로 놀이터에서 즐기고있는 유치원어린이들.



간식 먹는 시간도 쇼쟁이들에게는 쇼타임.



졸업생 형님누나들의 졸업식날은 유치원생들의 명절날.



청출어람이고 했거늘 우리의 무용공연은 졸업생들에게 질수 없어.



6년동안 갈고닦은 공연의 끼를 한껏 발산하고있는 졸업생들.



6년동안 가르쳐주고 키워주신 은사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졸업생들의 표현.



길림신문 유경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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